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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기도

16, 마르꼬 17,요한 18, 마태오복음서 읽기 오 은정 (sungshim7614) 2016-7-10  12:12:03

16. (1 31일자/ 2016)

마르코 복음서 읽기

 

이번 주의 성경읽기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정해놓은 하루분을 읽고나서 거룩한 시간동안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서를 다른 분들에게 읽으라고 숙제를 드렸더니, 그분들의 말이, 복음서 중에 루카서가 가장 읽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장당 구절들이 길어서 지루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서를 먼저 선택한 것은 저의 여정이 복음서의 특별한 시간들과 일치하는 저의 생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동방수도승의 기도를 하면서 처음으로 루카서를 읽었고, 안에서 저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여정을, 다음엔 마르코를 읽었고, 안에서는 예루살렘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여정이 있었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 아래에 있게 되는 여정을 왔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시간을 띄어 마태오 복음을 읽었는데 안에서 저는 복음서의 세세한 이야기보다는, 예수님을 선포하는 마태오의 여정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계속해서 마태오 처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면, 시간들을 때에는 알지 못했으나, 시간들을 살고나서 되돌아보면,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여정이 보여집니다. 복음서에도 저의 여정처럼 주님 안에서 사람마다 이렇게 여정의 흐름이 자신의 삶대로,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우연히 루카서를 읽곤 했었는데, 그것이 처음엔 루카서의 글들이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져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읽으면서 세세한 구절들을 묵상하지는 못했고, (묵상하는 방법을 모르니 그저 읽기만 한거죠.) 거룩한 시간을 드리면서 그저 되는대로 읽고나서 그대로 동방수도승의 기도를 하면서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부터인가는 제가 실제로 마치 예루살렘을 향하는 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점차 세세하게 뭔가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과 부르심을 따라가는 여정, 이제 제자로 입문해서 받는 보살핌들이 어떤 감정이 되어서 제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속에서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어딘가를 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보면, 이러한 모든 일이 그냥 예루살렘을 향하는 사막의 위에서 일어나고 진행되는 그런  일들이라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제가 감으면 마치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것처럼 보여지는 것입니다. 황무지 흙이날리는 흙먼지 , 포기 없는 메마른 , 그러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런 길을, 오가는 사람들도 없는 길에 저도 한무리 속에 하나가 되어서 지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막의 뜨거운 바람들이 느껴지고, 발바닥 사이로 끼어드는 먼지들이 느껴지면서 저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음이 느껴지는 그런 일들입니다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것은 어느 날은 예수님의 탄식에 가까운 말씀을 들은 , “사람의 아들이 머리를 곳이 없구나! 그러면서도 비통함 속에서 느껴지는 다른 기운은 제자들, 그리고 안에서 저를 어루만지시면서 살뜰히 챙기시는 주님의 손길이 기억이 납니다. 저는 묵상을 못하니 ‘예수님께서 저를 이렇게 살펴주시는데, 정작 당신은 슬프실까? 하는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곤 어느 날은 “베드로가 너무나 유약하구나! 요한은 아직 어려서 혈기왕성하구나.”를 마음으로 들었는데, 그럼에도 제게 느껴지는 것은 어린 요한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따스한 눈길, 너무 어린 나이임을 걱정하는 마음들, 배드로에겐 염려와 애정을 가지는 마음들입니다. 이렇게 묵상은 못해도 그저 느끼는 것만으로 시간들이 지나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것처럼 이렇게 시간에 빠르게 성경을 읽으면 제가 느낀 것처럼 여러분은 느끼지 못할 있습니다. 저는 적어도 어림잡아도 2년은 넘게 동방수도승의 기도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때 저의 상태가 무엇이건  받아들일 정도로  비워졌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지금 여기의 기도체험이 없어도 여러분은 복음서들을 빠르게 읽어서 대략의 전체 맥락을 잡는다 생각하면 됩니다.


17. (2 7일자/ 2016)

2 현존 -생각 속에서 머물기(3주간)

요한 복음서 읽기

이번 주의 기도도 요한 복음서를 날마다의 분량을 정해서 읽는 것입니다. 지금은 묵상하지 못해도 좋으니 읽은 것에 마음을 들이기 바랍니다. 읽는 것이 어느 정도 되어야 자기 안에 들어오는 말씀도 선택할 있습니다. 제가 받은 은총 중에 하나가, 제가 무슨 생각이 들어서 이것으로 기도해보면 어떤 결과가 올까? 아니면 이런 자료는 어떨까 하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자료를 가지고 기도로 보여 사람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자료들의 결과를 듣게 됩니다.


한동안 성경을 오래 읽어서 묵상하는 것과 하루나 이틀 정도에 집중적으로 읽어서 묵상에 들어가는 것의 차이를 궁금하게 여긴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도 그룹이 생겨서 그들에게 성경을 읽어서 말씀을 선택하는 과정을 숙제로 내주었고, 그들이 성경을 읽어도 곧바로 말씀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기 정도에 말씀을 선택할 있는가를 지켜보았는데, 가장 빠르게 말씀을 선택해 사람이, 성경을 읽기 시작한 정도 무렵이었으니까 우리가 기도에 들어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성경을 읽어서 마음에 들어오게 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읽기가 되면 말씀들 사이에서 집중이 되고 나비처럼 오락가락하게 있습니다.


저의 마르코를 읽는 내내는, 제가 언젠가부터 예루살렘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저의 마르코의 여정은 온통 예루살렘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 되기 위한 자기와의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저의 믿음으로 저는 저를 과신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는 제가 기도 중에 어느 자매와 계속해서 실랑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그야말로 동방수도승의 기도를 혼자서 하고 있는 아주 초보자였고, 그자매는 관상기도를 깊이 들어간다고 말하던 중이었으니 이리저리 봐도 제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묵상을 할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저는 묵상의 형태라기보다는 그냥저냥 생각이나 궤변정도를 쥐어짜는 정도였을까요? 그러니 저를 보는 매순간마다 저의 기도를 폄하하고 자기 기도회에 오라고 저를 압박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너무나 힘이 들었어요. 그러니 힘듦을 견디기 위해서 제가 나름대로 이리저리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그러면 제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안고 넘어가면 되는데, 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제가 진짜로 자매를 받아들일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것입니다


분명히 기도로 자매를 이해하고 보듬어주어야 하는데, 자매를 받아들일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저를 괴로워하다보니, 결국은 내면이 저의 행하지 못하는 믿음을 보게 것입니다. 저의 힘없는 믿음이 저를 가로막는 안의 걸림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가장 걸림돌이 안에 있는, 제가 만들어 놓은 저의 십자가, 안의 두려움이, 약함이, 믿음없음인데, 저는 십자가는 숨겨두고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핑계합니다


주님의 뜻은 주변의 모든 환경들은 자신을 제자 되게 하기 위함으로 주신 것이지, 저를 반대하는 아니고 오히려 저를 돕는 것들입니다. 저의 정신이 이렇게 깨달아도 깨달은 그것을 몸이 실천할 힘이 없는 것이 바로 그때의 저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힘으로는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열심히 자매의 말을 기쁘게 들을 있게 되었고, 자매의 기도회에도 따라갈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자매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자매가 제게 기도를 부탁해서 그의 간곡한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함께 체험했습니다. 돌아보면, 주님 제자되기에 제가 너무나도 약한 믿음과 정신과 몸과 마음을 가졌고,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도저히 혼자서 길을 절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저의 마르코는 나약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18. (214일자/2016)

2부 현존 -생각 속에서 머물기(4주간)

마태오 복음서 읽기

이번 주에도 마찬가지로 마태오 복음서를 날마다 정해진 분량을 읽고나서 한 시간 동안 읽은 부분을 묵상하거나 동방수도승의 기도를 계속해서 합니다.


(저의 요한 복음서를 읽은 때는), 이때 아주 우연히 진리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서 그 말씀을 붙잡고 앉아있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제가 뭘 알아서 한게 아니라 어느 순간에 그 말씀에 집중되고, 저도 모르게 진리에 머무를 수 있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냥 그렇게 똑같이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진행해보니,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고, 자연스럽게 성경 말씀에 마음이 머물러지면서, 말씀에 머무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제가 거룩한 시간 동안에 성경 묵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 이때부터는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도 제가 무엇을 하든지 마음은 말씀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었고, 기도 속에서도 깊이 침묵으로 인도될 수 있었어요. 한번 기도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한 시간이나 한 시간 10분 정도 걸렸고 그것이 마치 5분처럼 앉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뭔가를 깨닫거나 느껴지는 것이 기도 속에서만 있는게 아니고, 거의 생활 속에서 잠깐씩 깊이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게 생활 속에서 잠깐 무슨 일을 하다가 뭔가 느껴지면 금새 거기로 푹 잠기게 되는 일들도 많았고, 또는 생활 속에서 그날 읽은 성경말씀을 생각하고 있으면 기도 속에서 금방 침묵으로 들어가서 생각의 줄기들을 찾아내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기도와 생활이 따로 분리가 안 되고 하나로 연결되어 늘 주님 안에 있게 된 것처럼’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마르코 복음서를 읽으면서 겪었던 부분들을 기억하시지요? 제가 요한 복음서를 읽으면서 제 생활로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체험하게 되면서 드디어 제가 요한의 그 십자가 아래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그 순간에 제가 십자가의 하느님을 뵈었다고 느끼게 되고, 그 순간에, 그제서야 마르코 복음서를 읽으면서 제가 겪었던 일들이 저를 정화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자매와의 일들의 의미가 이렇게 요한의 십자가 아래에까지 쭉 연결되었음을 선명하게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바로 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마르코 복음서를 통해서, 그 자매를 통해서, 그동안 저를 막고 있었던 제 어둠의 실체를 직시했고 그것을 정화시켜주심으로써, 어느 관문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과, 오랜 동안의 성체조배로써, 제가 예수님을 볼 수 있게 그동안 그 성체의 빛으로 제 마음의 어둠 한자락이 씻겨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랜 동안의 기도시간 속에서, 복음서의 여정을 가면서  제가 요한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저를 씻겨주는 정화가 이루어진 것이죠. 저는 요한을 읽으면서 그 모든 여정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로 모아지면서, 비로소 예수님이 사람이 아닌 하느님, 그러나 저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을 제 눈이 열려서 보았다고 아직도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 드디어 오랜 시간 동안의 제 단단함을 부수고 마음을 열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깊은 고백을 그제서야 하게 됩니다


저의 마태오는 요한복음을 읽은 이후로 몇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읽었습니다. 마태오의 여정은 마태오 복음서의 세세한 구절들에 대한 묵상보다는 마태오, 즉 저자 마태오의 처지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엔 마태오와 저의 처지가 마치 제가 겪은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구절구절들 속에 담긴 깊은 마태오의 의도가 마치 제자신의 생각처럼 알아지기도 하고, 마태오가 속한 공동체를 바라보는 마태오의 모습이, 지금 주님의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아직도 진행중인 제 모습과 겹쳐집니다


저의 마태오는 기도하면서 열정적인 그의 정의가 주님의 정의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여전히 자비와 정의 사이에 주춤거리는 저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혹시 이렇게 느껴지는 강렬한 정신들로 보아서, 마태오는 그 시대의 복음구전들을 편집한게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깊이 기도하면서 고심하면서 쓴 책이 아닐까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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