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세월의 무상(無常)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숫자적 의미의 ‘10년’이기도 하고 시류 적으로 하나의 매듭이 지어지는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기도 한다. 

서해안 자락이 땅이 된 거나, 뽕나무 밭과 허허 농지 강남이 빌딩숲이 된 것도 이 ‘십년’이 풀고 묶은 요술이다. 

“예전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흉인데 요즘은 멀쩡한 사람이 스스로 개 엄마라니 개를 자식이라 하니 세상 참…….”

이라는 노모의 말도 이 ‘10년’이 개란 동물에게 부린 요술을 따라가기에 숨 가쁜 푸념일 것이다. 

이는 딱히 사물이나 생명체로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말도 그렇다.

“너 에지(Edge)가 있니?” 유명 휴대폰의 광고 문구로 쓰이던 말이다. 

톱스타의 비결이 에지라 하고 하물며 성형도 에지 있게 해준다면 소비자의 마음을 흔드는지 

턱을 살짝 든 앙큼한 여인을 매단 전철이 ‘나는 다르다 에지가 있으니까’ 라며 하루에도 수십 번을 오간다.

터무니없는 부조화까지 나도 에지라고 우기는 것을 보면 에지는 예쁜 얼굴에 파인 볼우물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고 마음 어딘가로 자맥질해 들어가는 물방울 같은 대세의 느낌표인가 보다.

에지라면 각이나 모서리가 아닌가! 내게 ‘모서리’는 위험을 알리는 빨간 등 같은 것이었다. 

어른들의 수저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리던 밥상 앞에서 처음으로 배운 규칙이 어디서든 “모서리에 앉지 마라”였다. 

소리 없이 음식을 먹으라든가 입안의 음식을 보이지 말라는 것들은 

중요성을 떠나 일단 식사 중에야 발효되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모서리는 서로 방향이 다른 면이나 선, 물체가 만나는 교차점이고 종착점이다.

역학적으로 기와 기가 상충한 채 머무는 곳이고 물리학적으론 각의 날카로움이 있다. 

생리학적으로 보자면 불편한 자세로 인한 소화 장애의 우려가 있다. 

인문학 상으로도 역설적 거리감이 있는 아무튼 튀는 장소이다. 

이런 타당한 이유들이 한마디로 뭉텅 거려져서 복이 달아나는 곳이 모서리이다

그런 내게 모서리가 실존적 유기체로 다시 나타난 것은 첫아이가 태어난 얼마 후였다. 

신참 엄마들이 그렇듯이 좋다는 것들을 무작위로 쏟아 붓느라 

겨우 나랑 눈이나 맞추는 아이를 위해 80권짜리 전집을 샀다. 

총천연색 두꺼운 광택지로 만들어진 책은 외판원의 권유가 없었더라도 모든 잠재력의 물꼬를 열어 

내 아이의 지, 정, 의를 만개시키고 마침내는 홍익인간으로 성장시켜 줄 거 같아 보였다. 

그런데 기다리던 책을 받은 내겐 엉뚱하게도 모서리부터 보였다. 

겉장은 8개 속장은 4개씩의 모서리를 80권은 빠짐없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내 아이의 여린 피부를 노리는 잠재적 범죄자였다. 

조그만 망치로 두드리고 문지르고 애기용 크림으로 마무리하기까지 모서리들을 일망타진하곤

 정작 아이를 안을 수조차 없는 통증에 시달렸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모서리와의 전쟁은 가구들로 이어졌고 

새 가구의 귀퉁이들은 우스꽝스럽고도 색 바랜 둥글이들이 되었다.

벼르고 산 남편의 각 잡힌 가죽가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밤사이 3대째로 내려온 유서 깊은 가방으로 변해버렸다. 

남편은 아직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아이가 부모가 잠든 밤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서재로 저벅거리고 들어가선 가방모서리에 고꾸라지는 상상을 억지로 해야 했다. 

그에 더해 각을 잃고 힘없이 짜부라져 있는 가방 귀퉁이들을 품위라고 세뇌 당했다.

내가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자 

불가시적, 부정형으로 한층 진화된 관념적 모서리에 대한 2차 경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튀지 마라” “모 나게 굴지 마라” “모 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들은 

다수와는 조금 다른 주파수를 가진 나를 몹시 긴장시켰다.

내 안의 ‘각’들이 발각되지 않도록 부단히 애를 썼다.

‘각’을 어쩌면 주거지역 주민 자격쯤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10’년이 마침내 채워진 건지 빨간 ‘각’들이 어느 날 고혹적인 보라로 변해 동시 다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주지 밖으로 내몰렸던 ‘각’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이 별이 되어 속속 귀환했다.

자신을 강아지 엄마라던 여인과의 대화를 잇지 못해 황망해 하던 노모는 매번 동일한 표정으로 그 별들을 보실 것이고 나도 얼마간은 노모의 얼굴로 그 별들을 보았다. 

날개가 되어 별들의 어깨위에서 위용 있게 펄럭이는 힘 찬 ‘각’들을 보자 

긴 숨바꼭질로 지친 내 ‘각’들의 파리함이 생각났다.

이제야 겨우 숨을만한 곳을 찾았는데. 이제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어쩌라고……. 어쩌라고.

이미 술래가 떠나버린 어스름 저녁에도 내 ‘각’들은 익숙한 가락에 맞춰 습관적인 숨바꼭질로 휘청 이고 있었다.

 “꼼-꼼- 숨겨라 꼼-꼼- 찾으라. 벼룩이가 물어도 꼼짝 말아라. 빈대가 물어도 꼼짝 말아라.

저기 저 멀리 숲 속 어딘가로, 

잎사귀들 끝을 밟고 내달리는 바람이

키 큰 나무 뒤 숨겨진 작은 연못 속까지 급하게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술래가 떠난 소식 다 전하고 나면

머리카락 보일세라 꼭꼭 숨어있는 내 ‘각’들에게도

네가 이제는 날개란 소식 전해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