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씨하고 먼저 얘기하게 해줘요."
“죄송합니다."
"지금...내가 싸인하지 않으면 이신우씨는 어떻게 되는거지요?"
“이신우씨는 검찰쪽으로 넘겨지고, 그러면 적어도 5년에서 10년정도...형이 무거워질 겁니다. 피해자가 합의해줄 생각이 없으시니까요. 이것이 마지막 협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인을 하면...그냥 풀어준다. 그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죄가 있으면 형을 사는게 당연하고, 아니면 풀려나는게 당연한건데, 그렇지 않아요? 이신우씨는 죄가 없다는거, 밝혀내면 밝혀지지 않겠어요? 정말 저 창살 뒤에 있어야 할사람이 누구인지도 말이예요."
석은 로보트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근데 그런것이 상관없다니, 그러니까...이 재산이라는게. 꽤 대단한건가 봐요?"
"지금 싸인하지 않으시면, 더이상 시간을 끌수 없습니다. 일이 아주 복잡하게 됩니다. 정식으로 검찰청에 넘어가고 조사를 받게되면 피해자 협의는 물론 안해주실것이고, 많은 돈을 들여도 풀려나기 쉽지 않을겁니다."
"그러니까...내가 또 멍청하게 속아 들어갈것이 당연하니까...이렇게 협박하는거네요?"
석은 다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마치 대사에 없는 말은 하지 말아야 되는 배우처럼.
시키지 않은짓은 하지 말아야하는 로보트처럼.
나는 조용히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쫘아악...소리를 내며 서류를 찢어내려갔다.
찢겨 떨어지는 종이를 보며
내 가슴도 찢어지듯이 아팠고
석이의 얼굴도 놀라움과 당황함으로 무너져내렸다.
물론 나는 이신우와 함께 갈수없다면 재산이고 뭐고 필요없었다.
아마 이신우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나는 그저 순순히 그들이 시키는대로 싸인을 하고,
내가 당장 필요한 그들이 주는 제안을 얼른 받아 들였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왠지 달라졌다.
싸우고 보자는 오기도 생겼고,
싸워서 이겨야할 이유도 있었다.
분명 이신우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할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에게 늘 그렇게 말해주었다.
위기의 상황이 오면,
적이 살려준다는 약속이나 구해준다는 검은 손을
절대로 믿어서도, 잡아서도 안되며
빠져나갈 구멍을 주는듯 하면서 그는 졸아들어 올것이라는것을 기억하고
침착하게 기회를 살피며 그들이 미리 계획하지 않았을 길을 택하는것이 중요하다고.
그들의 조종에 순순히 놀아나면
여기서 모든것이 끝이라는것.
그정도는 나도 알수있었다.
상상밖의 시나리오에 석은 잠시 중심을 잃고 할말을 잃었다.
"뭐해요? 어서 보고하시죠."
석이 멍하니 전화를 돌리는 동안,
나는 서둘러 이신우가 갖힌 창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키가 무척 큰 경찰관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들어오실수 없습니다."
"왜죠?"
"아무나 들어오실수 없습니다."
"알았어요. 멀리서라도 괜찮으니까, 잠깐 보게..좀 비켜주세요."
그는 망설이더니 옆으로 슬쩍 물러 섰다.
철문이 굳게 닫혀있고,
그 뒤로 복도 너머에...이신우가 갖친 철창이 보였다.
소리를 질러도 안들릴정도의 거리...
불빛이 뿌얘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오빠!"
"소리지르시면 안됩니다."
이신우가 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애써 웃으며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보였다.
농장에서 서툴게 일을 배우며 넘어지거나 다치면, 내가 잔소리하며 뛰어가는동안,
그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서 늘 그렇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면 그는 말했다.
"난 괜찮아. 어서 가서 공부나 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아니,
나는 안 괜찮은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순간 가슴이 찢어지도록,
처절하게 후회를 했다.
그냥...싸인을 했어야 했는데...
어찌되던 우선 이신우를 지금 나오게 해서...
재산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우리 둘이 다시 시골에서 살면 되는데...
오빠... 내가 잘못한거 같아…그렇지?
저 사람들한테 지더라도...오빠만 나올수 있다면, 그냥 그렇게 할걸 그랬나봐..
"다시 한번 기회를 드리라는 말씀이십니다."
"이신우씨와 만나게 해줘요. 그럼 다시한번 생각해보죠."
그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경찰관아저씨에게 손짓을 했다.
나는 이신우에게 뛰어갔고,
석이 바짝 뒤따라 붙었다.
"오빠!"
이신우는 좀 놀란듯,
"지수야, 어떻게 된거야." 하며 바짝 따라 들어오는 석이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없어. 준혁이가, 당신 숙모하고 한편이 됐어.
나에게 재산포기각서에 싸인하면, 오빠를 꺼내주겠다고"
"절대로 싸인하지마, 알았지?"
"그치만!"
"내 걱정은 하지마. 거기 싸인하면, 너는 정준혁에게서 풀려날수가 없어. 절대로, 절대로 하면 안돼!"
"가시죠."
석이가 다가와서 내 팔목을 붙잡았다.
나는 그를 뿌리쳤고,
그는 다시 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그러나 무겁게 힘을 주어 붙잡았다.
"이거 놔요!"
"가시죠. 여기서 소란피워봤자 좋을거 없습니다."
"아직 얘기 안 끝났잖아요!"
"죄송합니다."
점점 멀어져 가는데, 이신우가 소리쳤다.
"지수야, 절대로 싸인하면 안돼. 알았지? 약속해!"
"오빠는! 그럼 오빠는!"
"난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철창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고,
이제는 그를 볼수가 없었다.
나를 붙잡고 있는 석을 돌아보았다.
"감정도 없어요? 사람 아니예요? 당신은 그냥 시키는대로 하는 로보트인가요?"
"죄송합니다."
나는 그에게 끌려나오다가, 뿌리치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다시 그의 차에 쌀자루처럼 던져졌다.
"잘못 선택하신겁니다. 지수씨. 거기서 싸인 안하셔도 어차피 하시게 될거란거…모르십니까? 오히려 이신우씨를 풀어줄 기회만 놓치신겁니다."
“정준혁이…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어요? 당신도... 똑같은 짐승이야!"
"죄송합니다."
그때 갑자기 차가 끼이익 하고 급정거를 했다.
"아악!" 머리를 창문에 부딫히며 이마가 깨졌는지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디에 부딫힌건지, 석은 서둘러 차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아픈 이마를 잡고 신음하다가 흐르는 피를 막으려고 티슈룰 집어들었는데,
“괜찮아?”
헐떡거리며 내 차문을 여는 정우.
그가 애지중지 아끼는 차가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돌아보니 석은 누군가에게 강제로 끌려가며 치고박고 싸우기 시작했고,
“빨리, 어서 움직여야 해!”
하며 정우가 내 팔을 잡아 당겼다.
그의 찌그러진 차안에 앉자마자,
“엄마!” 하는 공주의 울음소리!
“공주야!”
우리는 껴안고 서로를 확인했다.
정우가 와서는 차를 끼이익..하며 서둘러 몰았고.
그의 얼굴도 엉망이었다.
“다쳤어요?”
“자, 이걸로 우선 이마에 피 닦아.” 하며 수건을 내 주었다.
“정우씨는 왜 다쳤어요?”
“보면몰라? 간만에 몸좀 썼다.”
“어머님이…정우씨까지 속이신건가요? 아니면..”
“아니면 뭐, 내 이마에 이거 피아니고 분장 한거냐고? 하는 소리하고는”
“어떻게…아들을 그렇게 속이실수가 있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뭐든 하는 분이니까. 안그렇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냐..”
“근데 왜 나를 도와줘요?”
“너무 치사하잖아. 아들 쪽팔리게."
“정우씨는…괜찮은거예요?”
“난 니가 걱정해 줄수 있는 레벨이 아니야."
정우는 잠시 공주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봐, 아저씨, 좋은사람. 맞지?”
공주는 내 품안에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이신우씨는요”
“아직도 너 상황파악이 안돼? 내가 지금 깡패짓하고 끼어들지 않았으면 넌 정준혁한테 잡혀가고, 그럼 그게 끝이야. 모르겠어?”
“고마와요…하지만”
“우선 공주랑 니 걱정이나 먼저 해! 암튼 신우는 오히려 저기 갖혀있는게 안전할수 있으니까.”
“어머니께서 나에게 원하는게…재산 포기 각서인거죠? 그럼, 저에게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건가요?”
“야, 난 너를 치사한 상황에서 구해준거지, 그렇다고 우리 엄마를 함께 무너뜨려 주겠다는건 아냐.”
“옳지못한거. 그냥 참고 볼수 있어요?”
“얘기 했지, 내 인생 자체가 옳지 못했다고. 다른 사람 인생 꼬이는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상관하고 있잖아요.”
정우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이신우가 맞았다.
정우는 겉으로는 터프하고 못되게 굴었지만, 마음은 착한 사람이 분명했다.
공주에게 쩔쩔매는것만 봐도 알수 있었다.
“정우씨 어머님에게로 가주세요.”
“너 제정신이야? 지금 아주 멀리 멀리 도망가도 잡힐까 말까 한데”
“가주세요. 어차피 잡힐거면, 만나는게 나아요.”
“어쩌려구?”
“이렇게 도망만 다닐수는 없어요. 가주세요.”
“신우없이, 너 혼자 어쩌려고?”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이신우씨가 더 많이 다칠것 같아요.”
“야, 넌 우리 엄마한테 상대할수있는 레벨이 아니야.”
“정우씨가 있잖아요.”
“얘가 뭘 몰라도…한없이 모르네...”
“마지막으로 부탁할께요.”
정우는 별수없다는듯 말없이 운전하기 시작했다.
집앞에 도착하자, 정우는 긴 한숨을 뿜어 내었고.
나는 공주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나를 정우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따라 들어왔고,
"내가 미쳤어. 차까지 부쉬고 고양이 밥그릇에 쥐새끼를 다시 데려오다니..."
전화기로 통화를 하던 정우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놀란눈으로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정우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순간 분노로 가득찼고.
“이정우!”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의 어머니 앞에 섰고,
순식간에 휘둘리는 그녀에게 몇대를 맞았는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내 정신이 다 얼얼했다.
“너 미친거야?”
“엄마, 아무리 돈이 좋아도 이건 너무 치사하잖아? 어떻게 그런 미친놈이랑 손을 잡고…따지고 보면 이사람, 우리 친척 아니야?”
“어디서 감히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어? 하라는 공부나 할것이지!”
“신우때도 그랬지만, 엄마 이러는거 정말 쪽팔려. 알아? 돈에 미친사람같다구!”
"이비서!"
말로는 안돼겠다 싶었는지, 그녀는 분노를 누르지 못했고,
곧 비서가 몇명 보디가드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그녀가 손짓하는데로 움직였다.
"정우 데리고 방에 가둬요. 지금은 얘를 혼낼 시간이 없어!"
정우는 포기한듯, 힘없는 표정으로 나를 뒤돌아 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할수 있는 말이라고는...
"내가 말했지, 니 레벨이 아니라고..."
정우의 어머니.
그녀는 나를 경멸스런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공주도 정우와 함께 올려 보내고
이제 나와 그녀.
둘만 거실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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