져녁 5시 30분. 작은 녀석에게 미안해서 서둘러 나가자고 했다. 시험공부를 해야하는데 몸은 자꾸 뒤틀리고…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안 됐다. 큰 아이가 먹고싶다는 부대찌개집으로 부랴부랴 떠났다. 맛있는 것 먹고 싶대서 말하랬더니 웬 부대찌개란다. 큰 아이 입맛은 어디서 형성되었는지 모르겠다. 감자탕, 떡볶이, 부대찌개, 닭볶음… 닭볶음 빼고 내가 잘 하는 음식은 없다. 살면서 별로 먹어보지도 않은 메뉴들인데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란다. 그것 먹고 싶어서 한국 생각이 더 간절했을 수도 있겠다. 학기말 시험 끝내자마자 한국으로 날아왔다.

큰아이는 대학에서 잘 살았다. 친구들도 잘 사귀고, 공부도 어렵지 않게 하는 듯 했고 두 가지 봉사활동, 두 가지 클럽활동도 열심히 하고 친절한 남자친구도 사귀었다. 겨울 방학동안에는 타주에 가서 학교에서 서포트 하는 봉사활동을 했고 옛동네 보스턴에서 옛친구들과 신년맞이도 했다. 생리통이 심한 편인데 어느 하루 기숙사에서 샤워를 마치고 배가 아파 심하게 구부리고 나왔더니 누군가 부른 911이 응급실로 데려갔단다. 이런저런 검사를 하니 병원비가 만불이 훌쩍 넘었다. 덕분에 건강진단은 잘 한 셈이다. 학교보험으로 커버되고 남은 부분이 2,3천불은 됐는데 전화를 백 통도 넘게 해서 전부 탕감 시켰단다.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졌구나…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학교수님이 못마땅하다는 이야기를 빼면 캠퍼스 생활에대한 불만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즐거웠지만 봄이 되니 집생각이 간절히 나더란다. 그래서 시험 끝나자마자 날아왔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 온 일로 큰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은 없다. 딱 한번,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공개수업을 하던 날, 그때는 미안했었다. 수업방식이 30년 전 내 학교 다니던 시절과 똑같아서 놀랐는데 그 어려운 용어들이 속출하는 수업을 참관하면서 갑자기 울컥했었다. 1교시부터 7교시를 일주일에 다섯번, 한달이면 스무번을 넘게 어떻게 이런 수업을 듣고 있었나… 덕분에 한국어가 일취월장했지만 그 답답함이 와락 실감돼서 눈물나게 미안했었다. 단 학교 내신을 잘 받아야 한다는 압박이 없었고 마치 대학 가기 전 2 년동안 갭이어를 한다 생각하면서 인생공부에 포커스를 맞추었었고 그래서 얻은 것이 많아서 미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아이는 다르다. 안쓰럽고 미안하다. 왜냐하면 어린 나이에 입시지옥, 학구열 광풍속에 내던져진 운명이 되었으니까.

언니는 그맘 때 오후 두 세 시면 집에 왔고 간단한 숙제가 집에서 하는 공부의 다였고 한달에 한번 학교에서 댄스파티를 열어줬고 친구들과 슬립오버를 하고 원하는 만큼 책도 읽었다. 작은 아이는 중학생이 되자 특목고?라는 입시궤도 안에 스스로 올라갔다. 공부를 좋아하지도 열심히 하지도 않았었는데 주위 친구들 영향인지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한다는 압박같은 걸 받는 듯 했다. 한국 중학생들의 현주소를 짐작하고도 남는 부분이다. 학년에 비해 과하게 어렵고 실수하기 십상인 배배 꼬인 수학문제를 풀어야하고 과학이든 사회든 모르는 한자투성이 단어들에게 벼락을 맞고… 한국어 뜻 묻기를 일상의 버릇으로 갖게 되었어도 생소한 단어는 끊이지 않고 출현해서 속속들이 이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 답답함을 준다. 수학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고 도톰한 입술에서 나올법도 하다. 수학을 모조리 바닥에 깔아놓고 밟아줄까… 엄마식 농담을 던지면 헤~ 하고 웃는 모습이 마냥 안쓰럽지만, 내 자식을 괴롭히는 수학을 과감히 그애로부터 떼어놓을 수도 없다. 매우 소극적으로, 진짜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라고 말하면 또 헤~ 하고 웃는다. 그럴 때면 가슴에 허한 바람이 숭숭 분다. 이 아이, 행복한 걸까?

우리 중학교 참 좋아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친구들과 바이하며 손을 흔들때 왠지 행복감이 느껴져요. 특히 수행평가(퀴즈나 실기같은 테스트)를 잘 받은 날은 더할나위 없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아직은 자유로워야 할 나이에 공부구덩이에 던져진 아이의 현주소에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빠른 아이들은 초등생 때부터 공부로 웃고 공부로 우는 환경이 어느덧 미국에서 10년을 살고 한국에서 3년을 살아가는 아이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에선 공부 못 하면 잘 못 살아... 제 언니한테 하는 말을 듣는데 헛웃음이 나오면서 쓰다. 친구들끼리 그런 말을 주고받는 모양이다. 나는 이번에 미국에서는 해본 적이 없는 결심을 한다. 성적표가 나오면 무조건 두 엄지를 높이 쳐들고 너무 잘했다고 말할 것이다(이미 한참 앞서가는 친구들이 많아 본인은 실망할 확률이 높다). 그런다음 으스러지게 껴안아줘야 겠다. 성적이 어찌 나오던 무관하게 말이다. 결과가 아닌 과정의 소중함을 또한번 칭송할 것이다.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가 매겨지는 일이 지금도 앞으로도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