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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기도

묵상에 정답이 없다!-마태오를 따라서 오 은정 (sungshim7614) 2014-3-8  16:54:04

2주째

배움 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

목요일

여러번 성서를 읽었어요.

성서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마태오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기도중에는 문제집의 질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마태오에 대한 생각을 멈추려고 애를 쓰는데 마음은 계속해서 마태오에 머물러 있게 되요.

이상하지요? 왜 이렇게 마태오를 생각하고 있을까요?

 

금요일

저는 여전히 마태오를 생각하고 있는데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들이 올라왔어요.

안스러움, 연민같은 느낌인데 딱히 꼬집으라고 하면 그냥 웬지 나와 같다는 안타까움같아요.

그러면서 내가 마태오와 같다는 그런 생각이 순간 들었어요.

-이거 기도가 제대로 되는건가?- 의심이 들어서 감정에 대한 느낌들을 떨치려고 애를 쓰는데,

갑자기 어떤 상황들이 느껴져요.

그게 마태오복음을 처음으로 읽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확신이 들어요.

그것이,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교회가 가르치는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지요.

그동안에 교회가 연구하고, 주님의 뜻을 풀이하고, 그러한 자료들을 우리는 무리없이 받아들이고있다. 이것은 시간이 흘러서 다양한 사람들의 해석이 그안에서 녹아난 결과이기도하지요.

하지만 그때의 그 시대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보면,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되었을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그토록 핍박받았던 유대인의 정통성안에서 그 맥을 찾아내는것이 과연 사람들에게 공감을 샀을까 의문이 듭니다.

마태오의 복음이 기도로 이루어진거라면, 당연히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을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의 책이 떠오릅니다.

제가 원고를 마치고 여기저기 원고를 돌렸을때에, 아무도 저의 기도를 이해하지 못했죠.

제가 하는 묵상을 신기해 했었지만 제 기도를 이해하지는 못했지요.

기도를 가르치는 사람들까지도 그랬었다는것이 기억이 납니다.

 

저는 지금도 기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음을 생각합니다.

지금 이 많은 지식의 홍수속에서 기도를 원하면서도 정작 기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물며 그 시대 사람들이야 더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보니, 마태오가 그때의, 자기시대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저자였군요.

그래서 마태오와 저의 처지가 같다는 안타까움이 올라왔군요. 이 안타까움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기도를, 그래도 들려주어야하는 마음이겠군요!

 

토요일

기도가 여전히 마태오에게 머물러 있었어요.

나와 마태오와 같다는 생각속에 더 깊이 들어가 있어요.

또 무엇이 같을까요?

문득 마음속에서 이민자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 마태오는 이민자였을수 있겠네요.

그러더니 이내 마음속으로 이민자에 대한 생각들이 올라옵니다.

이민자는 이민자들만이 겪는 삶의 무게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빠르게 저는 저의 미국생활을 되돌아 생각해집니다.

제가 맨처음에 미국에 왔을때, 저는 이사야서를 주로 읽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제가 바빌론으로 유배를 당한 이스라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잘나서 미국온줄 알았더니, 실제로 살아보니 저는 유배를 당하러 미국에 온것입니다.

말이 안통해 유배,

생활의 유배,

발이 묶여서 발의 유배,

정서가 달라서 문화의 유배.

저의 유배로 저를 돌아보니, 저는 유배당할만하게 목이 곧은 백성이었어요.

실제로 이스라엘의 유배 시기를 되돌아보면,

이스라엘은 유배를 당해서 신앙의 청제성을 확립시키기 위해서 많은 전승들을 문서화시키는 작업을 한것처럼, 저에게도 이 유배는 제 신앙의 정체성을 위해서 주어졌다는 거, 즉 제 몸과 마음에 주님의 법을 새기는 그런 시간이었다는 것이요.

이렇게 묵상하고보니,

마태오도 어쩌면 저와 같았을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그리고 진짜로 남아있던 모든 이스라엘은 바빌론 유배처럼 자기땅을 더나야햇으니, 마태오도 이민자로써 삶의 무게를 지지않을수 없었을것이고 그것이 그를 기도하게 만들었을것입니다.

이민자의 삶속에서 유대인이라는 민족 주체성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해주는것이 마태오와 그가 속한 공동체에겐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것입니다.

그러니 마태오는 이민자로써 정말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을것이라고 확신이 듭니다.

 

일요일

제가 문제집을 읽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오늘은 보라, 동정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에 머물로 있습니다.

마음으로 마태오가 이 예언을 풀어주면서 무슨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요?

여쭙고 있습니다.

제마음으로는 주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 올라옵니다.

마태오는 정말로 이 말씀을 전해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뜻으로 저는 받아들여집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있을때,

마음속에서 갑자기 저는 주님께서 늘 저와 함께 계시는것을 알고 있는데, 왜 이말슴이 저에게 올까요? 제가 혹시 주님을 의심하고 있을까요?” 하고 여쭙고 있는거에요.

그러더니, 요새 제게 일어나고 있는 마무리되지 않는 일들이 하나씩 쭉 떠오릅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한두개가 아니라 다 엉켜있는것으로 느껴지는군요.

그 순간 제마음으로 어떤 그림하나가 그려집니다.

이건 환시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마치 점자책을 들여다보둣이 천천이 알아지고 느껴지는것입니다.

한무리의 군대 같습니다.

사각형으로 대열이 이루어져 있고,

천천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서 어떤 사람하나가 대열보다는 훨씬 앞에서 무리들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아이고, 혼자서 그렇게 앞서가면 어떡해? 다 같이 가야지!” 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합니다.”

기도가 끝나서 다시 묵상을 해봅니다.

그 이미지가 뭐지?

제 마음속으로 그 앞서서 설치는 사람이 너무나 성급한 사람이라는것을 생각이 들면서

문득, 그게 바로 접니다.

! 깨닫습니다.

주님의 일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필요한것은 모두가 다 함께 가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저의 직관이 빠르다보니, 저의 성급함으로 모두를 들들 볶고 있었나봅니다!

가만보니 제가 엉켰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제가 그시간을 단축해볼려고 애를 쓰는것이 더 일이 엉키게 하고 있다는것이 알아집니다.

엄청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것이,

이렇게 복음서는 그 이후에 시간이 흘러서 주님의 경전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제 책도,

이제부터는 시간을 기다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것 같습니다.

실망하지 말고 저도 기쁘게 주님의 시간을 기다려보겠습니다.

 

월요일

배움 4

동방박사의 경배에 마음이 머물러서 묵상

마음으로 들어오는 생각은 구원은 크고 화려한곳으로부터가 아니라, 작고 보잘곳없고 허름한곳으로 부터 시작됨을 생각하게 하고,

구원이 유대인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 먼저 보여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적으로 유대인들은 긴 시간동안에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오히려 그들의 눈과 귀는 볼수 없고, 들을수 없어서 메시아를 맞이할수 없었어요.

반면에 메시아를 전혀 모르면서, 동방박사들은 경배하러 찾아오는것을 볼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는 못하지만 예수님께로 구원이 되도록 초대된 사람들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또 동방박사의 에수님에 대한 경배는

바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같은 맥락으로 신랑을 기다리는 열쳐녀의 비유에서 신랑이 올줄을 알지만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 즉 그들을 떠나서 구원은 준비된자들에게 먼저 돌아간다는 의미로 생각이 듭니다.

 

화요일

묵상중에 동방박사는 왜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었을까? 의문이 들었어요

단지 호기심에서 기나긴 여정을 걸어갔을까?

헤로데가 두살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인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 별이 보이기 시작한시점에서 족히 일년은 넘게 유대인의 왕을 찾아서 온것이라고 할수 있을것 같아요.

그먼길을 단지 호기심으로 갔을까?를 묵상하는데, 순간 마음안에서 무한 긍정의 힘을 잠시 느꼈어요.

아주 기쁘게 길을 가고 있는 그들의 마음요.

날이갈수록  커지는 기쁜마음이요.

그때 마음속에서 순례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순례.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걸어온 그길을 순례라고 할수 있겠구나, 생각하는 순간에

문득 나도 주님을 향해서 순례의 길을 가고 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들은 일년이 넘게 순례를 했지만, 그들의 일년이 나에게는 평생의 길이구나! 하고.

내가 처음에 순례에 들었을때에는 내 삶에 대한 기복으로, 그것을 해결받기 위해서 였는데 지금은 그냥 가고 있는거 같다. 잘가고 있는가?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께 힘이 되기위해서라고 마음속에서 떠오릅니다.

 

수요일

나의 순례에 대해서 게속해서 묵상하고 있어요

나도 나의 순례를 마치면 주님을 뵙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내 순례를 마치고나서 주님을 뵈오면 무엇으로 경배를 드려야할까? 자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주님앞에 무엇을 드리게 될까?

 

목요일

배움 5

나자렛 사람,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

호세아는 모세의 엑소더스를 말함이고,

판관기는 삼손의 나지르인으로 운명과 역활,

라마의 통곡소리는 유배를 떠나는 사람들이 라마에서 집결해서 환송을 하는것으로

이세가지의 사건은 곧 그시기에 실제로 일어난일들임을 생각할때에,

이것을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계속앻서 마음속에서 저항이 느껴졌어요.

어떻게 이사건들을 마태오가 연관을 지었을까를 여쭙습니다.

한참 묵상중에, 나의 기도가 떠올랐어요.

내가 내적치유를 위한 자료들을 뽑을때에

기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게 내적치유로 들어갈수 있을까 의문을 주었었죠.

그런데 실제로 기도를 해보니,

진짜로 내적치유로 들어가게 되는것을 듣게 되었는데,

성서의 구절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알려주지만, 실제로 깊이 기도함으로써, 성서가 전부다 하느님과 자신들의 특별한 역사속으로 들어갈수 있다는 것을 보았죠. 그래서 나는 성서가 바로 나와 하느님과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신앙고백이라고 할수 있지요.

그렇게 생각이 드니까 바로 마태오에 대해서 깨달아집니다.

마태오는 기도로 자기의 신앙안에서 이 성서들이 예수님과 연결되는것을 체험한것입니다. 구약과예수님이 연결되는 체험들이 바로 마태오가 믿음으로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마태오의 신앙고백이 내게도 적용이 될까요?

이 신앙고백을 내게도 적용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교회를 주관하시는 성령이심을 깨닫습니다.

성령이 계심으로, 나도 기도함으로써 마태오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묵상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시면서

묵상의 범위를 좀더 한정적으로 하라고  한소리 들었어요.ㅋ

 저는 속으로만, 수녀님몰래,

'그게 기도가 제 맘대로 조절이 되나요?

생각은 끊어 낼수 있지만 성령은 우리가 끊어내지 못해요!

성령의 이끄심일지도 모르죠!!!' 불평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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