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시슬레, 눈 내린 루브시엔 1878作

이번 겨울은 미처 가늠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갑자기 찾아왔다. 저 멀리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이만큼.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히 겨울을 맞이했지만 난 계절의 변화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사실 누군가 ‘툭’ 하고 건드리면 “겨울이 싫어요! 추운 건 딱 질색이라고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흐린 회색 하늘, 손끝을 마비시키는 칼날 같은 바람,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길도 다다 싫었다. 게다가 뉴욕 주의 겨울은 상상 이상으로 춥고 눈도 많이 온다는 이웃 할머니의 말에 겁까지 잔뜩 먹은 상태였다.

할머니의 예언은 정확했다. 기온은 툭하면 영하 30도까지 떨어졌고 눈도 시도 때도 없이 내렸다. 어찌나 추운지 나이아가라 폭포가 꽁꽁 얼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추운 날이 계속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그 시간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적어보면 대략이랬다. 책 뒤적거리기, 유럽 예술 영화보다 잠들기, 달달한 간식 탐닉하기, 글 끄적거리기, 와인 홀짝거리기. 참, 두 번이나 독감에 걸렸다. 그것도 2주 간격으로. 한번 앓고 나면 면역이 생겨 다시 안 걸리는 줄 알고 방심했다가 호되게 당했다. 게다가 미국 감기약은 어찌나 독한지 며칠동안 몽롱한 상태로 집 안을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어쨌든 무척이나 심심하고 지루한 시간들이었다. 시끌벅적함도, 번잡스러움도 없었다. 바쁜 것은 오직 눈뿐이었던 것 같다. 눈은 이미 온 세상을 뒤덮고도 내리고 또 내렸다. 아, 지겹도록 추운 동부의 겨울이여.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어떤 날은 ‘이대로도 좋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느릿느릿, 한가한 기분을 즐기게 된 건지 아니면 겨울 그대로의 쓸쓸함에 온전히 빠지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몸이 배배 꼬일 정도의 지겨움은 어느정도 사라졌다. 

추위도 눈도 일상이 된 어느 날부턴가 난 산책을 시작했다.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도는 것에 불과했지만 겨울의 정취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날도 밤새 내린 하얀 눈이 세상을 가득 덮고 있었다. 마치 하얀 생크림을 발라 놓은 듯 소복이도 쌓였다. 고개를 돌리는 곳 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온통 순백이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경쾌했다. 어쩐지 발바닥이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눈으로 뒤덮인 세상 속으로, 눈꽃을 피운 나무 사이로 하얀 입김을 뿜으며 걷는 맛이라니. 겨울 햇살에 반짝 반짝 빛나는 은빛 가지들, 눈 덮인 지붕 위로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굴뚝과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연기,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정겹게 다가왔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매일 스쳐 지나가는 소소한 풍경인 줄 알았는데. 재촉하던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의 그림 속 풍경은 그날의 기억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1873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파리를 떠나 루브시엔을 찾은 시슬레는 곧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에  매료되었다.  순수한 풍경화가로 일상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을 좋아했던 시슬레에게 그곳은 완벽한 장소였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며 마음에 드는 장소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 이젤을 세우고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눈 내린 루브시엔>도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다. 눈 내린 마을에 따스한 겨울 햇살이 스며들자 한 여인이 산책을 나섰다.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발길을 옮기던 여인은 눈 덮인 지붕과 나뭇가지의 하얀 눈꽃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아련한 추억의 장소나 되는 듯 익숙한 느낌이 든다.  그림의 구성은 명료하다. 사용한 색은 흰색, 은색, 파란색, 노란색, 검은색 정도. 시슬레는 비교적 짧은 붓질로 빛과 색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풍경을 실제보다 더 부드럽고 은은하게 묘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앞에 전경이 펼쳐진 듯 생생하다. 작품의 서정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슬레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함께 어울렸던 모네, 마네, 르누아르 등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명성을 쌓은 후에도 시슬레는 여전히 가난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그린 그림 속 더할 것 없이 평화로운 풍경들은 어떤 화려한 작품보다 마음을 울린다. 

미끄덩~ 꽈당! 겨울 산책을 우아하게 마무리하나 싶었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그만 넘어져버렸다. 빙판길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대로 미끄러진 것. 어찌나 아팠던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이고 내 고관절이야’ 창피해서라도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너무 아파 얼떨결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면서 나뭇가지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기 시작했고 하얀 눈꽃들이 우수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마치 봄에 만나는 벚꽃처럼. 길었던 겨울도 이젠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