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후배집에서 받은 쇼크

남편 후배댁에 잘 다녀왔다. 요트 선착장이 딸린 근사한 집이었다.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없지만 요트 살 꿈을 꾸느라 더욱이 행복한 듯 보였다. 꿈은 이루어졌을 때도 좋지만 꿀 때는 더없이 즐거운 법이니까. 선착장에는 두 개의 의자가 물을 바라보고 놓여있었다. 작은 시내가 강으로 이어지고 강이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 앉아서 맥주캔을 기울이며 저 끝에 있을 대서양을 상상하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맑은 공기, 청정한 하늘, 물과 이야기가 있으니 요트쯤 없어도 이미 천국이었다. ^^

선착장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뒷마당은 숲이었다. 수림은 겨울나무답게 벌거벗고 있었지만 위상이 등등해서 봄에 돋아날 연두 잎새의, 여름에 늘어질 그늘의, 가을에 꽃 필 총천연색 단풍의, 초겨울에 쌓일 낙엽의 그 풍성함을 상상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왕릉만큼 긁어 모은 낙엽을 6시간동안 태우면서 어찌나 재미있는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 점이 참 부러웠다. 추위를 엄청 타는 나는 미동북부의 큰 집들이 약간 심란하다. 한국은 난방비가 싸기도 하지만 보일러 난방은 집의 크기와 상관없이 추위를 물리치고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데 미국은 난방비가 비싸니 아무래도 아낄 수 밖에 없고 설령 한껏 온도를 올려놓아도 뜨거운 바람으로 덥혀지는 공기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서 아늑하기 보다는 답답한 것이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서 나는 큰 집이 그닥 부럽지 않다. 그리고 어디든 자연이 흐드러지고 아름다워서 굳이 내 뒷마당이 숲이 아니어도 괜찮다. 곳곳에 인공호수나 강도 많으니 조금만 나가면 물을 만난다. 그래서 천국 같은 그 댁의 환경이 좋아보였지만 부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낙엽을 그러모아 태우는 일은 조금 달랐다. 낙엽을 태우면서 그 향을, 그 연기를 그 불꽃을 체험하며 상념에 빠져볼 수 있는 낭만은 그러한 일을 벌일 수 있는 내 공간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문득 부러웠지만, 친절하고 속 깊은 주인장에게 돌아오는 늦가을, 낙엽을 함께 태우자는 부탁을 할 수 있을 듯해서 지금은 기대가 만땅이다.

후배의 남편은 부인이 요리할 때도 도와서 뚝딱 닭요리를 만들더니 식사 때 시중도 잘 들고 식사후 부인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테이블 정리를 혼자 했다. 그러더니 차도 맛있게 준비해 주었다. 물론 부인 쪽 손님을 초대한 자리이긴 하지만 의식적인 배려라기 보다는 평상시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그 장면은 내게 데자뷰를 일으켰고 이어서 매우 치명적인 감상도 불러 일으켰다. 어디선가 많이 보고 너무 익숙한 장면, 남편이 요리하는 부분만 빼면 그건 바로 6여년 전까지 우리집 풍경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자각이 한순간에 쑤욱 올라왔는데, 그러자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는 것이다. 남편은 이제 손님이 오시면 자리에 짱박혀 앉아 있다. 음식대접은 여자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언젠가는 버릇처럼 잡으려던 손을 슬쩍 놓으면서 이런 말도 했었다. 한국에서 중년의 남녀가 손을 잡고 다니면 불륜으로 본대. …… . 세상에… 미국에서 살 때 우리는 당연하게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었다. 무엇보다 남들이 어찌 보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작고 얕아지는 남편에게 실망을 금치 못했다. 농담같지 않은 농담, 남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행동들, 집안일에서 슬슬 멀어지려는 꼼수. 나는 내 남편의 변화에 화가 나면서도 어쩔수 없이 적응해서 살아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그의 친구들을 만나고 나는 나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러다보니 함께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주로 부모님 댁에서나 함께하다보니 남자는 그저 자리에 앉아서 대접을 받으면 되는 입장이었지. 그것이 버릇이 되었는지 이제 손님이 오면 나만 부엌을 들락거리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후배집에서 예전의 우리집 모습을 데자뷰로 맞닥뜨리니 너무나도 그리운 추억이 떠오른 듯 가슴이 아려왔다. 아, 그때 나는 큰아이 대학 갈 때 이후 두번째로 우리가 만약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이란 전제로 쓸데없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자 우리도 이 사랑스럽고 존중과 배려가 가득한 부부처럼 살아가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고 정말 통탄스럽게 한국에 간 일이 후회가 되었다. 이것은 큰 쇼크였다.

나는 한국은 한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좋아하지만 우리 가족의 생활방식은 미국에서가 훨씬 아름답고 정겹게 추억된다. 그래서 미국에서 계속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기 시작하지만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소원이다. 그래서 다른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다. 남편이여, 부디 예전의 당신으로 돌아와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