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살던 곳에는 대나무 비탈과 어른 키를 넘는 병풍바위와 느럭바위를 잇는 새미가 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쓸리고 닦였던지 매끄럽기가 차돌 같던 새미라.
사람들은 모양대로 호박새미라 불렀다.
호박 새미는 학교가 파한 동네아이를 다 품을 만큼 넉넉했다.
이 바위에다 황토 돌을 문지르면 새미 물을 타고 노랗게 번져 흘렀다.
과함도 박함도 없이 바위 위를 흐르는 물길을 찰박이다 맨발로 막아보다 하던 아이들은
대나무 잎으로 배를 띄우기도 했고 소꿉 밥을 짓기도 했다.
새미를 지나쳐 가노라면 소나무와 잡목이 보기 좋게 아우러진 산으로 이어졌다.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이라는 아름다운 산임에도 넓고 평평한 바위들이 우거진 숲 아래 군데군데 드러나 있었던 걸 보면 그 산은 한 많은 여인 마냥 커다란 돌덩이들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호박새미는 아이들이 대책 없이 퍼내는데도 매운 시집살이 눈물처럼 마르지 않았다.
설령 서러운 눈물이 고인 새미라 할지라도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웠다.
내치는 법도 없고 맨발로 비비고 문질러도 아이들의 보드라운 발바닥에 생채기 하나 만들지 않았다.
천년에 한번 열리는 대나무 열매와 상서로운 물만 마신다는 봉황이 머물기에 딱 좋은 대나무 숲은 새미 건너편에 있었다. 아득한 옛날에 하늘을 날던 봉황이 호박새미 물로 목을 축이는 것을 본 사람들이 급히 심은 대나무 숲인지
봉황을 기원하며 심겨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언제부턴가 정체모를 중노인이 봉황은 간데없는 산자락에 홀로 살기 시작했다.
움막 주변을 일구어 자급을 딱히 하는 거 같지도 않고 마냥 집에 머물지도 않았지만
그가 어디로 갔던 마침내 돌아오는 귀착지인 것은 분명했다.
어른들의 주의가 아니더라도 착한 아이들은 호박새미 너머로 벗어나지 않았다.
외딴집에 대한 호기심 정도는 뜨내기에 대한 편견에 가볍게 눌러져 중노인은 아이들로 부터도 관심너머에 있었다.
게다가 호박새미는 푸근한 젖엄마처럼 아이들이 새미 가를 떠나지 않도록 철철이 재미를 주었다.
중노인은 소리없이 마을 사람들과 어정쩡한 동거를 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을은 그로 인해 술렁거렸다.
그가 많은 날을 기괴하게 사는 까닭이 비 때문이라고들 했다.
비오는 날이면 대나무 숲에 들어 앉아 구슬프게 퉁소를 불었기 때문이다.
맑은 날에도 그가 대 숲을 사랑했는지는 모르지만
흐느껴 우는 듯이 애원하는 듯 한 퉁소소리는 비를 업고 온 마을을 안개처럼 덮었다.
어찌 들으면 옆구리가 끊어지듯이 참다 토하는 사내의 울음 같다고 했고
더러는 처연히 떠나는 임의 버선에 얼굴을 파묻는 여인의 애절한 호소 같다고도 했다.
노인들은 어린 아이를 땅에 묻고 고개를 넘는 어미의 간장이 끊어지는 소리라고 했다.
청상과부의 모진세월을 살아낸 민대감 댁 외동아씨는 비오는 날이면 검버섯 핀 손으로 장죽에다 꾹꾹 담배를 채웠다.
열린 방문너머로 흙냄새를 맡던 나는 구슬픈 퉁소소리를 피해 구들장에다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렸다.
그리곤 장죽을 빨다
“염병에 가솔을 다 잃은 게지…….” 하며 나즈막히 내뱉으시는 할머니의 혼잣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비가 그치면 소리도 그치고 그는 그의 자리로 마을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마을사람 누구도 그를 반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청승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 소리는 어린 나조차도 울먹이게 만들어 비오는 하굣길에는 할머니가 마중을 나왔다.
그가 그림자처럼 섞여 사는 동안 누구와 다투거나 해코지 한 적이 없음에도 나는 비 오는 대숲 앞을 지나고 싶지 않았다. 온 숲이 합창하는 듯한 묵직함과 소리 구멍을 틀어막는 듯한 안간힘의 퉁소소리가 비에 뒤섞여선 처벅처벅 발목을 감았기 때문이다.
서러움을 처연히 내밭기도 하고 꾹꾹 눌린 한이 제 무게를 못 이겨 삐져 나오는 듯도 한 짙은 상실의 소리는
아이의 연한 가슴이 감당하기에 몹시 무거웠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으며 부러 눈을 아래로 고정시키는데도 대 숲 사이로 희끗한 그의 베옷이 보이는 거 같아
나는 할머니 옆구리에 바싹 붙어서 삐딱 걸음을 쳤다.
사람들은 그가 통이 크고 품이 느슨한 흰 옷을 차려입고 대나무 숲 속 바위에 앉아 퉁소를 분다고들 했다.
개중에는 그에게 가끔 식 거리를 주기도 했고 그도 생소한 것으로 보답하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외지인으로 머물렀다. 그러다 날이라도 꾸물거리면 으레 마을은 퉁소소리를 기다리며 넋두리나 한숨을 쉴 채비를 했다.
어느 날 간단히 길을 나선 그가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아 마을과 사람들은 영영 그의 퉁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대 숲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그의 움막이 있는 산자락을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다.
기인이라느니 소리의 명인이라니 한 많은 양반가 자손이라느니 하는 얘기들이
빗줄기를 헤집고 이 집 저 집을 돌며 보태지고 채색되어져 갔다.
이야기의 서두는 봉황이 머리를 두던 자리에 퉁소쟁이가 밤새 집을 지었는데 로 시작되었다.
그의 퉁소에 짜증을 부리거나 혀를 차던 사람들마저 그를 그리워 한 것을 보면 기실 그는 기이한 뜨내기로 와선 슬그머니 마을의 대리곡사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울고 싶으나 울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마른 새미가 다시 고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호박새미 가의 아이 마냥 흐르는 눈물을 찰박이며 더러워진 발을 씻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을은 이심전심으로 그를 품어주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퉁소의 빈 내장을 후비고 나온 그의 회한을 비 줄기로 눌러서 죽림에다 풀어놓으면
소리는 잘려진 제 몸통을 찾아 숲을 헤매며 애끓는 곡을 한다.
그러면 우는 법을 잊었던 사람들이 밭을 갈다 불현 듯 허리를 펴고 봉황이 날아 간 하늘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도 사람의 소유가 된 적이 없는 묵묵한 땅위에 거저 잠시 머물 뿐인 인생을 보았을지 모른다.
그는 떠나면서 그의 퉁소소리를 대 숲에 남겨주었다.
그래서 남겨진 소리는 여전히 대리곡사가 되어 마을 사람들의 잊힌 기억을 훓고 순한 성정을 찾아서 가슴을 뒤적였다.
이런 연유로 근본도 모르는 퉁소쟁이를 마을 사람들이 오래동안 그리워했던 게 아니었을까.
아이가 자라 퉁소쟁이의 나이가 가깝도록 까지 비 내리는 대 숲을 서성이는 걸보면
그가 숲에만 소리를 남긴 게 아니라 어쩌면 비에다 묶어두고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4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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