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그 모임에 오래오래 나가고 싶다
그녀의 손톱이 참 맑았다. 책장을 넘기는 긴 손가락에 눈길이 머물렀을 때 짧고 둥글게 자른 손톱이 선홍색을 띄는구나… 생각했다. 난생 처음 만나 잠시 동안만 말을 나눈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꼈다면 그건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나와 닮은 소박한 손톱을 가진 그녀한테 열리는 마음은 그냥 흐르는 물같이 자연스러웠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독서토론모임같은 거 해 본 적이 없지만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취미가 같은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쉬운 철학서를 읽고 간단하게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모임에서 그녀를 만났고 더불어 닮은 꼴의 세 명의 그녀들을 더 만났다. 그녀들같은 여자만 있다면 네일숖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첫날 나는 그런 생각도 했다.
아마도 세 번 째나 네 번 째 만남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친숙하게 지내온 그녀들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지인이 일을 시작해서 일주일에 한 번 청소하고 음식 만들어 줄 사람을 구하는데 혹시 주변에 소개해줄 만한 사람이 있나요? 아, 그렇잖아도 시간도 남아돌아 일했으면 했는데 내가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좋지요. 믿을만한 분이라고 제가 적극 추천할 수 있어요… 둘의 대화를 듣던 나머지 우리들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은 꾹 다물었다. 유구무언. 좁은 땅인지라 일을 하겠다는 그녀는 일손을 구하는 댁을 잘 안다고도 했다. 더군다나 그런 집을…
내가 놀랐던 이유는 단 한가지, 말을 꺼낸 그녀와 말을 받는 그녀가 어떤 편견도 가지지 않은 채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직종이나 인간에 대한 속세적 틀이나 차별의식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 자신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험대에 올라 잠시 휘청거렸다. 우리 중 누군가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권위의식이나 체면치레 같은 허상이 없군요, 존경스럽네요… 가사도우미 알바를 하고 싶어하는 그녀는 남편이 전문직에 종사하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대학을 나왔고 대안학교 학장을 지냈고 두 아들은 성장을 해서 과외비를 벌어야 할 상황도 아니었다. 아마 누구라도 그 장소에 있고 그녀의 백그라운드를 알고 있다면 놀라지 않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이 어찌 그런 일을 하시겠어요? 라는 반응 대신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 적극 추천할 수 있다고 말하던 또 하나의 그녀, 존경스럽다고 말하던 또 하나의 그녀… 그런 그녀들, 세상의 잣대를 갖지 않고 살아가는 그녀들, 손톱이 순박해서 눈길이 분산되지 않는 그녀들 덕분에 좁아진 내 편견이 시원하게 뚫렸다,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 겉치레와 체면, 의뭉함이 이 나라의 전통문화처럼 여겨져 괴로웠던 나날들… 이후로 나는 이 모임에 오래오래 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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