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미국, 다른 삶 (1)

20여 년 전, 남편의 유학을 위해 도미 후, 반년 이상 자동차 없이 아파트와 주차장만 빙빙 돌며 지냈던 시간은 생각해보면 다시 되돌려 싹둑 잘라버리고 싶은 개인사다. 아파트 울타리를 벗어나면 숲과 도로만 있는 환경이었다. 그 길로 차만 다녔다. 상가는 물론이고 대중교통같은 건 태고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개미가 떼지어 빵가루를 나르고 도마뱀이 스케이트날처럼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해 하던 며칠을 빼면 감옥에 갇혀 산다는 생각을 어쩌지 못했는데, 어차피 6,7 개월 후에 구입할 두번째 차를 절약이란 명목으로 참혹한 인내와 바꾸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바보짓이었다.

어느 날, 드디어 내 차가 생겼을 때 나와 두살바기 큰아이는 수개월의 감옥생활을 보상하듯 매일 바깥으로 나갔다. 특별히 갈 곳이 없으면 도서관에 갔다. 하도 다녀서 사서가 먼저 반기며 인사했다. 우리를 친구라 부르며 때로는 모르고 놓친 이벤트에 슬며시 아이 이름을 넣어주기도 했다.

도서관에 가면 먼저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한 무더기 골라 테이블에 가지런히 쌓아 놓는다. 미국은 모든 것이 크고 넓었지만 어린이 서가 옆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는 귀엽고 앙증맞았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빼서 한 권 한 권 아이와 코를 박고 읽다보면 어느새 책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새롭게 탑을 쌓았다. 이쪽에 책이 다 바닥이 나거나 혹은 나기 전이라도 큰아이는 그곳에서 또래와 어울려 놀기를 잘했다. 도서관은 책 읽는 곳이기도 하지만 친구를 만나는 신나는 사교장이었다. 아이들이 통과의례처럼 통성명을 하고 때론 나이를 밝히고 함께 그림책을 보며 낄낄대고, 쳇바퀴 도는 햄스터를 바라보며 귀엽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이 엄마들은 통성명을 한 후 말을 나누거나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미국은 이름이 중요한 나라다. 가족은 물론 친인척간에도 이름을 부른다. 만나면 이름을 묻고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귀하게 여긴다. 고객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면 좋아한다. 그 문화를 인지하기 전에는 잠시 만났다 헤어질 사이에 왜 꼭 이름을 묻는지 의아했다.

아이들은 몇 번 만남이 반복되면 당연한듯 친구가 되어 조용조용한 놀이에서 활달한 놀이로 만남을 확장하고 싶어했다. 그러면 2차 교제를 위해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가 내리는 날엔 맥도날드나 웬디스 같은 곳에서 소모된 에너지를 보충하면서 실내 놀이터의 혜택을 누렸다. 그렇게 뜻이 맞는 친구가 생기면 다음 순서는 돌아가면서 각자의 집에서 플레이 데이트를 한다. 나는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집에서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이 문화를 참 좋아한다. 친구를 배려하며 내 것을 공유하는 경험이 쌓이고 양보도 배울 수 있다. 엄마들도 안심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사실 두번째 차는 기다리던 아이의 프리스쿨에서 자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은 후에 샀다. 통학을 위한 차가 필요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늘 그런 식이었다. 남편 아니면 아이를 위한 생활이라는 게 말이다. 차는 처음부터 도가 지나치게 필요했지만 아이의 학교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남편 위주로 돌아가던 나의 우주. 나는 지금 서서히 그 우주의 중심에 나를 세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차를 사고,

엄마와 함께 늘 아파트 주차장을 맴돌며 놀던 아이는 일주일에 이틀, 3시간동안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분리불안때문에 첫 날 정도 울었을까. 친구 빠치는 큰아이는 순식간에 학교의 광팬이 되었다. 아이의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세가지 이유로 기뻤다. 하나, 아이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며 또래와 함께 생활할 수 있어서. 둘, 덕분에 날개 같은 내 차가 생겨서. 셋, 그토록 바라던 ESL class에 다닐 수 있게 되어서…

문화도 낯선데 영어로 말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해 세살바기와 다름 없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던 첫 미국생활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자동차라기 보다 ESL 수업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조속히 말하기 듣기에 익숙해져서 성인다운 처신을 하며 살고 싶다는 갈망이 도를 넘도록 끓었다. 나는 얼른 서른 한 살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행히 아이가 학교에 있는 동안 미국교회에서 개최하는 무료 ESL class가 있어서 등록을 했다. 아파트를 벗어나 그토록 원하던 영어회화 수업을 받으며 같은 처지의 여인들과 교제를 하면서 나의 진정한 미국생활은 그제서야 비로소 '시작'을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