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이후 – 그날 아침과 빼앗긴 시간

그날 아침, 몸속의 피돌기가 심상치 않았다. 잔바람 이는 수면처럼, 십만 개의 물비늘처럼, 새싹 움트는 들판처럼 삐죽빼죽, 울퉁불퉁, 무언가가 매끄럽지 않았다. 야릇한 긴장감과 흥분이 미세하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당사자도 아니고 그 일로 인해 삶이 바뀔 처지도 아닌데 절체절명의 순간을 앞둔 운명처럼 왜그리 좌불안석이 되었는지…

스프를 컵에 담아 전자렌지에 돌린다는 것이 그만 뚜껑을 덮다가 컵을 쓰러뜨렸다. 덜렁대는 편이 아니라 그런 일은 드물었다. 문득 내가 이런데 당사자는 오죽할까란 생각에 미쳤지만 금방 고개가 도리도리를 쳤다. 그 여인은 오히려 담담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와는 애초부터 다르게 생겨먹은 사람같아서… 나도 절대 소심한 편이 아닌데 어떤 마음가짐이면 이렇게 자신으로 인해 나라가 두 쪽이 났는데도 죄가 없다며 무소의 뿔처럼 떳떳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무릇 태평성대에서 성군은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법이라 했다. 법리상의 죄는 아직 재판으로 판명되지 않았으니 차치하고라도 온 국민이 대통령 한 사람때문에 시간을 빼앗기고 추위에 떨고 분을 토하고 배신감을 느끼거나 옹호하느라 괴로운데 어찌되었건 죄인의 마음으로 고뇌하고 읍소할 것이 있다면 겸허한 자세로 특검이나 헌재의 부름에 나서야 마땅한 일이거늘 뿌리가 박힌 그루터기처럼 꼼짝않고 성벽 안에서 숨만 쉬고 있으니 대체 그 양심이나 도리나 판단력이 무슨 모양과 재질로 이루어졌는지…

나는 그저 인간된 도리만으로 그 여인은 옳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이 굳혀졌다. 한번은 헌재 앞에 간 적이 있는데 추워서 잠시 서있어도 이가 딱딱 부딪는 날, 곱은 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누군가를 옹호하느라 얼굴이 벌게진 사람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여인은 죄인이 틀림없다는 자체 선고를 내려버렸다.

이름하여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134일 동안 나는 몇 년간 볼 뉴스와 토론회를 한꺼번에 시청했다. 책 읽을 시간, 음악 들을 시간, 좋은 생각과 대화를 할 시간이 모두 이 게이트로 빨려들어갔다. 스무 번의 토요일 동안 광화문을 메운 인파는 그 좋은 시간을 민주주의를 곧추세우기 위해 썼고 반대편에선 최면에 걸린 중장년들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거나 알바를 하며 추위와 싸웠고 죄없는 경찰과 어린 전경들은 피끓는 시간을 좁은 버스 안에서 쭈그린 채 보냈다. 빼앗긴 시간에 봄은 오는가, 그날은 바로 그 절체절명의 가치가 드러나는 날인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봄이 오려면 여인은 탄핵이 되야 하고 탄핵이 되지 않아야 했다. 8대 2로 갈라진 국민이라서 한가지 봄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헌재의 결정에 따르는 수 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날은 불을 보듯 뻔하게 난장이 예상되는 날, 유례 없는 평화 시위로 국민의 반끝 남은 자존심이 지구상에 전파되는 위로마저 먹칠이 되어야 할 그날. 그 3월이 봄으로 회생하려면 무엇보다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믿음이 깊은 마음에서 피어나야 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헌재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결정문을 읽는 재판관의 목소리는 참으로 정결하고 맑았으며 어떤 아나운서의 말소리보다 뚜렷하고 고운 발성인 듯 느껴져 마음이 좋았고 뜻이 잘 전달되었다. 아침에 헤어롤을 말고 나온 재판관의 머리는 자연스레 풀어져 있었다. 올림머리의 인위와 대비되었다. 카메라가 득실대는 공간 안에서도 헤어롤을 말 뿐인 소박함이 당당해서 빛이 났다.

대통령의 다섯가지 소추안에 대한 결정문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세가지 항목에 따른 결정에서 그러나가 세 번 이어지자 귀에서 쿵 소리가 났다. 문득 이렇게 ‘그러나’로 끝나서 머리를 올리고 메이크업을 마쳐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속이 허한 여인의 공화국에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가… 싫지만 수용해야 할 헌재의 결정을 경박히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숨소리가 작아졌다. 단정한 말소리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최서원이라는 이름과 그가 일군 탐욕이 정신없이 널렸다. 그러는 와중 다행히 ‘그러나’는 안 들렸다. 대신 ‘그런데’가 들렸다. 순간 두 팔이 스르륵 올라갔다. 주문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다섯 사안중 한가지만이라도 위헌에 해당된다면 탄핵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팔은 귀 위에서 쨍하니 부딪쳤다. 새 시대가, 정의와 민주주의와 헌법이 바로 선 나라, 국민 위에 또 국민이 없는 시대의 확인을 축하하는 박수소리가 뜨겁게 울려 퍼졌다. 생뚱맞게 월드컵을 보면서 혼자서 목 터지게 외치던 ‘대~한 민국’이 떠올랐다.

8명의 재판관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결정한 일이라서 믿음이 피어났다. ‘그런데’로 점철된 결정문이 아니라서 더 믿음직했다. 공정하게 이루어진 재판이라 가슴에서 소용돌이가 일고 죄 없는 사람을 죄인이라 함부로 단죄한 것이 아니라 안도했다. 그날 아침, 빼앗긴 시간에 이쁘게 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