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의 극진한 사위 대우는 한결같으시다.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건 없건 그렇다. 

까다롭거나 고약해서 행여 당신 딸에게 조금이라도 무례를 행할 기미가 사위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으로 그에게 딱히 의존하신 적이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겠는데 말이다. 

아마 어머니에게 사위는 예나 지금이나 ‘백년지객’이란 불변의 명제 속 인물인 모양이다. 

다행인 것은 사위 또한 아랫사람의 도리를 알아 어른을 공경하는 예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위와 장모와 딸이 함께 있는 장면은 늘 훈훈하고 덕담이 오가는 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도 그러셨다. 

반짝 반짝 닦여져서 은은한 빛이 감돌던 아버지의 은수저는 겨울날에도 드시기에 딱 좋은 온도로 데워져있었다. 어떻게 그 온도를 매번 맞추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따뜻한 은수저를 통해 어머니의 한결같은 사랑과 돌보심을 확인하셨으리라. 

밥을 남기는 법도, 모자라니 더 담으란 법도 없으셨다.

맛이 있느니 없느니 타박도 없이 아내가 준비한 찬을 그 은수저로 골고루 드시곤 그저 잘 먹었다는 말로 흐뭇하게 화답하셨다. 

아버지의 은수저는 두 분 사이를 오가는 연서였으리라.

그런 어머니가 딸에게 이러저러하게 남편을 대하라 특별히 말씀하신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은

 아마 어머니의 남다른 자식 교육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몇 번의 중요한 갈림길에 섰을 때 학교나 책에서의 배움들 보다는 자라며 무심히 보았던 장면들이 선택해도 좋을 한 길로 늘 나를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들은 대로 산다면 이 세상은 진즉 성인군자들로 넘쳐났겠지만 

자식을 키워 보나 여직의 나를 돌아보나 들은 대로 보다는 본 대로 하기 가 십상이다.

남편과 시간대가 다른 나는 주로 그가 곤히 잠든 시간이면 일어난다.

그야말로 미끄러지듯이 침대에서 흘러 내려 컴컴한 방을 소리 없이 빠져나오는 것도 이런 때문일 것이다. 

정작 그는 아내의 부스럭거림을 개의치 않는데도 말이다.

화장실 출입이나 옷을 입고 벗음에 그의 부재를 여태 살피는 것도 

아버지의 은수저를 데우시던 어머니 영향일 것이다. 

어른은 어른답고, 남자는 남자답고. 밥은 식탁에서, 공부는 책상에서, 물건은 제 자리에. 해야 할 말, 뱉지 말아야 할 말의 긴 흔적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연유인거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내 쪽의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이다.

희로애락의 표현이 자유로운 가정에서 자란 남편으로서는 불필요한 배려요, 

덩달아 자신에게도 요구되어지는 무언의 압력이었을 것이다.

물건은 손닿는 곳에, 밥은 배고플 때, 휴식은 필요할 때, 자세는 편하게 로 자란 사람에게 나 같은 배우자는 

농부에게 억지로 입혀진 무거운 갑옷처럼 숨 막히는 존재 일 확률이 크다. 

추운 날 춥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던 내 복잡한 표정이 남편을 꽤 오래 혼란스럽게 했던 걸 봐도 그렇다. 

그렇다고 그의 가정이 무질서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가장의 보좌가 구름위에 있었고 장손인 그의 보좌는 구름 바로 아래 어디쯤 있었으니까.

성적이 효성을 증명하던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낸 덕에 

남편은 나름 효자의 면모를 유지한터라 그의 자유가 그닥 손상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여전히 우리 사이에 조율중인 몇 가지들만 뺀다면 

그를 숨 막히게 할 나의 환경적 습관이 태생적으로 주류들과 좀 비켜 선 채 태어난 내가 세상 구경하며 주섬주섬 쟁인 것들과 뒤섞여 엉뚱한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새 귀 밑머리가 허예진 사위에게 

“자넨 권태기도 없는가.” 흐뭇하게 농을 하시던 장모께 

“…….그게 말입니다. 어머님……. 

이제 좀 감 잡았다 싶으면 벌써 다른 사람이 돼선 저 만치 서있으니 좇아가기도 바빠요” 하던 것을 보면 

난 좀 뒤죽박죽으로 변했는가 보다.

남편이 장기간 집을 비울 때면 얼른 신발 두어 켤레 현관에 부러 꺼내둔다.

멀쩡한 남편 옷도 빨래 줄에 걸었다 걷었다 하며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굴다가 

같이 있을 땐 또 느닷없이 눈을 착 내리깔며 “난 공간이 필요해요” 하고 전기 담장을 둘러버린다.

직진만 아는 남편은 예고 없이 모퉁이를 돌고 도는 여인과 균형을 잡느라 우왕좌왕거리다 

어느 새인지 어쩔 수 없어서인지 그것을 스릴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난 운 좋게도 썸을 타는 아내가 된 것이다. 전혀 의도치 않게.

남편의 심정을 글로 옮겨 보자면 

방금까지 다소곳이 수를 놓던 그림 같은 별당아씨가 별안간 사냥 복을 입고 한 손엔 장총을 떡하니 든 채 나타나선 “자 이제 사냥하러갑시다. 나를 따르시오”한단다. 

그러니 남편으로선 ‘가만 있어봐 이게 뭔 조화야’ 할 새도 없다. 

부르르 떨며 앞발을 긁고 있는 말과 흥분한 사냥개들의 소란에 혼이 빠져 “어 어” 하며 말안장에 걸터앉아 어딘지도 모르는 사냥터로 내달린다나.

서로 뒤질세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즐기던 사냥이 끝나고 거나하게 좀 뒤풀이를 해 볼라치면 옷고름 입에 물고 “서방님 진지 드소서.” 한다니 정신이 없을 법도 하긴 하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구경중인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제 짝을 발견하지 못한 비켜 선 기질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란 사람은 언제고 그 짝을 발견하기만 하면 얼른 챙겨선 있어야 할 자리에 쟁일 것이다. 

그러니 남편은

 세상여행 마칠 때까지 권태기 맛 한번 못보고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나를 황망히 쫓아다닐 것이고

 고향의 봄과 늴리리 맘보가 섞여 심긴 내 맘 밭떼기로

 동풍이 불지 서풍이 불지, 임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노릇이라.

이래, 난 죽을 때 까지 썸 탈거다. 어쩔 수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