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예정된 시간이 되어 큰아이는 학교로 돌아갔다. 석 달이 조금 안 된 시간이었는데 금새, 후딱 지나갔다. 지독히도 더웠던 한국의 여름동안 추운 곳에서 자라고 학교도 추운 곳에서 다니는 큰아이는 밤마다 잠을 설치고 눅눅한 태양 아래에서 눈을 잘 못 뜨고 다니다가 돌아갔다. 몸에는 습진이 생기고 얼굴은 울긋불긋 여드름처럼 열꽃도 올랐다. 학교로 돌아가니 그런 현상들이 나아졌다했다. 미세먼지, 습기, 열기가 있는 한국이 체질이랑 잘 안 맞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국을 싫다 안 한다.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가족, 친지, 친구가 있고 나쁜 기억보다 좋은 추억이 더 많고 귀여워 해주시는 선생님들도 계시고 엄마와 할머니를 제외하면 사람들이 탈색한 노란 머리를 멋있다 칭찬해 주고 영어 잘 하는 것이 장점으로 통하는 곳… 하지만 올림픽 때 한국선수랑 미국선수랑 경쟁하면 누구를 응원할래? 라는 아빠의 농담어린 질문에 한국, 이라고 반사 답을 하는 동생과는 달리 누구든 더 열심히 한 사람이라 말할 수 밖에 없던 아이. 15년 산 제 정신의 나라 미국과 4년 산 핏줄의 나라 한국중 누구의 편을 들기 보다는 합리적인 답을 찾게 되는 건 그만큼 양쪽 다 제 조국이어서 일 것이다.

이번 해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봉사를 신청해서 작년보다 빨리 미국으로 갔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며칠간 하루 9 시간 동안 맹훈련을 받고 이후 5 일이나 신입생들과 삼시 세 끼를 같이 먹으며 학교에 대해 열심히 안내하고 답해주었단다. 질문은 공통 부문을 꼽을 수 없을만큼 다양하고 개인적인 궁금증이 각양각색인 모양이었다. 개성이 넘쳐나고 각자의 사고가 스펙트럼처럼 뚜렷하게 널린 미국아이들... 외모와 성적으로 일관된 한국 학생들의 관심사와는 사뭇 대조된다. 어른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라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 탓인지 그런 어른들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그러는 것인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는 것처럼 혼란스럽다. 한국 사회에 다양성이 추구되는 중이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솔직히 나는 슬프다. 각설하고… 어쨌거나 학교에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럴 수 없는 행보라 딸아이의 수고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국인에겐 인지도가 낮은 학교이다보니 나만해도 딸아이 입시 때 처음 알게 된 학교에 애정을 갖기란 한 치 모자랐는데 딸아이가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좋아하는 눈치여서 나도 점점 팬이 되어간다. 누가 알아주던 아니던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는 학교에 다닌다는 건 행운이다.

이번 해에는 가까운 친구 네 명이서 욕실이 달린 기숙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은 남학생인데 성정체성이 여성인 그 학생은 여자랑 생활하는 것이 더 편하단다. 그래서 나머지 세 명의 여자가 룸메이트로 끼워주었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냐는 엄마의 질문에 크크 웃으며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한다. 딸이 다양한 사람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 나는 기쁘다.

방학동안에 큰아이 대학친구가 우리집에 머물러도 되겠냐고 물어서 OK한 적이 있었다. 가족여행으로 일본에 가는데 혼자서 먼저 한국을 여행하고 싶다고 했단다. 알찬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스케줄도 상의해 놓았는데 오기 며칠 전에 취소가 되었다. 하필이면 동북 아시아권에 태풍소식이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 손실이 있을 듯 해서 안타까워 했더니 딸아이 왈, 그런 문제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정일 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선배들은 다 부자란 소리를 들었는데 유학생이라 그러려니 생각했더니 미국친구들도 그런 모양이었다. 물론 아닌 친구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립대학 등록금이 오죽이 비싸야지 말이다. 친구들이 부자인 건 어찌 알았냐고 묻자 그냥 집 사진을 보기도 하고… 라며 심상히 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집 사정이야 알게 되지 않겠는가. 남과 비교하여 나를 비관하거나 의기소침해 하는 눈치 없으니 참 든든한 일이다. 다만 그 친구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정은 부러운 모양이었다. 1학년 때는 카페테리아에서 일을 했기에 시간을 쪼개써야 하는 입장에서 부러울만도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오피스여서 훨씬 낫다고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딸아이나 우리나 일 하면서 공부하는 생활이 그닥 안타까운 현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10 시간을 할애해 인생공부를 더 하는 셈인데 나쁠 것이 무엇인가. 딸아이는 봉사활동을 좋아해서 두 군데나 소속되어 정기적으로 봉사를 한다. 이 모든 게 공부다. 책상머리 공부만 공부가 아니다.

1 년간 폭풍성장을 한 동생과 친구처럼 어우러졌던 3 여 개월. 언니가 떠나자 동생은 하염없이 빈자리를 그리워한다. 기왕이면 네 식구가 같이 살면 좋겠지만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 이제는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제 가치대로 살아간다. 그 뒷모습을 흡족히 바라보고 싶다. 먼저 엄마가 믿음의 눈으로 지켜보면 자식들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미숙해 가끔 넘어지고 낭떠러지에 떨어졌다가도 툭툭 털며 일어나는 법을 익힐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