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의 밤

비가 옵니다.

긴 밤을 헤메이다 말고 귀를 기울입니다.

한번 내달리기 시작한 빗방울은 잠시도 지체하는 법이 없으니 어둠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붕은 없으나마 넉넉한 툇마루라도 가진 내게 이런 밤은 한없이 행복합니다.

무슨 이름으로 제 아무리 달음박질쳐본들

이 비가 내 툇마루에 머무르지 않고는 지나갈 재간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나는 누런 상복을 입고 처연히 드러누운 내 툇마루의 적삼목들을 봅니다.

땅의 사람이 하늘로 감인지 하늘 사람이 흙이 됨인지 적삼목은 말이 없습니다.

세찬 빗줄기는 내 툇마루에서 찰 비가 되어 뭉그러지다 마침내 눈물로 흘러내립니다.

상주의 거친 삼베 깃을 처벅처벅 적시며 후드득하고 떨어집니다.

저 위 어디인가 큰 강이 구비치는 가 봅니다.

그리움에 불타버린 마음들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그마저 더운 바람이 되어 마른 땅을 헤맬 지경에서야 열리는 조율의 물길입니다.

남겨진 사람들이 황폐한 땅위를 서성입니다.

그러다 하나 둘 갈라진 바닥에 몸을 엎드리고 

얼굴을 모로 한 채

손바닥으로 땅 먼지를 쓸며

마른 입술을 달싹입니다. 이제 그만 되었다고.

부르튼 입술가 허연 가시랭이로 흐르지 않는 눈물내가 흙먼지로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하늘 강은 물길을 돌이켜 바닥을 쓸어내고 닫아두었던 곳들을 급히 여나봅니다.

그 강바닥 어느메에 시간과 미움을 그르는 채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문은 강바닥 어디 즈음 촘촘한 채망 위에 얹혀있습니다.

하늘물길이 출렁이며 빗장을 밀어제끼고 채망 위로 쏟아집니다.

땅의 시간과 슬픔을 그른 채망은 굵은 물줄기를 칼칼히 자릅니다.

이런 연고로 비 오는 날이면 서둘러 우산을 접습니다.

불에 댄 듯 그을린 가슴 안으로 

얼척없는 용서가 추적추적 미움을 씻어냅니다.

살바람 소소리바람에 휘청 이다 말라터진 마음이 난데없는 국화 향을 피워냅니다.

후회와 그리움이 꽃내음을 쫓아 엷게 날아가고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라진 시간을 타고 돌아옵니다.

미움도 젖다가 젖다가 씻기워 지며 그마저도 사랑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흙 위로 심장을 포갰던 이들은 

엎드린 채 남은 힘을 모아 녹슨 빗장을 빼어냅니다. 

차마 그리워하지 못한 것들과 마땅히 그리워해야 할 것들이 그 곳에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과 그럼에도 잊히어 가던 것들이 버팅기다 한 발을 끌고 한숨을 내쉬며 절룩입니다. 

성긴 마음 막 아래 연한 숨소리를 따라 하나씩 그 손잡아 일으킵니다.

한 번에 하나씩입니다.

지금 하늘 문이 열렸으니 지체 없이 남은 빗장마저 뽑아냅니다.

그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제 처지를 아는지라 여전히 몸을 숨기지만

비가 오니 그도 괜찮습니다. 

그에게도 조용히 다가갑니다.

채망에 걸러진 하늘 강물은 용서와 관용일 뿐입니다.

뭉그러지다 서로 얼킨채로

기둥을 붙들고 내리는 빗물처럼 

비오는 날이면 손잡아 일으킨 모두가 부둥켜안고 한 몸으로 흘러내립니다.

그렇게 사랑이 되어 갈라진 땅위의 마른 호흡을 적시웁니다.

따뜻한 꽃눈이 햇살 위로 펑펑 쏟아지고 매화꽃 아래 수국은 미친 듯이 피어납니다.

모닥불 겨울강가에서 어른들은 

언 몸을 녹이고 

두꺼비 같은 손으로 두꺼비집을 짓는 아이들의 등짝을 여름 땡볕은 사정없이 구워댑니다.

하늘에는 밤낮으로 

하늘 강 물안개가 은하수로 흐릅니다.

푸른 돛단배는 견우와 직녀를 싣고 하얀 은하수를 가르며 별보라를 만듭니다.

그 별 하나 떨어져 두꺼비집 앞마당에 뿌리를 내리면 

하늘에 닿을 듯 무지개다리가 돋아납니다. 

실한 아침햇살 두 줄기 뽑아내어 무지개 허리춤에다가 꽁꽁 묶은 아이들이 그네를 뜁니다. 

한 놈은 앉았고 

한 놈은 선채로 

낮달을 잡아보려 엉덩이를 뒤로 빼선 힘차게 다리를 구르면

바람도 긴 그네 줄이 능청이도록 아이 등을 밀어줍니다.

목을 꺾어 응원하던 동무들도 빗줄기를 사다리삼아 무지개에 오르느라 너나없이 야단입니다.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의 엉덩이는 비 속에서 알록달록한 일곱 빛깔로 물들어 갑니다.

무지개를 밟고서 서 까치발을 해볼 양이면 하늘문 고리가 잡힐 듯도 싶지만은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이 비가 그치기 전에 조율되어야 할 것이 아직 남은 까닭입니다.

곧 하늘 문이 닫히고 

이 비가 그칠지라도 

지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비가 되어 온 세상으로 내려앉은 것들과 함께 열락의 무아지경 속으로 그저 끝없이 날아오를 뿐입니다. 

저 만치서 새 날이 채비를 합니다. 

비가 오는 까닭입니다. 

나를 실은 이 밤은 더 깊은 비속으로 조각배처럼 표류합니다. 

나는 돛대마저 접고 하염없이 이 비를 맞아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