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미국, 다른 삶(4)-영어때문에...

내 차가 생긴 이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기다리던 동네 community college의 ESL class에 다닐 수 있게 된 날, 소문에 의하면 프로그램이 매우 잘 되어 있다는데 아이의 학교 스케줄과도 맞고 고맙게 무료라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 같던 그 첫날, 젊은 학생들과 뒤섞여 대학 캠퍼스에서 책가방을 메고 걸어다니자니 가슴이 야릇하게 부풀어 올랐다. 물론 생소한 영어사회에 덜컥 발을 디딘 긴장으로 피돌기가 빨라졌지만, 몇 년간의 회사생활을 과감히 접고 새벽부터 자정까지 책에 코를 박고 생활하기 시작한 남편이 말하던 그 가벼움, 기대, 향수, 희망…이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아내나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서 느끼는 이 만족감을 남편은 아빠와 가장된 자의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이는 만고의 진리였다. 어른들은 늘 말씀하셨지, ‘학창시절이 제일 좋은 시절’이라고… 아이 때는 고걸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 좋은 학교에서 나는 꼴랑 3개월?을 보낸다. 그리고 ‘어떤 순간이든 늘 정직하고 성실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좌우명에서 약간 벗어나 살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에 빠진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미리 정해진 날짜에 가서 레벨테스트를 받았다. 당연히 평상시 임하는 자세로 열.중.해서 시험을 치뤘다. 나로 말하자면 외우는 과목은 매우 취약했지만 영어는 제법 했던 학생이었다. 한국에서 영어점수를 잘 받으려면 문법과 독해에 능하면 된다. 내 영어는 그런 꼴이었다. 듣기도 조금 했겠지, 듣기시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회화는 요원했고 지금도 요원하고 앞으로도 요원하리라 생각한다. 말하기는 적어도 내겐 다른 영어였다. 어쨌거나 말하기를 뺀 형식의 시험결과로 나는 제일 윗반에 배정되었다. 첫 날 반에 들어가서는 깜짝 놀랐다. 선생님이 뭐라뭐라 하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고 대꾸가 거침없이 날아왔다. 그룹별로 자유토론 같은 걸 하면 그들은 유창하게 말을 했다. 물론 발음은 조금 구렸겠고 broken English도 난무했겠지만 그런 것이 가늠될 처지가 아니었다. 영어를 듣고 거침없이 영어로 대꾸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경외감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첫 시간 자기소개를 한 후 선생님은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리하여 간단하게 테스트를 한번 더 봤다. 그때 선생님은 신 경험을 했을 것이다. 독해를 이다지도 하는데 말을 이다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만족감이 분기탱천하던 그 학교에서 나는 겨우 3개월을 다니고 무슨 의미일지 모르는 수료증을 받고 내쫓겼다. 한번 더 다닐 수 없겠냐는 간청에 노우,라는 대답을 시원하게 듣고서…

이후 나는 각종 ESL 학교에서 레벨테스트를 적당히 보았다. 일부러 틀리기도 하고 문제를 읽지 않고 답을 고르거나 아예 안 쓰기도 했다. 어차피 내 회화실력은 저 아래반에 들어가야 적당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철학에 반하는 부정직한 행위는 특정되고 제한된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꽃을 피웠다.

교회, 도서관, 컴칼, 문화센터, adult school… 미국은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주는 ESL class가 곳곳에있고 그 복지혜택을 누리는 외국인은 신이 난다. 감사한 일이다. 그곳에선 영어를 배우고 미국문화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만 외국친구를 사귀는 즐거움도 엄청나다. 나는 30년 동안 단일민족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오면서 한국사회에서 체험하지 못했던 신세계를 만난다. 과학적 근거에 의하면 겉모습과 상관없이 99.9999…% DNA가 동일한 인류가 그토록 다른 풍습과 문화와 언어와 전통을 가진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비로워 어쩔 줄 몰랐다.

인도친구, 일본친구, 중국친구, 프랑스친구, 멕시칸친구, 터키친구… 그들은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하지만 미국인으로부터 받는 압박감? 억울함? 의아함? 수치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게 해주어서 정겹고 친근했다. 내게 ESL선생님을 뺀 미국인들은, 당시 내가 미국인이라고 묶은 카테고리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 , 대하기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왜?

왜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단 하나!!, 영어 때문이었다. 그들의 모국어로 소통하는 입장 자체가 불공평에서 시작되는데 그들은 심지어 영어만 말할줄 알면서(외국어를 할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태도가 달랐다), 모국어가 따로 있는 우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영어가 서툰 사람에게 어떤 배려를 하면 되는 지 모르는 것 같았다. 말을 못 알아들어서 Excuse me? 하고 반문하면 똑 같은 속도로 똑 같은 말을 성의 없게 반복했다. 나라면 천천히 다른 쉬운 말로 설명해 줄 것이다. 20년 전, 조지아 로컬 뉴스에서는 외국소식이 없었다. 적어도 조지아에서는 그랬다. 당시 한국은 뉴스 말미에 나라밖 소식, 해외토픽 같은 코너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은 뿌리가 외국인 사람들이 모였지만 외국과 외국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라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 친구들이 좋았고 서로 버벅대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구는 말로서 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통하는 사이임을 깨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