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 무렵 나는 서점에서 <한국의 명시>라는 제법 두꺼운 시집을 구입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시인 183명이 쓴 총 755편의 시(詩)가 수록되어 있다. 그 후 삼십여 년 간 나는 <한국의 명시>와 함께 동거 중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처음으로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만났다. 그리고 이 시를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과 처음 만났다. 물론 그 당시의 나에게 그녀의 이름은 하나의 영어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었던 시절이 아니니, 생소한 단어를 그 자리에서 검색해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당장 도서관을 찾아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고 싶어 질 만큼 대단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가 주는 묘한 여운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떠올릴 때마다 늘 나를 따라다녔다. 

나에게 독서는 여행이다. 나는 그 여정 속에서 지금까지 몰랐던 나와 만나기도 하고, 글을 쓴 작가와 그/그녀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그녀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한 권 한 권 읽어가는 동안 나는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을 여행하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마치 촘촘한 점이 모여 선을 이루듯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치 ‘뫼뷔우스의 띠’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작품도 어느 날 나에게 하나의 점으로 찾아왔지만, 그녀의 이름을 나에게 처음 알려준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와 만나 선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선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여행한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면 숲에도 길이 나듯, 이 선을 통해 나의 내면과 작가의 세계를 넘나들다 보면 하나의 통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 통로를 통해 작품과 소통한다. 그렇게 나는 시공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여행을 즐긴다. 

<자기만의 방>은 1928년 가을 46세의 버지니아 울프가 뉴넘 대학의 예술학회와 거턴 대학의 문학회에서 발표한 강연문 두 편에 기초하여, 이듬해 가을에 출판된 그녀의 작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에게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또 20세기 초 영국 사회의 문화적 모순이 여성의 창작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차분히 설명한다. 나아가 인간의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세상에는 다양한 편견과 불공평이 존재하며, 이 환경 속에서 여성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을 침착하게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사회를 향한 여성의 불만을 낱낱이 들추는 방식으로 공감을 이끌어내기보다, 힘든 현실 속에서 수많은 한계에 부딪치면서도 우리는 왜 성(性)의 영역을 뛰어넘어 한 인간으로서 정신적 풍요로움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명확히 설명한다. 나아가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되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는 활기찬 삶 속에 있다고 여러 차례 당부한다. 이 선상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쓰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이는 여성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때 하나의 객체로서 온전한 독립과 자율성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없이, 창작의 영역을 넓혀간다는 것은 일반인의 상상보다 훨씬 더 어려우며, 실제로 유명 여류 작가들 또한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글을 써왔는지 그들의 일상도 면밀히 보여준다. 

그 후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기만의 방’은 존재하는가?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은 어떤 의미일까? 버지니아 울프가 강조한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나(Authentic Self)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걸까? 이런 물음에 스스로 답해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면, 여러분께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자기만의 방> 영문본 <A Room of One's Own>을 추천하고 싶다. 더불어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깊이 음미해 보고, 그가 노래한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그녀의 생애에 대한 인터넷 검색도 권하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떠올리며 읽는 <목마와 숙녀>와 그녀의 일생을 모르고 읽는 <목마와 숙녀> 사이에는 상상 밖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