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세요, 정신차리세요. 일어설수 있겠어요?"
낯선 목소리가 들렸고,
희미하게 경찰관의 모습이 보였다.
벽을 붙잡고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보니,
미친듯 날뛰는 정우가 보였고,
곁에서 경찰들이 그를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저 미친 또라이! 당신들도 봤잖아!!"
그는 힘겹게 숨을 들여마시며 헐떡이다가,
문득 나를 돌아보고는,
더 화가 나는듯,
다시 끌려나가는 정준혁 뒤통수를 세게 쳤다.
"이러시면 안된다니까요! 같이 끌려가시겠습니까?"
하는 경찰의 말에, 정우는 그제야 숨을 돌리고...
나에게 천천히...
죄 지은 강아지처럼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어떻게...빠져나왔어요? 공주는요?"
"공주는 걱정마. 윗층에서 낮잠 자고있어. 어린애가, 많이 놀라고 지쳤겠지."
"정우씨는요?"
"아까부터 말했지, 나는 니가 걱정할 레-벨이 아니라고."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찢어진 입술과, 상처난 눈썹, 멍들은 이마...
마음이 쓰렸다.
그는 가까이서 내 얼굴을 보고는 놀라고, 기가막히고, 정말 열받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또라이새끼...욕이 아깝다...내 입이 아퍼."
하며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으로 내 퉁퉁부은 볼을 감싸주었다.
나는 이런 내모습을 보이는게 너무 창피해서, 싫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는 다시 나의 얼굴을 살펴보듯, 붙잡았고
"난...괜찮아요." 하며 그의 손을 잡았는데,
정우는 나를 일으키려 내 어깨를 붙잡아 올리다가,
갑자기 확 나를 끌어 안았다.
"정우씨..." 놀란 나는 신음 비슷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미안해...이렇게 내 맘대로 안아서 미안하고...
다치도록 내버려둬서 미안하고...
또 우리엄마 대신...정말...미안해."
눈물이 나오려했지만 참았다.
한두번 당한게 아닌데...나는 이 아픔에 무척이나 익숙하다는걸...
오히려 이렇게 다친 나를 붙잡아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너무나 생소한데..
"정우씨...어머니는요..?"
정우가 천천히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우리 엄마가... 혈압이 엄청 높으시거든.
나한테 무시무시하게 화내시다가...갑자기 쓰러지셨어. 가끔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하늘이 도우셨지. 안그러냐?"
하며 허탈한 웃음을 내뱉는 그의 눈에 옅게 눈물이 맻혀 있었다.
"정우씨..."
"바보지, 우리 엄마.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인걸, 뭘 그렇게 악착같이...창피한줄도 모르고..."
"어머니한테...가보셔야죠 그럼."
"지금은. 너하고 있는게 맞아. 독하신 우리 엄마 곧 깨어나실거야. 그전에 처리해야할 일들이 있어."
그때, 뚜벅뚜벅 구두소리와 정장을 입은 신사가 한분 나타나더니,
"찾으셨습니까,"
하고 정우에게 다가섰다.
"이변호사님. 벌써 오셨네요."
정우가 눈물을 닦고, 나를 다시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여기, 이분이 이신애씨인데요, 유서하고 서류...다 가져오셨죠?"
"아, 네...말씀하신데로 준비해 왔습니다."
"싸인할 힘은...있어? 힘든거 알지만, 지금 안하면 안돼."
"정우씨...이렇게까지 하면 정우씨는..."
"아마도...난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게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쓸모있는 인간이 되본적이 없는거 같아."
하며 피식 웃었다.
이변호사님이 상처난 나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정중하게 서류와 펜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신애씨, 여기. 싸인하시면
이신애씨 아버님과, 할아버님의 유서, 그 모든 유서가 효력을 얻게 됩니다.
나머지 일은 이정우씨가 지시하신대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정우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하라는듯, 힘없는 나의 손에 펜을 쥐어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싸인을 하는데,
오열이 터져나왔다.
왜인지는...
설명할수는 없었다.
왜 내가 이렇게 울고있는지...
왜 이렇게 한없이 마음이 아픈건지
기쁜일인지, 슬픈일인지
파도같이 서러움이 밀려왔고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눈물샘이 다 터져버리는듯
펜을 내려놓고,
가슴이 터지도록
엉엉 소리가 나올정도로
서러운 눈물이 흐르고, 또 흘러내렸다.
한참을 정신없이 목놓아 울고있는데,
또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눈도 뜨지 못하고
가슴을 쥐고 오열하는 나에게 그는 주저없이 다가오더니,
품안에 깊이 끌어 안았는데.
그에게서 고향의 냄새가 났다.
물론 나는 고향이 어디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에 조차 없다.
그런데
아주 가끔...
어떠한 향기를 맡으면 아...집이란건 이런 냄새가 나겠구나 하는 희미한 상상이 있을뿐이었다.
"오빠...오...빠..."
보지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이신우라는것을 나는 알았다.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흐느꼈다.
"고생했어 지수야...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 다 됐구나...하던 그순간..
그런데
그때
꿈같이
거품같이
필름이 끊어진것처럼
모든것이 하얀 하늘속으로 빨려들어가는것만 같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뚜...뚜...뚜....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나는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쓰고, 또 애쓰다가
또 자고, 꿈을 꾸고, 깨어나고, 일어나 공주와 놀다가 식당부엌에서 산같이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고
식당 마루를 닦다가 준혁을 피해 뛰고, 또 뛰고
지쳐서 쓰러져 있다가 그에게 잡혀서 얻어맞고, 또 얻어맞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신우와 함박웃음을 웃으며 계란후라이를 서로 뺏어먹는다.
공주와 정우가 손을 잡고 빙빙돌고
나는 그들과 함께 깔깔 웃다가,
나의 따귀를 때리는 정우의 어머니에게 놀라서 잠에서 깬다.
뚜..뚜..뚜...
독한 약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디...?
여기는 어디?
공주야! 이신우! 정우씨!
소리를 지르려해도 소리를 낼수가 없다.
"깨어났어! 깨어났어요! 지수야! 선생님!"
이신우가 소리친다.
"깨어난거야? 정말이야?"
정우의 목소리도 들린다.
눈에 환한 빛이 갑자기 들어왔다가 감겼다가,
"정신이 드십니까? 윤지수씨?"
대답을 하고싶은데
다시 모든 필름이 끊기고 나는 긴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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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야...공주..."
주위가 모두 어두웠고 약냄새가 코를 찔렀고, 뚜뚜...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 침대 옆에 이신우가 엎드려서 잠들어 있었다.
그가 내 옆에 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꿈인가...?
머리가 깨질것 같이 아팠다.
눈꺼풀은 자석에서 떼어내는것같이 무겁고 힘들었다.
"공주야..." 목소리인지 모기가 윙윙거리는 소리인지...구별이 안갈정도로 쉰소리가 세어 나왔다.
이신우가 화들짝 놀라더니 눈을 떴다.
"지수야! 지수야, 정신이 들어?"
"여기 어디야...병원? 나 왜 이러고 있어?"
"나...알아보겠어?"
"그럼..."
"잠깐만! 잠시만.."
이신우는 안절부절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떼를 지어 병실안으로 몰려들었다.
이신우와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나는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온갖 이상한 질문들에 대답을 하느라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그를 볼수가 없었다.
"기적입니다. 정말 기적이군요..."
하며 모두들 혀를 둘러댔고,
그리 잠시 깨어있었는데도 나는 다시 무너질듯 피곤해서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그 후 얼마나 오랜시간인지 알수가 없었지만 깨어나고, 잠이 들고,
의사의 질문에 대답하고, 이신우와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이런 반복이 계속되었다.
어떤때는 난 깨어있고 다른사람들 말은 들리는데,
그 사람들은 내가 못듣는것처럼 내 주변을 맴도는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그날은 왠지 눈을 뜨고 깨어났는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침대옆에 이신우가 또 엎드려 있었다.
힘을다해 손을 들어올리는데, 손이 움직여줬다.
그의 머리를 만졌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냐고 잔소리를 해주고 싶었다.
"오빠..." 오빠 소리가 잘 나왔다. 이렇게 시원하게 목소리가 터진것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이신우가 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지수야! 지수야, 잠깐만..."
그가 또 의사를 부르려고 일어서는것 같았다.
"부르지마. 아무도."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둘이 얘기하고 싶어. 의사들 오면, 또 피곤하잖아."
"그래...그..래, 지수야." 하며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의 얼굴이 상처없이 깨끗했다. 거짓말처럼.
"오빠는... 다친거 다 나았네? 다행이다..."
그는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다가,
"그래...그게 언제적 일인데."
"그러고보니, 오빠 머리스타일도 많이 바뀌었네?"
"지수야...고마와...이렇게 깨어나 줘서."
"내가...그렇게 오래 잤어? 나 많이 다친거야?"
"음...어디서부터 얘기 해야 하지...?
그러니까...머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상처는 다 치료받았어. 수술도 몇차례받았고.
모든게 정상이라고 했는데 네가 의식을 되찾지 못해서....
니가 의식이 돌아올때마다, 나는 세상을 다 가졌다가,
네가 다시 쓰러지면..구렁텅이에 빠지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지."
"시간이...얼마나?"
그가 잠시 망설이는듯 했다.
"괜찮아. 말해, 나 산전수전 다 겪은거 알잖아."
"지금 공주가 몇살인지 알아?"
그러고보니 이신우의 눈빛이 많이 깊어졌고...
얼굴빛도, 전에 없었던 잔주름도 조금 보이는것 같았다.
"우리 공주...다섯살이잖아."
이신우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놀라지마...
공주...이제 열 두살이야."
"뭐?"
이신우는 참고있었던 눈물을 그제서야 터트렸다.
그리고 내손을 붙잡고 자신의 품에 파묻었다.
"고마와 지수야...이렇게 깨어나줘서...나는 니가 이것도 이겨내 줄거라 믿었어."
모니터에 뜬 내 vital sign들을 보고 그제서야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또 몰려 들어왔다.
다시 이런저런 테스트가 시작되었고,
그러니까 오래 전 그날,
짐승같은 정준혁에게 심하게 맞던 중, 발로 짓밟히고 벽으로 머리를 세게 부딫친 충격으로 서서히 뇌출혈이 시작되었고,
그래도 그후 몇분간은 서류에 싸인을 하고, 이신우가 껴안아준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이후로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었다고 했다.
몇칠 후, 의식을 찾고 잠시 깨어났었고
그때가 이신우와 정우의 목소리를 들었을때였던것 같다.
여러번의 수술과 치료와 검사를 통해 회복할것이라 했고
모든것이 정상이라고 판단받았을때는 몇개월후였다.
그 후 나에게는 완전히 사라진 기억이지만,
나는 가끔씩 의식이 돌아와 몇마디 말을 주고 받고, 운동도 꾸준히 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혼수상태가 자꾸 되돌아 오자,
의사들은 거의 포기상태에 들어갔고
그 이후로는 깨어나도 알아들을수 없는 말로 횡설수설을 하거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해서
정상적이라고 믿었던 뇌에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계속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몇년동안의 치료와 검사와 실험을 계속하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마지막으로 효과가 있다는 수면제를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상태가 놀랍게 호전되었고,
이렇게 정상적인 기억과 대화를 나눌수 있는 상태로 회복한것이었다.
나는 기억이 나지않는 그 길고도 고통스러운 회복기간을,
이신우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려 준것이었다.
이제는 밤이 되면 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눈이 떠지는,
정상스러운 생활패턴이 아주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
눈을 떳을때는 밝은 아침이었다.
내 손을 잡고 옆에 잠들어 있는것이, 이번에는 이신우가 아니고 예쁘게 머리를 땋아올린 소녀였는데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벌떡 일어나더니 동그랗고 큰눈으로 그 아이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엄마! 엄마 깼어요? 엄마!"
엄...마...라고?
이런 예쁜 아가씨가 우리 공주라고?
"공주? 공주야?"
"엄마!"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가슴에 안았다.
"아...우리 공주...우리 공주...이렇게 예쁘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미안하고 안쓰럽고...마음이 아파서
이게 도데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이렇게 예쁘게 자랄동안, 난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엄마 깨어났구나..." 하며 이신우가 웃는모습으로 다가와 공주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잘 잤어?"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제 웃기도 하네..."
"나...정말 그렇게 바보같이 잔거야? 우리 공주 크는것도 못보고? 우리 예쁜 공주 크는 아까운 시간동안...이렇게 바보같이..."
"난 엄마 매일 봤어요! 그리고 엄마가 늘 나를 지켜주는거 느꼈어. 엄마랑 같이 책도 많이 읽었고, 숙제도 같이 하고, 얘기도 많이 했고...난 엄마랑 항상 같이 있었어. 신우아저씨가 매일 엄마얘기 해줬고. 엄마가 이렇게 깨어날거라고! 나는 알았어요!"
하며 천사같은 그 아이는 활짝 웃었다.
이빨도 가지런하고, 입은 옷도 너무 예쁘고, 피부도 뽀얀 이 아름다운 소녀가 내 딸 공주라니...
근데 신우...아저씨? 삼촌이 아니고?
"아저씨?" 하며 이신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부렸다.
"어떻게 된거야?"
"공주야, 잠깐, 아저씨하고 엄마하고 할얘기가 좀 있어서."
"그럼요, 왜 없으시겠어요,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하며 공주는 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공주가 나가고, 이신우는 조용히 거울을 가지고 내 곁으로 왔다.
"인사해, 지수아줌마한테.
너무 놀라지 말고...너 폭삭 늙었으니까."
7년...7년동안 잠만 잔 사람은...대체 어떻게 변해 있을까..?
이신우는 아직 멋진모습 그대로인데...
나는 너무나 흉해져 있으면 어쩌지..?
거울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피부가 뽀얗고 깨끗했고, 눈썹도 깨끗히 정리되어있고,
머리도 단정하고 차분했다.
물론 성숙해진 내 모습이 생소했고 달라져 있었지만...
이신우를 올려보았다.
그는 흐믓하게 웃고있었다.
옆에 서있던 간호사가 참다못하고 결국 끼어들었다.
"이신우씨가...
어떻게 간호를 하셨는지
상상이나 하실수 있겠어요?
우리모두 두손 두발 다 들었답니다.
피부관리며, 운동도 꾸준히 시키시고...
좋다는음식, 좋다는 로션...
정말 안해보신게 없어요.
눈썹이나 손톱정리까지 정말 세심하게 직접하셨구요.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달이면 다들 지치는데..
이런분...정말 처음 봅니다, 저희도."
손톱을 내려다 보았다. 너무나 완벽하고 깨끗하게 정리되어있는 손톱, 꾸준히 주물러주고 돌봐줘서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등...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이신우...이사람...
7년이라는 세월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기억도 하지못하고
회복의 확신도없는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다들 포기하라고 했을텐데,
희망이 없다는 소리를 매일 들었을텐데
그는 내 손을 주무르고, 내 얼굴에 좋다는 크림을 찾아다 발라주고, 내 눈썹을, 내 손톱을 정리하고...
소리없이 흐느끼는 내 어깨를 그는 조용히 안아주었다.
"이...바보...! 오빠 바보 아니야?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나는 너무나 미련한 그에게 화가 나려고 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직 해야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그렇게 우느라고 아까운 시간을 또 낭비했다.
문이 삐그덕열리고,
몰라보게 정장을 빼어입은 정우가 나타났다.
"아...내 이럴줄 알았다니까.."
"정우. 왔구나" 하며 이신우가 헛기침을 했다.
"또 이렇게 드라마 찍고 있을줄 알았어. 어제나 오늘이나 그 청승맞은거 못말려요."
하며 정우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사람이 게을러? 좀 부지런하게 일어나서 돈도 원없이 써보고, 좀 하지."
말투는 여전했지만 완전히 의젖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주책이야, 정말, 아프신분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하며 뒤에서 정우를 툭치는 사람이 있었다.
여자?
"야, 지금 니가 튀어나올 순서가 아냐! 아직!"
정우를 밀치고, 세련된 아가씨가 밝게 인사한다.
"정말 정말 늘 기다렸어요. 이렇게 뵙게될 날을.."
"누구...?"
"저 정우씨 약혼녀 이한정이라고 합니다. 제일먼저 인사드려야 한다고, 정우씨가 난리를 쳐서 저 오늘 출근도 못했어요."
정우가 멎적은듯 씩웃었다.
"축하해요..."
나에게는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정우가 행복한 모습을 보니...정말 꿈만 같았다.
"어머니는...건강하신거죠?"
"우리 엄마, 완전 변했다. 엄마도 병원에서 한참 고생하시다가, 너에게 지은 죄때문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너 깨어나라고 하루도 안빠지고 새벽기도 다니시고, 그 사자같던 김여사가 시들시들한 양같이 되어버렸어. 나 참. 이제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시고...지금 전세아파트에서 사시잖아."
믿어지지 않았다. 그 분이 나를 위해 기도를?
그날 오후,
이제 제법 휠체어를 타고 이신우와 바깥 산책도 나갈수 있었다.
"오빠는...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어..?
좋은사람도 만나고, 결혼해서 아이도 셋쯤은 낳아도 되는데,
왜 이러고 있었어..?
그리고 왜 공주가 아저씨래? 삼촌이 아니고."
"좋은사람 만날 시간이 어딨어?
니가 그렇게 잔소리하던 공부도 마쳤고.
공주랑 너 먹여살릴 직장도 생겼고...
열심히 살았지."
"뭐? 왜 오빠가 날 먹여살려?"
"또 그런다. 그리고 자꾸 오빠 오빠하지마. 듣기 싫다."
"어?"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찜찜한 표정으로 내 휠체어를 자신을 향해 돌리더니.
"너...내가 왜 네 진짜이름이 이신애...라는거 끝까지 말 안해줬는지 알아?"
나는 말없이 그를 조금 노려봤는데...
"정우씨 말로는...나를 이용하려고 그랬다고 하던데?
오빠 무지 스마트하고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이신우가 훗하고 웃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을수도 있지...
근데 니가 이신애가 되어버리면...법적으로 내 동생이 되잖아.
그래서 유산문제 다 해결된 다음...
내가 다시 니 이름 되돌려 놨어. 윤지수로. 의사가 너 부를때 들었지? 윤지수씨...라고 하는거.
공주에겐 어릴때부터 가르쳤지. 삼촌아니고 아저씨...라고 하는걸로."
풋...하고 먼저 웃음이 나왔다.
"혼자 김칫국 다 마시고 있었구나, 의식도 없는 사람두고 내 의견은 뭍지도 않고 맘대로 남의이름을..?"
이신우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 휠체어 앞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와 마주보았다.
"너한테 허락 안받아도, 나는 이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무슨 자격?"
하는데 갑자기 그는 내 입술로 다가왔고
나는 잠시 그와 동의하다가,
곧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지수야..." 그가 조금 실망한듯 했는데.
"잠깐. 잠깐만. 나...이제 정말 건강한거야? 영영 정상적인 생활을 계속 못한다거나, 뇌에 치명적인 이상이 있거나...다시 또 혼수상태에 빠진다거나.."
"왜. 니가 그럼 어때서?"
"안돼. 오빠는 더 좋은사람이랑...완벽한 사람이랑 행복해야돼.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면"
그는 내 입술을 그냥 덥치듯 키스했다.
꼼짝도 못하고 아무말도 할수없도록 그는 길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잠시후 말없이 나를 보았고,
"물론 니가 장애인이 되어도 나는 상관없지만, 너는 완전히 완치될수있다고 하셨어. 물리치료받으면서, 근육에 힘도 다시 살리고, 이제 회복되는건 시간문제라고. 그러니 더 이상 피할 생각 마. 어차피 인생이란건 모두에게 시한부야.
니가 예전에 그랬지? 사람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는거...그게 기적이라고."
"정말? 정말이지...그럼. 다시 건강해질수 있는거지...?
그럼, 오빠아니고, 이제...뭐라고 부르지?"
"그건 좀 있다 해결하기로 하고...또
다른거 궁금한건 없어?"
"궁금한거 많지. 오빠가 감옥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정우어머님에게서 재산을 되찾아 왔는지, 또..."
차마 입밖에 담고 싶지도 않은 그 이름..
"그날 정우가 숙모님 변호사를 보내줘서 감옥에서 나왔어. 그 이후로 재판까지 가지 않도록 여러가지 도와줬고.
니가 그렇게 쓰러지고 나서 정준혁은 살인미수로 조사를 받다가 정신병원으로 옮겨져서 아직도 그곳에 있다고 들었어.
그때 정우 아니었으면 너는...더 심하게 다쳤을거고,
싸인도 못했을것이고...나도 그대로 감옥으로 갔겠지. 우리에게 생명의 은인이야.
그런데 정우가 재산까지 다시 되돌려주고, 그때부터 재산싸움이 시작됐지. 서로 가져가라는 재산싸움.
결국 다 너하고 공주이름으로 돌려놨어.
그 유산이 아니었으면...이렇게 최고의 의료진에게 최대한의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기 힘들었겠지.
정우하고 나는, 니가 잠든동안 학교도 마치고 직장도 생겼고..
이제 우리는 모두 네가 행복한 현실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어.
니가 깨어나지 않는건...혹시나 지금까지 이 세상이 너무 아팠기때문에 깨어나기 싫었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오해를 풀어주고싶었어.
이제는. 절대로 너 혼자가 아니라고...
나도 있고, 정우도 있고,
공주도 있고..."
"오빠는...정말 바보야. 어떻게 그렇게 긴시간을 기다렸어..."
"길게 느껴지지 않았어. 니가 가끔 깨어나서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해줘서, 아주 매일매일 롤러코스터를 타는거 같았다."
"미안해서 어떡해..."
"이제부터 매일 매일... 내 앞에서 눈 떠주기만 하면 돼."
"이렇게 쓸모없는 나를...뭐가 좋다고..."
"가족이란게..그런거라고 했지?"
"오빠라고 부르지 말라며?"
"어허...이젠 그런 가족이 아니라..."
하며 그는 다시 나에게 다가와서 키스했다.
"사랑해...
지수야."
"사랑해..."
그의 숨소리에 나는 빨려들어갔고..
우리는 이제.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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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살아가는게 결코 쉬운일이 아니죠. 삶에 희망이 가득차서 매일매일 야호! 를 부르며 아침을 깨우는 사람들보다,
아마 겨우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힘들어도, 어려워도, 괴로와도 내가 해야할일들을 향해 묵묵히 가시는 분들이 더 많지 않으실까...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이 어둡다고 내일도 어두우란법 없고,
내인생이 오늘 거지같다고 한들,
내일 공주가 되지 않으란 법은 없지 않을까요..
삶은 참으로 오묘하고 미스테리하니까요.
사랑하는 독자님 한분한분께, 또 특히, 힘드신일 가운데 많이 고통받으시는 독자님들께
따뜻한 허그처럼... 아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시고 찾아와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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