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무말없이 나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피더니,

"몸은 괜찮은 거예요? 간호사님 불러야 되는거 아니예요?"

"대답하세요."

"얘기했죠, 숨길맘 없다고...대신, 좀 더 나아진 다음에...얘기해 줄께요. 약속해요."

"나 성질 급하거든요? 주사 다 뽑고 나가기 전에. 어서 얘기해요."

그가 별수없다는 표정으로 들고있던 전복죽 숫가락을 내려놓았다.

"할아버지가...

나를 식당으로 부르신 이유가... 

바로 지수씨 때문이었어요."

"네?"

"돌아가시기 얼마전에...나에게 식당에 있는 공주엄마를 꼭 찾아가라고 하셨어요."

"네? 할아버지가...왜 저를...?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어요?"

"처음엔... 당신이 공주엄마인지 몰랐고...

전에 얘기한데로 할아버지 돌아가시면서 갑자기 모든걸 잃었기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그리고 사실 지수씨가 어떤사람인지 알아보면서... 조금씩, 천천히 얘기하려고 했어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단 말이죠?"

"당신이. 내 아버지의 딸인것 같아요."

"네? 그게...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한살도 안됐을때, 당신의 어머님과 아버지는 이혼을 하셨거든요. 

그 당시에 어머니가 당신을 데리고 나가셨는데... 갑자기 여행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셨고, 차가 불에 타버려서...신분을 밝힐수 없었다고 해요. 당신은 고아원에 보내졌어요. 너무 어렸기 때문에...집도, 이름도 몰랐던거죠. 물론 이 사실도...아주 오랜시간이 지나고, 여러 수사를 통해서 겨우 알아낸것이구요.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 찾는것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왜 그가 그리 질질끌며 이야기를 피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나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왠지모를 억울함과 기억상실증에 걸린사람처럼 막막한 답답함이 숨을 조여왔다.

"할아버지가 당신을 찾게된건...정말 돌아가시기 얼마전이었어요. 그것도 너무나 우연히."

"...계속...해요..."

새파랗게 질린 나를 이신우는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백혈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가족분에게 연락을 안하시겠다고 하셔서, 식당사람들 모두 나서서 골수기증 검사를 받았었죠?"

"...네..."

"골수이식을 하기에는 할아버지의 상태가 너무 빠르게 악화되셨어요... 그치만. 검사결과는 보실수 있었고... 

그때가 되서야 알게 되신거예요."

너무 놀라서인지 멍해졌다.

그런데 

가슴이 아파서 견딜수 없었다.

신음이 터져나올정도로.

이신우는 서둘러 간호사를 불렀고,

"괜찮아요, 계속...계속 얘기 해봐요."

그가 한숨을 들이켜 내뿜더니,

"이것봐요...아직 안정해야 하는데..."

"평생을 알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어요.

가족...나의 핏줄...

그런게 나에게 있을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고 살았어요."

그가 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럼 이신우는 나에게 멀고도 그리운, 가족이었단 말인가? 

"미안해요... 지금 당신한테 해줄수 있는게...이정도밖에 없네요. 

재산은 모두 숙모에게 빼앗겼어요...

지금 나는...빈털털이고... 한국으로 돌아온것도 지수씨가 그때 준돈으로"

"그만."

그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게, 뭐가 중요해요? 당신은 나와 공주를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우리를 도와줬어요."

이신우가 눈물이 고인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에게도...

당신이 유일한 가족이니까요."

그때, 

커튼이 거칠게 열렸다.

이신우와 나는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고,

정말 부티나는 젊은 청년이 우리를 노려보는듯 했다.

"이신우!"

이신우가 찜찜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더니,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고.

"정우야."

"야, 니가 뭔데 나를 오라 마라하냐? 니가 감히?" 그는 좀 짜증난 표정인데, 장난끼가 가득해 보인다.

"정우야" 이신우가 나를 걱정스럽게 돌아보더니, "나가서 얘기하자. 여기 병원이야."

"그러니까, 이 병원으로 나를 부른게 너잖아." 

이신우보다 

나이는 한참 어려보이는데...

"부탁이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자"

정우라는 사람이 나를 돌아본다.

"뭐야, 너 여자친구냐? 어라? 애도 있네?" 

"그런거 아냐."

"뭐가 아니야? 그런게 아니면 니가 왜 나한테 부탁을 하냐? 겨우 천만원가지고."

이신우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고,

순간 너무나 미안해서 내 입술이 떨린다.

나 때문에...병원비 때문에 이신우가 저 사람에게 돈을 빌린건가...?

"넌 이름이 뭐냐?"

이신우가 열받은듯이 정우를 보고,

"내 이름은 왜?" 내가 받아치자,

"허, 참."

그는 기가막히다는듯 웃는다.

"기지배가, 묻는말에 대답이나 해!"

"정우야. 말 조심해."

"오우...그런사이였어? 짜식...왜 눈은 부릎뜨고 그러냐?  자. 그럼, 니가 약속한거나 해."

이신우가 나를 돌아보더니, 정우를 끌어내려고 한다.

"여기서 해." 라며 정우는 여유를 부린다.

무슨일인데...

왜 저러는거지?

하는데...

"안 해? 너 약속 안 지킬래? 그럼 나 그냥 갈까? 여기까지 와줬더니 뜸을 들이고 그래?"

이신우가 잠시 나를 돌아보고는,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한다.

"관둬라, 관둬. 또 다시 나한테 연락하기만 해."

"정우야, 잠깐."

"마지막 챈스다. 지금 안하면, 돈이고 뭐고 없어."

"꼭, 이렇게 해야겠어? 유치하게."

"유치해? 이보다 더한것도 나에겐 시원치 않거든?"

한참을 망설이던

이신우가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는 순간 내 눈을 가렸고,

누군가 내 손을 떼어낸다.

"야, 좋은 구경 났는데 왜 눈을 가려?"

보통때 같았으면 냉큼 그의 손을 던져 버렸을텐데, 아직 힘이 없다. 

"너 뭐야? 이신우씨한테, 왜 이러는거야?" 있는힘을 다해 버럭 화를 냈다.

악...하고 통증에 눈앞에 하얘지는데...

"뭐예요? 왜 이리 소란스러.." 커튼앞에 뛰어들어온 간호사가 이신우를 보고 헉.. 놀라는 모습이다.

"무슨짓이에요? 환자 앞에서. 둘다 나가요! 어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파악하시고는 소리치신다.

"아줌마. 소란스런건 그쪽이야. 당신이나 나가서 일봐요. 우린 아직 얘기 안끝났으니까." 정우가 빈정댄다.

"뭐예요?"

"어서 나가봐요, 험한꼴 보기싫으면." 그가 좀더 심각해지고.

"이 사람들이! 저기요! 최선생님!" 간호사님은 혼자선 안되겠다 싶으셨는지 도움을 청하러 뛰어나가신다.

정우라는 놈은 실실 웃으며 나와 이신우를 번갈아 보고,

"상상했던것 보다, 훨 기분 좋네, 이거?"

이신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잠시 아무말없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한 정우를 노려보더니,

"...와줘서 고맙다." 

"다음에 또 이런식으로 나한테 신세지면, 이 정도로 안 끝난다. 알았어?"

"그래. 알았어."

경비아저씨와 의사선생님이 뛰어들어오시자,

정우는 실실 웃으며 손으로 빠이빠이 하며 병실을 나서고,

"뭐예요? 환자분, 괜찮으세요?"

의사선생님이 내 쪽으로 뛰어오신다.

"네..."

"아니, 이런! 안정하시라니까 이게 뭡니까?"

붕대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있는걸 보신 의사선생님이 이신우를 돌아보며 호통을 치신다.

"이렇게 무리하시면 안됩니다. 보호자분, 나가세요."

이신우는 지치고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아니예요, 나가지 마세요."

"윤지수씨," 의사선생님이 꾸짖듯이 나를 돌아보시고,

"제가 무리해서 그래요. 이제 안정할께요."

...

다음 며칠동안 우리는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내가 고집을 피우며 무리를 하면 할수록 이신우가 더 힘들어질까봐. 병원비가 더 많이 나올까봐,

나는 일부러 아무말도 하지 않고 시키는데로 자고, 먹고, 쉬었다.

공주는 병원안에서도 벌써 인기 최고였고,

이신우도 내 마음을 아는지 묵묵하게 나를 지켜주고, 공주와 놀아주기만 했다.

퇴원하는날,

구부정하게 걷는 나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망설이다가 손을 그에게 맡기자,

그는 내 손을 잡은채로 나를 어깨채 끌어안았고, 나는 따라오는 공주의 손을 잡았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걸을수 있겠어요?"

"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건가요....

하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망설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