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하는 그를 보며 내가 할수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정우, 나를 보고 곤란한듯 한숨을 쉬더니,

"아이나 데리고 나와."

"어디로 가려구요"

"나도 몰라. 어쨌든 피해야지."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팔을 잡았다.

이게 뭐냐는듯, 그는 나를 돌아보았고,

"이신우씨와 한 그 딜이라는거. 그거 말이예요."

그가 의아한듯 눈을 가늘게 뜨고,

"없던걸로 해줘요."

"뭐?"

"내가, 정준혁한테 갈테니까... 모두 없던 일로 해달라구요."

"신우가 우리엄마랑 재산투쟁을 하게 내버려 두라고?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나 때문에, 더 이상 그 누구한테도 피해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이예요. 신우씨...그리고 이제 정우씨까지...

그러니까, 제가 지금 그냥 나가서 준혁이에게 잡혀도, 정우씨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거예요. 아시겠어요?"

"니 애는 어쩌려고?"

"죽던 살던, 우린 같이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없던걸로 해주시고, 이신우씨좀... 도와주세요."

"너 정말 사람 헷갈리게 하는데 소질있는데, 빨리 따라 나오기나 해."

그는 나를 돌아보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잠시 멍해져서 앞이 깜깜했지만,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자고있는 공주를 아픈마음으로 안았다.

미안해...잠도 편하게 못자게 하는 이 엄마가...정말 미안해.

깊고 어두운 새벽.

바깥은 쌀쌀했다.

정우가 차안에서 시동을 켠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건물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더 이상은, 

그 아무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신우씨에게도,

정우씨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준혁에게 잡히건 말건

우선 내 힘을 다해 그렇게 해야 할것 같았다. 

그러나 다섯살 아이를 안고 뛴다는것은...

"엄마... 엄마?"

"공..주야, 미안...미안해."

"어디가? 엄마?"

"업을까? 업는게 더 편하겠지?"

"응..."

헐떡거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공주를 등에 업었다.

잠시 다시 뛰어보다가, 지쳐서 걷다가, 골목이 있는쪽으로,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뛰고, 또 뛰고...

서서히 파란 새벽빛이 하늘에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다리가 부들거리며 떨려서 더이상 걸을수도 없어서 조그마한 과일가게 앞에 공주를 안고 잠시 앉았다.

숨을 돌리고 보니, 지갑도 없고

돈도 없다.

이제 공주가 깨면 배가 고프다고 할텐데...

이신우는 어디있을까.

어제 저녁도 제대로 못먹었는데...경찰서에서 상처는 치료해줬을까? 그래도 세끼 식사는 제공해 주겠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서러운것이나 두려운것은 둘째치고

이신우...

그가 보고싶었다.

지난 몇년간, 늘 내 곁에서 웃어주며 지켜줬던

그사람이 너무나 미치게 그리웠다.

미치도록 걱정이 됐다.

이제 못본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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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도 모르게 아주 잠시 잠이 들은 모양이다.

공주의 체온을 먼저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내 앞에서 정우는 길게 한숨을 내어 뿜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그의 눈길을 피했다.

나를...따라잡은건가?

"가려면 좀 멀리 가지...정말 못 찾게 말이야."

하며 그는 이런저런 빵이 들어있는 비닐백을 내밀었다.

"그냥 못 본척 지나가시면 되잖아요."

"너의 그 헷갈림 작전 말이야. 딜을 없던걸로 해달라, 책임을 그만 지라는 둥. 

내가 곰곰히 생각을 좀 해 봤는데,"

하면서 그는 곰보빵을 한입 뜯어 먹었다.

그러더니 빵하나를 봉지에서 꺼내 내밀었다.

그럴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배가 고파서 나도 모르게 받아 들었다.

그는 먹으라는듯, 끄덕이며 손짓을 했고.

빵을 까서 나도 한입 물어버렸다.

"너를 그냥 보내면 아무래도 내가 손해를 볼것같더라구. 뭐 예를 들면...이신우의 복수? 아니면 우리 엄마의 엄청난 호통?"

"어머니가...왜요?"

"막을수있는 일을 내버려 뒀다는거지. 이신우가 정말 무슨짓을 벌인다든지...뭐 그럴일은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그리고 니가 진짜 신애라면..."

"어머니가, 나를 왜요?"

"그건 알거 없고. 차에 타기나 해."

"싫다면요."

"이 새벽에 내가 힘좀 써야겠냐?"

"그냥 가세요. 얘기 듣고보니, 더더욱 신세지면 안돼겠네요."

"이게-"

하며 그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정우는 

순식간에 공주를 내 팔안에서 떼어내며 공주의 작은 어깨를 둘러 안았다.

그때,

정우의 입술이 거의 내 입술앞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너무 놀라서 공주를 안고있던 손을 놓쳐버렸다.

"무슨짓이예요!"

그는 피식 웃었고,

"너 순발력 제로다. 잘못하면 키스할뻔 했잖아?"

허...그의 귀싸대기라도 한번 때려줘야 하는거 아닌가? 망설이는 사이, 

그는 이미 공주를 차에 태웠다.

나를 두고 떠나려는 그의 차를, 겨우 따라잡았는데

그는 재밌다는듯 웃으며 내쪽의 문을 활짝 열었다.

"장난해요? 지금?"  기가막혀서...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원래 좀 재밌는 사람이거든?"

허 참... 

정말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찌됐건, 

우리는 어디로인지 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고...

"웃기지 않냐?"

말없이 운전하는 그를 돌아보았다.

"사실 재벌 할아버지의 진짜 손녀는 너 하나인데...

너는 지금까지 고아로 고생만 하면서 자랐고,

예쁜 엄마둔 덕에 이신우하고 나는 랄랄라 하며 잘난척하며 살아왔으니 말이야."

"그래서요?"

"나도. 너랑 진짜 친척은 아니거든. 난 그저 어릴때 엄마랑 니네 집에 들어온...운좋은 거지였고. 
근데 이렇게 고아로 자라온 재벌딸...너를 이렇게 만나고 보니... 니가 신애란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세상 참 후지고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어서."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예요? 이제는 이신우씨도 가진게 아무것도 없어서...경찰에 잡혀갔는데... 그리고 랄랄라 하는 잘난 친척은, 걱정은 커녕 도와줄 생각도 없고. 재벌딸이던 아니던, 나는 아무것도 해줄수 없는데."

"넌 왜 꼭 내가 하려는 얘기를 이신우쪽으로 돌려서 분위기를 흐리냐?"

"분위기는 무슨."

"신우 그자식이...왜 그렇게 너를 싸고 돌았는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 알것 같기도 하고."

"왜요?"

"니가 필요했겠지?"

"무슨...소리예요?"

"너말이야. 너무 신우한테 헬렐레 하지 말란 소리야. 이신우, 그 자식 무지하게 똑똑한 놈이다? 늘 계산을 한다음에 행동으로 옮기는 놈이라구. 우리같은 사람이랑 틀려."

그의 '우리' 라는 단어가 무척 거슬렸다.

"무슨, 말을 하는거냐구요." 

"니가 신애란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증거가 확실하다면, 네가 필요했을거라구. "

"말도 안돼는 소리하지 말아요."

"너야말로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도데체 무슨말을 하려는건지...간절한 마음으로 그의 눈빛을 살펴보았다.

"너는 상상도 못했겠지만...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까지 널 찾는걸 포기 하지 않으셨다는거. 알아?"

가슴팍 깊은곳이 쓰리고 아파왔다. 아버지...그 단어 하나만으로 눈물이 터져나올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분의 유서에...너의 이름이 있다는거..."

믿어지지 않았다.

뭐 그게 어때서...라는 생각이 멍...하니 먼저 들었다가.

나를 잊지 않고 찾았다는 아버지가 너무 고마왔고

그 한가지 사실에 그분의 사랑이 느껴져서 황홀하기도 했고

이미 너무 늦어버려서 슬펐고,

사진이라도 한번 본적이 없어서 그리웠고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정도로 답답했지만...

순간

알수없는 배신감으로 숨이 막히는것 같았다.

그럼 이신우가...

나를 그렇게 아껴주고 도와준것이...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였다는건가?

그럴리가...

그는 내가 가족이라서...

동생이라서.

아니, 설사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였다 해도,

당연한거지. 내가 도움이 될수있다면, 나는 이신우를 위해 뭐든지 할수있는데, 

그까짓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하며 

내 자신을 다독이는데...

그래도 뭔가 찜찜한것은... 왜 나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을까. 

그가 직접 말해 줬으면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텐데.

"내가 예상한데로...너는 전혀 몰랐던것 같네?"

"그게 어때서요."

풋. 하며 그가 웃었다.

"그럴줄 알았네. 그럴줄 알았어."

"원하는게 뭐예요? 왜 이런 말...나한테 하는거예요?"

"너 그때...병원에서 기억나냐? 신우가 나한테 무릎꿇었던거."

"당연히 기억나죠." 

그래...그때 그 나쁜놈.

"신우는 필요하다면...뭐든지 하는 놈이거든."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때는 병원비도 없고, 도움을 청할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 바보..."

그만 듣고 싶었다. 나쁜 얘기라면,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그땐 병원비때문에 그러는줄 알았지. 

근데...그때 내가 멍청하게 속아서 건네준 그 천만원으로 

이신우는 재산을 되돌려받을 모든 법적 수속을 시작할수 있었어. 

그러니까 그렇게 내앞에 무릎까지 꿇을수 있었던거고.

나중에 잡아먹으려고...져 준거지."

"그만! 그만해요. 이신우씨...잡혀가있는 이 상태에서, 그런 얘기 믿고 싶지 않아요. 이신우씨에게 직접 들을거예요. 당신 통해서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교활한 사람이라면, 왜 당신에게 끝까지 나를 부탁했겠어요? 법적으로 재산, 모든걸 포기한다고 까지 하면서"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것도 바로 그거야. 그리고 대강 알겠는건..."

그가 신호등에 차를 세우고,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니가... 왠지 예뻐 보인다는 거지. 이런 상황에."

"미쳤어요?"

"신우 그자식도, 눈이 삔거야. 너한테 홀려서."

귀싸대기는 이럴때 날리라고 있는건데, 

그는 스스로 알아챘는지, 왼쪽손으로 자기의 뺨을 가리더니 오른손으로 핸들을 잡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공주의 안전을 위해서, 폭력은 삼가해라."

할말을 잃고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쁜놈은 아니라더니, 이거 완전 날라리, 바람둥이, 선수 아니야?

한참을 말없이 운전하던 그는. 

꽤 한적한 별장에 도착하자, 차를 세웠다.

공주는 잘 자고 일어나 예쁜 별장을 보고 좋아했고,

그런 공주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는데.

"여기가...어디예요?"

"우선...피해있을수 있는곳이야. 들어가서 좀 쉬어. 밤 새웠잖아."

"그건...정우씨도."

"그러니까, 난 자야겠다, 좀."

어쨌든 그렇게 별장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소소한 일상의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장을 보러 나가고

공주를 데리고 산책을 하기도 하고

동네 시장에 구경을 나가기도 하고...

정우는 그의 말대로 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공주는 늘 웃겨주고 놀아주는 정우와 금새 친해졌고

둘이 같이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 사다먹기를 좋아했다.

어린애들 같이.

나는 하루종일 내내...

이신우 생각을 했다.

배신감을 느끼기 보다는, 

그냥 본능적으로 그를 걱정하기만 했다.

만약에

혹시나

그가 나를 이용하려고 그렇게 돌봐줬다해도

나는...괜찮다고 생각할만큼.

그만큼 이신우는 나에게 은인이였고...

가족이었다.

이신우는 뭘하고 어떻게 어디서 지내고있는지 가슴을 치며 그리워했고,

또 어서 다시 만나서 그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싶었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또 준혁이 들어닥칠까봐...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언제까지...이러고 있을건가요?"

"아줌마. 성질급한거, 고치라고 했지?"

"성질급한건. 그쪽아니예요?"

"나야 아직 혈기왕성한 젊은이고, 그쪽은 아줌마잖아. 좀 느긋...하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그는 장난스럽게 웃는다.

"수속 마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마. 다음주 쯤이면, 원하던 학교로 갈수있을거야."

"그걸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원하는게 학교로 가는거라고?"

"이신우는. 나도 모른다니까."

"모르고 싶은거겠죠. 알아보면 충분히 알수있는걸."

"얘기했지, 아줌마. 그렇게 하면 그 또라이한테 직통으로 걸린다고. 그게 덫이라니까? 몇번을 말해야 되는거야?"

한숨을 몰아쉬었다.

영영 볼수 없는건가... 그냥 이렇게 떠나야만 하는건가...?

"나중에. 안전하게 자리잡으면 그때 내가 알아본다고 했지?"

그말을 믿을수가 없다.

다른건 몰라도

이신우를 걱정해줄 사람은 절대 아닌것 같은데.

일부러 더이상 그에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해만 불어날것 같았다.

정우는 그날 저녁 삼겹살을 사와서 그릴에 신나게 구웠다.

그는 요리를 꽤 잘했는데,

이것 저것 반찬이며 별미도 잘 골라와서,

장난스런 성격마냥, 음식을 먹을때도 공주의 입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게 유쾌했다.

지켜보는 나도...

그냥 웃을수밖에.

그런데 그날 저녁.

별장에 고급 승용차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준혁이일까?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는데,

차에서 내린 사람은.

아주 오래전에 LA 식당에서 만났던.

정우의 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