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방콕에서 생긴 일

지구에 발도 못 붙이고, 좁아터진 공간 안에서 희박한 산소를 들이키며 지정된 의자에 몸이 묶여, 수백명이 단 몇 개의 화장실에서 해우를 하고, 눈에 들러붙을 듯 가까운 앞사람의 의자등판을 바라보면서 수 시간을 버텨야 하는 일, 피부는 퍼석하게 말라가고 슬금슬금 다리가 쑤셔와도… 행복하다 느끼는 건 그것이 여행의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태국의 수도 방콕으로 날아갔다. 방콕의 밤공기는 뜨끈했고 노점이 즐비한 대로에선 코를 찌르는 스파이스 향미가 이국의 느낌을 퐁퐁 던졌다. 여행은 그렇지 않아도 행복감을 주는데 겨울에 여름을 체험하는 일은 커다란 혜택이며, 매우 감사한 일이고 그걸 놓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과한 감동이 밀려왔다. 이는 아마도 내가 추위를 어지간히 싫어하기도 하지만 간만에 찾아온 즐거운 여행 때문에 생긴 시너지 효과였을 것이다.

방콕은 한국의 ‘60년대’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너덜너덜한 회벽에 검은 그을음이 피고 다닥다닥 양철지붕이 늘어선 건물안에서는 무엇을 파는 지 조차 알 수 없는 물건이 쌓여있고, 게다가 노점상이 즐비했지만 그 사이사이에 호화로운 빌딩과 엄청난 대형마켓과 gourmet식당과 명품백화점이 우뚝 존재했다. 지금껏 가 본 나라 중 가장 후진국인 곳에서 제일 거대하고 럭셔리한 마켓을 마주한 일은 내게 아이러니였다. 국민의 살림은 궁핍한데 세계의 군주 중 최고의 자산가(2016년 미국 매체 MSN발표)인 왕이 사는 나라는 서로 닮은 꼴이었다.

지난 10월, 그 부호인 푸미폰왕이 서거했다. 태국의 모든 지폐에서 알현해 익숙한 사람. 모든 지폐의 초상을 석권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상은 짐작하고 남았다. 하지만 그 역시 빈 손으로 갔겠지, 저 세상에…

화려하다 못해 눈이 시린 왕궁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조문객과 관광객이 몰려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신기했던 왕궁.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곳곳에 포진해 있던 군인들이 다급히 손짓하며 말했다. “빨리 움직이세요!” 처음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서둘러 구경하고 나가라는 말인가? 했는데(정말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았다) 곧 군인들이 한꺼번에 그 많은 관광객들을 넓은 화단 위로 내몰았다. “줄 뒤로 들어가서 앉아요…” 더 이상의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그 많은 관광객들은 얌전히 화단에 쳐진 줄 안쪽으로 들어가며 퍼레이드가 있을 것 같다는 기대와 상상으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다양한 인종으로 들썩였던 너른 공간은 순식간에 고즈넉한 왕궁의 면모를 내보였다. 태국은 참 스케일이 큰 나라라는 느낌을 받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대체 어떤 멋진 퍼레이드를 보여주려고 그러는 지 어리둥절하면서도 좋은 구경거리에 대한 댓가로 인내를 지불했다. 기다림은 꽤나 길었다. 드디어 나타난 멋진 크림색 세단, 그 뒤로 무엇이 나올까? 그 많은 관광객들은 모두 목을 길게 빼고 쳐다봤다. 그런데 같은 자동차가 또 들어왔고 그 뒤를 이어 또 같은 자동차… 그렇게 대여섯 대의 크림색 세단이 지나가나 싶었는데 곧 군인들이 말했다. “자 이제 됐어요, 나오세요…” 엥? 잉? 엉?

알고보니 왕족이 탄 자동차가 지나가느라 그 야단이 났던 것이다. 굳이 이 사람 저 사람 지적하며 앉으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을까. 불의의 사고를 대비해 배치된 의료진들이 길 한편에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을 보고 알아봤어야 했을까. 그들은 자동차가 지나가자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나는 순간 무릎을 꿇린 것과같은 굴욕감을 느꼈다. 너무 과장된 느낌일진 모르지만 시간의 볼모가 되어 그 바닥에 앉기까지 해야 했던 후유증 탓이었다. 그야말로 왕의 권위가 쩌는 나라… 사람 위에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내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착각한 것은 엄연히 내 잘못이고 사실 왕궁에 살면서 왕궁을 개방하는 왕족들과 관광객이 공생을 하기엔 오히려 잘 구축된 시스템이란 생각이 들면서 굴욕감은 슬금슬금 사라졌다.

이어 이런 생각이 피어났다. 왕이 서거한 지 3개월이나 되었는데 아직까지 검은 옷을 입고 조문하러 온 수많은 국민들, 왕족의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경의와 존경을 표하는 것이 기꺼이 당연하다는 의식(의료진에게 물어봤더니!)은 그 왕과 백성이 얼마나 신뢰하며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 복종이나 타성에 젖은 습관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이 보여서 물어보고 찾아보고 했더니 역시 푸미폰왕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대왕으로까지 칭송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 수많은 관광객들이 지켜본 태국의 모습은 매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실상과 얼마나 대비되는가… 이제 한국은 태국의 왕과 국민처럼 건강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는데 총력을 귀울여야 할 것이다. 학연, 지연, 혈연 다 떠나서 부디 그 사람이 얼마나 정의롭고 얼마나 훌륭한 지에 촛점이 맞추어지길... 좋은 새 지도자를 뽑는 길만이 오늘의 불행에 대한 보상이 되리니… Go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