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할머니,

하얀 배꽃이 집 앞을 소복하게 덮은 봄날이에요. 할머니의 여든아홉 번째 생신을 축하드려요!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눈앞의 벽시계를 보고 왈칵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어요.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가 어찌나 야속하던지. 저는 그 당시 온 세상을 잃은 듯한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이 세상은 여전히 규칙적으로 아주 잘 짜인 계획표대로 삼라만상이 조화롭게 어울려 돌아가는 것이 허무하고 서글펐어요.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9년 전 할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이 저를 ‘삶과 죽음’이라는 화두로 이끌었고, 답을 찾아 헤매는 동안 자신을 비탄의 심연으로 계속해서 가라앉히는 의식을 되풀이한 것 같아요. 

할머니,

요즘 저는 할머니께서 남기신 진정한 유산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고 있어요. 이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작년에 주방을 수리하게 되면서부터였어요. 처음에는 단순한 공사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물건을 정리하는 동안 할머니께서 아끼시던 문갑이 떠올랐어요. 그러자 가족들이 할머니의 49재를 준비하면서 문갑에 담겨있던 옷과 귀중품을 정리할 당시의 기억까지 더욱더 또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죠. 그 후 몇 달 동안 곰곰이 묻고 또 물었어요. '자그마한 문갑 두 채를 채울 만큼의 물건만 남기시고 떠나신 할머니가 우리에게 진정 전해주고자 하셨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구심은 깊어만 갔고, 문갑에 정갈히 정돈되어 있던 할머니의 소지품에 대한 잔상도 쉽게 떨칠 수 없었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한참 따라가 보니, 할머니께서 남기신 조촐한 유품의 의미가 할머니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신 법정 스님의 말씀과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어요.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가끔 인터뷰할 때 ‘스님의 소원은 뭡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내 개인적인 소원은 보다 단순하고 보다 간소하게 사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집의 부엌 벽에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간소하게’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단순함과 간소함이 곧 본질적인 세계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다 털어내고 꼭 있어야 할 것과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어떤 결정체 같은 것, 그것이 단순과 간소이다.” - 法頂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그리운 할머니,

공부에는 끝이 없다던 할머니의 말씀대로 정말 배움의 길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시작인 것 같아요.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할머니의 은혜 또한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음을 깨닫게 돼요. 할머니! 올해 생신에는 한 가지 써프라이즈가 있어요. 할머니 손녀딸이 도자기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때마침 할머니 생신에 맞춰 저의 첫 작품이 가마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할머니께 보여드리려고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만든 찻잔에 차를 담아 할머니께 올릴 수 있는 날을 마음에 그리며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연세가 지긋하신 도자기 선생님께서는 할머니처럼 온화하고 소녀 같은 눈망울을 가지신 따뜻한 분이세요. 요즘은 도자기를 만들면서 다시 한번 중심과 기본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있어요. 물레를 돌리기 전에 흙을 힘껏 두드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과정이 예쁜 그릇을 빚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요. 앞으로도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씩 배워나가도록 할 테니 할머니께서도 함께 지켜봐 주세요.

할머니, 저에게 봄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더 아픈 계절이기도 하고, 그만큼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가는 계절이기도 해요. 할머니의 팔십 대의 마지막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매일매일 1초의 쉼도 없이 흐르는 시간처럼 할머니를 사랑해요.

2019년 3월 11일 (음력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