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다.
천 번의 흔들림을 지나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까,
흔들림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는 걸까.
만 번을 흔들려도 견뎌야 하는 시간이 또 중년이라고 하는 걸 보면
기대와 달리 갈수록
흔들림은 잦아지고
그 때 마다 견뎌야 하는 수고도 여전한 모양이다.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는 한국 영화
‘남과 여’를 보기로 한 것은
순전히 군더더기 없는 제목 때문이다.
아픔이 있는 가정으로 지쳐있던 두 남녀가
위험하고 절박한 사랑으로 치달은
남자 상민과 여자 기홍의 이야기이다.
만 번을 흔든 남자와
그 흔들림에 자신을 맡겨버린 여자가
흔들림이 지나간 텅 빈 들판에 남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시린 이야기이다.
아름다운 설원의 핀란드에서
각자의 장애 아이를 캠프에 보내고
폭설에 갖혀 버린 이방인 두 사람은
오랜만에 찾아온 어색한 홀가분함과 본능적 욕구의 충동에
자신들을 맡겨버린다.
불꽃 튀는 열정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핀란드 숲 속 텅 빈 사우나실 안에서
기억 저편의 격정적인 욕망을 서로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이름을 알려 달라는 남자 기홍의 손을
꼭 한 번 더 잡는 것을 대답으로
여자 상민이 일상으로 돌아간 것을 보면
상민에게 기홍은 첨부터
운명적 상대로 보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우연 반 작정 반이라는 기홍과 재회하며
상민의 눈에 기홍이란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맘을 쫒아야 할지
붙들어야 할지 모를 흔들림이 거셀수록
그에게, 그녀에게 더 빠져든다.
남편과 기홍 중 한 남자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상민은 남편에게
"난 이사람 없으면 안 돼. 나를 용서하지 마. 나도 내가 용서 안 되니까.” 라는 말을 남기며
남자에게 달려가고.
같은 시간
역시 한 여자를 선택해야 하는 기홍은 정작
자신의 병든 가정을 선택하고 발길을 돌린다.
여자는 자신이 버려버린 세상과
여자를 받아주지 않은 세상 사이에 끼여 있는
초라한 방에 남겨진다.
거기서 위로해야할지 경멸해야할지
모호한 채로 내동댕이쳐진 낯선 자신과
씨름하는 시간을 살고
남자는 익숙한 세상에서 낯설게 살아간다.
간단히 보자면
정신적 교감조차 없는 상태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 기혼의 남녀가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을 모두 잃음으로
여자는 불륜의 대가를 치르고,
남자는 그대로 예전처럼 살아가는 불편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다.
정작 불편한 것은
불륜의 두 남녀에게서
처절한 아름다움마저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무엇이 내 윤리의 두터운 담장을 이 여자와 남자에게 허락 했을까.
섬세하게 절제된 절절한 연기나
잘 짜여진 배경,
여백을 제대로 비우고 채우는 음악이
은밀하고 달콤한 불륜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했다 하기엔 뭔가 석연찮다.
내용 전개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영화 전체를 따라 흐르고 있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불륜과는 섞일 수 없어야 하는 것
그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진실’이었다.
진실은 사랑과 불륜을 섬이 되도록 그 사이를 가르는 강이다.
그런데 영화 속의 진실은
만날 수 없는 섬 불륜과 사랑을 하나로 이어주는 강물이 되어 출렁인다.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가 겁 없이 떠올랐나 보다.
이게 무슨 모순인가.
영화 속 남자는 순수하고 선하다.
나쁜 남자가 안 보인다.
가식적이지도 않은 그는
능력 있고 진중하며 거짓말조차 서툴다.
힐끗거리는 눈빛조차 소유하지 않은 남자가 여자를 흔든다.
주어진 삶에 묵묵히 제 몫을 다하며
웃옷의 단추를 목까지 채우던 여자가
흔들림에 몸을 싣고
미친 듯이 뛰쳐나간다.
분명 우리의 얼굴을 닮은 여자와 남자였다.
시간의 조각들을 맞추어보며
되새김질 하며
스스로에게 해명해야 하는 많은 질문을 가진 채
혼란스런 시간 속에
여자는 남겨지고.
남자는
흔들림의 여진이 있는 익숙한 시간 안의
무책임한 남자로 남는다.
윤리와 진실의 모호한 경계선을
관객에게 떠넘긴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든
날마다 마주치는 현실이
현재 시점으로 가득한 이 영화의 결말이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잡아주거나,
우연히 하루에 두 번을 마주치거나,
같은 취향의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남자와 여자다.
낯익은 일상 속의 어눌한 대화상대가 남자와 여자다.
우연을 경험하고
은근한 흔들림을 애써 지나치던 사람이 남자와 여자다.
그런데 그 낯익은 것들이
진실이란 모퉁이들을 휘돌다 금단의 영역으로 흘러버린 것이다.
그거였나 보다.
금지된 곳에서 발견된 진실 때문에
천 번을 지나 만 번의 흔들림에조차 미동도 않았던,
아니 그래 보였던
여자들과 남자들이
오래된 아린 통증이 담겨있는 명치 끝
그 먼지더미로 상민과 기홍을 맞이한다.
흔들림을 버티느라
바싹 마른 잠자리 날개 같은 실금 간 가슴을 가진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러다가 송두리째 삭아 바스러지며
텅 비어진 가슴을 가졌던 남자들과 여자들이
이제야 그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만히 불러보는 것이다.
흔들림 속의 진실과
모든 게 휩쓸려간 뒤라야 발견되는 진실의 경중이나 좋고 나쁨을 견주기엔
미끄러운 돌멩이위에서
쉼 없이 흔들리는 우리들이 아닌가.
남자들과 여자들은
남자와 여자만의 그 고요해진 들녘에 같이 남겨진
처절하고 아름다운 공범들이다.
남자가 늦은 가을 식수대에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차가운 물 한 모금 들이켜다 문득
시린 계절을 느끼고.
만 번에 더한 단 한 번의 흔들림이 두려운 여자는
명치 끝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누른다.
여인아,
만 번을 버티고
화석이 된 여인아,
아직은 아무것도
헤아리지 마라.
들숨과 날숨을 낮게 고르고
느리게 고르며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가고.
명치끝
묵직한 통증이 무뎌지고도
한참 지나기 까지 살다가,
지금 말고 나중에
언젠가
한번
돌아보자.
나는 누구였고
너는 누구였으며
우리는 서로의 무엇이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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