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할머니,  

오랜만에 햇살이 바스락거리며 내려앉고 있어요. 올해는 예년보다 훨씬 긴 시간 많은 비가 내렸고, 흐린 날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어요. 얼마 전부터 꽃을 피우며 봄맞이가 한창이던 벚나무는 며칠간 머물다간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낙화를 선택한 듯 보여요. 지금 할머니께서 뒤뜰에 수북이 쌓인 연분홍 꽃잎들을 보고 계신다면, 저보다 더욱 안타까워하셨을 거예요. 할머니는 앉으나 서나 꽃을 아끼고 사랑하신 분이니까요.  

할머니,

지금은 새벽 4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에요. 할머니를 꿈에 뵈었어요. 꿈속에서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할머니 10주기를 위한 제사를 올리고 난 후, 예전에 저희가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부엌에서 요리하고 계신 할머니의 뒷모습이 아른거리고,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시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눈앞에 선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할머니의 형체는 사라지고 말죠.  어떻게 우리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다 보니,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할머니를 틈틈이 촬영했던 홈비디오테이프가 생각났어요. 그래서 진열장에 가서 몇십 년이 지난 비디오 테이프를 모두 꺼내어서 재생하려고 했더니, 테이프의 필름이 부분적으로 녹아 있는 거예요. 어찌나 속상하고 힘이 빠지는지 크게 울 힘도 없어서, 혼자 테이프를 끌어안은채 뚝뚝 눈물만 흘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반야심경의 한 구절이었어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할머니 그 테이프가 만약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서 제가 할머니를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면 할머니는 존재하시는 걸까요? 물론 아니겠죠. 그럼 제가 할머니를 지금 만날 수 없고 안아볼 수 없다고 할머니는 존재하고 계시지 않는 걸까요? 물론 그것도 아니에요. 결국 제가 사랑하는 할머니의 존재는 비디오테이프의 유/무를 떠난 더욱 본질적이라는 진리를 꿈에서 깨달았어요. 제게는 의미 있는 꿈이었지만, 꿈에서 깬 후에도 여전히 흐르는 눈물은 멎지 않았고, 할머니를 보고픈 마음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저에게 이렇게 묻겠죠. “기일이면 제사도 올리고, 명절이면 차례도 지내는데 굳이 돌아가신 분 생신까지 이렇게 챙기는 이유가 있나요?” 답은 간단해요. “제가 챙겨드리고 싶으니까요.” 맞아요. 할머니.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할머니께서 생전에 “할미가 죽으면 네가 꼭 내 생일도 꼬박꼬박 챙겨줬으면 좋겠다. 부탁하마!”라고 말씀하신 적 단 한 번도 없으셨어요. 할머니께서는 오히려 긴 이별을 앞에 두고도 “슬퍼 마라. 인생이란 왔다 가는 것이 당연지사 나이가 많으니까 먼저 갈 뿐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신 분이잖아요. 고운 우리 할머니의 아흔 번째 생신을 축하드려요. 

할머니의 은혜를 제가 감히 글이나 말로 채울 수는 없겠으나, 이렇게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고요한 새벽은 저에게는 몹시 귀중한 시간이에요. 지금 이 순간, 새벽바람이 불어와 할머니가 떠나신 해에 장만한 풍경에서 맑은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어요. 그리운 할머니를 떠올리며 오늘은 할머니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은 도덕경 11장을 함께 되새김질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