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

4년전 병원에서 만났던 모습보다 훨씬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그의 표정이 왠지 인상깊었다.

뭔가 흥미롭다는 표정.

경찰들이 정우를 앞서 서둘러 준혁쪽으로 향했다.

"석아, 니가 벌써 연락했냐? 아직 빚갚으려면 멀었는데 이 새끼들이 왜 벌써 와?"

준혁은 그의 비서 석에게 물었고,

"아닙니다,  제가 부른게...아닌데요...?"

그때, 경찰들이 준혁의 팔목에 수갑을 채웠다.

"뭐야? 뭐하는거야? 미쳤어? 내가 아니라, 저기 저자식이라고! 납치범 이신우!" 

"정준혁씨, 폭력 및 납치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하며 그를 끌고 나가려 했다.

준혁은 기가막힌듯 소리내어 웃었고,

"이것들이...정말 웃기고 있네. 이거 못 놔? 쑈하는거야?"

정우가 뚜벅 뚜벅 준혁앞에 그를 마주보고 섰다.

"아...그 또라이가 너구나. 정준혁."

"넌 뭐야? 죽고싶어서 환장했어? 장난 그만하고 이거 풀지 못해? "

"끌고 가세요. 조사해야죠." 정우는 경찰들에게 명령조로 말했고,

정준혁은 기가막히다는듯 두고보라는 표정으로 경찰차에 올라탔다.

나는 이미 이신우곁에 뛰어가 있었다.

"괜찮아?"

이신우는 나를 돌아보고 

"괜찮아. 놀라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마. 알았지?"

"이것보다 어떻게 더 놀라!"

그때

두세명의 형사가 함께 이신우앞으로 다가오더니,

"괜찮으십니까?"

이신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병원으로 가야죠!" 

내가 소리질렀는데,

"이신우씨죠?" 하는 형사.

나는 굳어져서 이신우에게 다가오는 형사를 돌아보았다.

"네."

"같이 가주셔야 겠습니다. 왠지는 아시죠?"

이신우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그래, 혹시 4년전에 그 일때문에?"

"다녀올께. 걱정하지 말고, 우선 정우가 도와줄거야. 부탁해놨으니까."

 

"뭐? 넌 어떡하고!"

이신우는 조용히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천천히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가끔, 

검정고시를 합격했을때,

통신대학에 입학 통지를 받았을때...

수고했다고 그렇게 딱 두번...

그렇게 했줬던것처럼.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 앞으로도 잘할수 있어. 

언제는 뭐 미래가 보여서 우리가 살아왔어? 

사람일은 모르는거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냥 열심히...최선을 다해서 사는거야.

알았지?"

"나때문이잖아...내가 어떻게 하면돼? 응? 어떡해!"

갑작스레 터져 흐르는 눈물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얼른 자꾸 닦아내는데

자꾸 또 흘러내렸다.

"왜 너때문이야. 넌 아무잘못 없어. 그거 잊지말고, 나 믿고, 기다리면 돼. 알았지?"

"내곁을 지켜준 사람...내 평생에 너밖에 없었어. 나 버릇 나빠져서, 이제 너 없이는 하루도 못살거 같아!"

"너는 공주엄마야. 어서 공주한테 가봐. 그리고...같이 기다리고 있어. 어디 멀리 가는거 아니니까."

형사들은 더이상 기다려주지 않고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폭력, 주택침임 그리고 납치혐의 현상범, 이신우씨를 체포합니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때까지 

나는 가슴을 쥐고 눈물을 멈출수 없었다.

바보..

병신, 멍청이. 

아무것도 해줄수 없고, 

아무런 도움도 안돼는 곤충. 벌레, 바퀴벌레...

이렇게 나 자신을 저주하면서.

"드라마 다 찍었으면, 좀 일어나지?"

잊고있었다. 정우란 사람도 그 씬에 존재하던것.

"도와줄꺼죠? 이신우씨, 사촌형이니까, 정우씨가 도와줄꺼죠?"

"저 자식을 도와주라고? 그런 딜은 없었는데?" 그는 무슨 파리 한마리 잡혀간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딜이라뇨?"

"지금까지 저자식이 준비해온 법적싸움...재산 투쟁? 뭐 그런거지. 너같은게 알건없고.

어쨌든 그걸 다 포기하는 대신으로 내가 널 도와주기로 했어."

"...뭐..요? 포기?"

그럼 지난 4년동안 그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준비 해왔던것들을. 나때문에 포기했단건가? 지금?

"어쨌든. 난 너만 도우면 끝이야. 귀찮게 굴면 확... 그러니까 잔말없이 해치우자, 우리. 응?"

"날...어떻게 돕겠다는거죠?"

"저 또라이 정준혁이 조사에서 풀려나오기 전에 너랑 니 애를 미국으로 보내고, 아파트에 정착시키는거. 거기까지만. 나머지는 니가 알아서 해. 학교에 론이랑 그런건 다 신청해 놨다 그러더라."

"그럼 이신우씨는요?"

"그건 내가 알바 아니지."

"사촌형이잖아요! 가족이잖아요!"

"가족? 웃기고 있네. 자꾸 헛소리하고 떠들면 여기 두고 가버린다? 빨리 차에 타기나 해."

그래. 우선 말도 안통하는 이사람과 이럴게 아니라 이곳을 먼저 빠져나가야 했다.

나는 울고있는 공주에게 뛰어올라가서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삼촌 어떡해? 삼촌 다쳤어? 삼촌 죽었어?"

공주도 창문사이로 본것 같았다.

"아니야, 삼촌 괜찮아. 곧 다시 만날거야. 걱정하지마."

"근데 엄마는 왜 울어?"

"응? 놀라서...그리고 공주랑 같이 있어서...좋아서."

공주를 껴안고 내려오는데,

정우가 나와 공주를 번갈아 보며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다는듯.

그의 차는 아주 좁아터진 스포츠카였다.

겨우 뒷자리에 공주와 함께 앉았는데,

그는 짜증나는듯, 말없이 운전을 시작했다.

"이신우씨한테 가주세요. 제발!"

"이 아줌마가, 내가 택시운전산줄 아나!"

"가봐야 하지 않아요! 당신은 양심도 없어요? 어떻게 가족이 잡혀갔는데"

"너 가족이란 소리 한번만 더 하면 여기서 버리고 간다. 알았어?"

그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친다. 

정우에게 가족이란 의미는...

이신우가 가르쳐준 가족이란 의미와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른것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이신우씨 어떡하냐구요!"

그는 짜증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그 입 다물어. 아니며 딜이고 뭐고 없다. 알았어?"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공주는 잔뜩 겁을 먹고 내손을 꼭 쥐고 있었다.

"엄마, 말하지마. 저 아저씨..무서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공주는 조용히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정우의 아파트였다.

"어휴...피곤해.."

하며 그는 쟈켓을 집어 던지고는,

잠시 다시 귀찮다는듯 나를 돌아보았다.

"휴.... 내일 비행기표랑...여권, 뭐 그런거 만들러 가야하니까, 우선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저녁은... 아무거나 꺼내먹어."

하더니 던졌던 쟈켓을 그는 다시 집어 들었다.

"어디...가요?"

"그럼 내가 여기서 너랑 자리?"

그는 떨리는 나의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내가...니 보디가드까지 해야겠냐?"

그는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어 쉬더니, 쟈켓을 다시 집어 던졌다.

"샤워는 꼭 해라. 난 내 차안에 냄새나는 사람 태우는거 아주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하더니, "내가 거실에 있을테니까, 방으로 들어가."

했다.

공주는 내 팔을 잡아 당겼다. 아저씨 말대로 하라는듯. 

샤워를 하고 나오자, 

침대위에 금방 사온듯한 음식 봉투가 놓여있었다.

'나쁜녀석은 아니예요...' 하던 이신우의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고...

그럴까? 정말 그는 나쁜사람은 아닐까?

공주는 배가 고팠는지 정말 맛있게 저녁을 먹어 치웠다.

하긴...이렇게 늦은 밤까지 밥도 못먹고...

"공주야, 무서웠어? 괜찮아?"

"응? 아니. 괜찮았어. 차에 탈때는 무서웠구, 그 다음엔 그 아저씨...별로 무섭지 않았어."

"어떤 아저씨?"

"아까 삼촌이랑 잡혀간 사람. 나보구...자기가 우리 아빠라고 그랬어. 그리고 차안에서 내 손잡구 계속 울었어. 엄마 보고싶다구. 근데 엄마 곧 올거라구"

미친..이란 말이 튀어나오는걸 겨우 참았다.

"정말 그 사람이 우리 아빠야?"

"아니야. 아빠 아니야."

어린 공주에게...이렇게 거짓말을 해도 될까? 그치만 아빠라니... 미친놈, 지가 무슨 자격으로!

공주는 곧 잠이 들었고,

나는 너무 답답해서 살짝 문을 열고 나갔다.

피곤하다던 정우는 벌써 자고 있겠지...싶었는데,

식탁에서 물을 마시던 그는 화들짝 놀라더니,

"왜 튀어나오고 그래? 자지 않고!"

"잠깐..목이 말라서요."

"잠이 안오겠지. 그렇게 난리를 치고."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식탁앞에 의자를 빼주었다.

"앉아라. 빨리 물 한잔만 마시고, 가서 자."

설득해볼까? 조용히, 잘 타이르면, 이사람이 이신우를 도와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나는 고분고분 그의 앞에 앉았다.

그는 물을 따라주었고,

뭔가 생각에 깊이 빠진 모습이었다.

"고마와요."

"뭐가?"

"저녁.."

"그거야, 애는 굶길수 없으니까"

"그리고 오늘.. 도와주신것도."

"계산하고 한거야. 고맙단말로 사람 이상하게 만들지 마."

"이신우씨..."

꽈당! 하고 그가 식탁을 쳤다.

"얘기 하지 말랬지!"

그도 분명 속상한것이다. 

뭔가 이상해서 고뇌중인것 같았다.

"그 얘기가 아니예요. 내 얘기 하려구 그래요."

"니 얘기던 그 놈 얘기던 다 싫거든?"

"저...이신우씨가 잃어버렸던. 여동생이예요. 알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정우씨하고 난, 먼...아니 가까울수도 있는 친척?"

그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러니까...저도...정우씨의 먼...친척이라는 거죠?"

그는 기가막히다는듯 크게 숨을 내쉬었고, 눈을 크게 뜬채 놀라움을 감치 못했다.

왜 저렇게 놀라는걸까...

곧 그는 아닌척 표정을 가다듬었고.

"그럼 니가...신애란 말이야?"

신애...그게 나의 본명이었나? 왜 이신우는 나에게 얘기해주지 않았을까?

"네."

그는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증거가 없잖아? 니가 신애란거."

증거. 확실히 있어요. 할아버지의 백혈병. 골수기증, 친자확인...

하지만 왠지 이 이야기를 내뱉어선 안될것 같은 느낌이 왔다.

"어쨌든. 내가 정우씨의 먼 친척이니까, 제발 제 부탁을 좀 들어주세요."

"증거 가져와."

"이신우씨, 저에겐 오빠라구요!"

"오빠는 무슨. 피 한방울 안 섞였는데."

내가 늘 하던 소리다. 

"그래도 가족이잖아요!"

"가족 같은 소리 하지 말랬지?"

"왜 그래요? 가족이라는거, 나에게는 너무나 안타깝고, 가지고 싶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름이예요. 왜 가족이란 말이 싫은건데요?"

정우가 눈빛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얘기...조금 들었어요. 이신우씨 가족분들이...많이 힘들게 했었다고."

"힘들게? 웃기고 있네. 벌레나 쥐새끼? 그 정도였지. 딱 그정도. 벌레가 밟는다고 힘들어 하냐? 그냥 죽는거야. 

근데, 핵전쟁이나도 살아남는다는 바퀴벌레마냥, 목숨은 끊어지지 않고, 근데 죽은건지 산건지 헷갈리는...그렇게 살아온게 나하고 우리 어머니다.  그 얘기도 하든?"

"미안하다고 했어요. 늘 미안했다고."

정우가 소리내어 웃었다. 우리 공주 깨면 어쩌려고! 

"정말 코메디네. 그 새끼가 미안하다고? 그래. 미안했겠지. 

근데 세상사람 모두에게 왕처럼 떠받김만 받던 그 놈이, 미안한게 어떤건지나 아냐? 

너도 꽤 같이 살아봤으니까 알거아니야. 티고 없고, 흠도 없는 이신우. 어디가나 칭찬받았지. 착한짓만 골라서 했지. 그 자식이 아픔이 뭔지, 다른사람이 힘들어하는게 왜인지...알기나 하냐고?"

"많이 힘들었어요, 이신우씨. 당신 어머니때문에."

그가 또 큭큭대며 웃었다.

"스테이크먹고 배부른놈이 디저트 맛없다고 우는꼴이네. 매일 매일 천대와 무시속에서 덜덜 떨면서 밥을 먹고 살아온 나한테. 겨우 지난 3, 4년, 예쁜 기지배끼고 잘 살았으면서, 힘들었다고?"

예쁜 기지배? 그 소리에 분이 확 올라왔다.

"그래도 넌 잘 먹고 잘 살았잖아! 고아로 자라온 내 앞에서, 그래도 엄마도 있고, 가족도 있던 니가, 뭐 그렇게 불평할게 많아? 그것도 엉뚱한 이신우씨한테."

"이게 왜 반말찍찍이야? 갑자기..?"

그때, 정우의 전화기가 울렸다.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그의 표정이 굳었고,

"여보세요. 뭐? 벌써? 에이...씨..."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왜요?"

"또라이 새끼, 벌써 나왔데. 여기 주소도 벌써 파악했고. 애 데리고 차에 태워. 빨리 가야겠다."

정준혁...

끔찍한 이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어서 두눈을 감았다.

나와야할 이신우는 안나오고

왜 그 괴물은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