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

나는 꽤나 오래 떠나 있었던가 보다. 

친구로부터 반가운 전화가 왔다. 

가을이 가기 전에 꼭 같이 가고 싶다는 맛 집은 

신촌의 어느 빵집과 같은 이름이었다. 

무에 그리 맛난 것이 그곳에 있을까 싶은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주소는 뜻밖에도 평창동이었다. 

문득 대학 동기가 생각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집이었다. 

평창동의 한 언덕에 당당히 서있던 대문과 

짓다 만 듯이 썰렁하던 안채가 묘한 부조화를 빚어내던 집이었다. 

그 때의 강한 인상 때문인지 

평창동의 큰 대문들을 지나칠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안의 모습을 내 맘대로 의심해 보곤 했다. 

이 의심은 그 후 한 프로젝트를 위해 평창동 골목골목을 다닐 때까지 이어졌다.

평창동 어디에 그리 맛있는 식당이 생겼을까.

평창동을 향한 내 터무니없던 오해도 다시 한 번 즐겨볼 겸 

모처럼의 가을맞이도 할 겸해서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일부러 비탈 입구에서 내린 나는 

약도를 따라 언덕배기를 좀 걸어 보기로 했다. 

아수라장 같던 매미소리가 하루아침에 멎나 싶더니 길에는 낙엽이 수북하다. 

가을이 아니었다면 

나무가 이 많은 잎사귀들을 만들어 내는 수고로 

한여름을 보냈다는 것을 

무심한 나는 몰랐을 것이다. 

가을도 어느새 늦가을이었다.

많은 것들이 되돌아가는 시간이어선지 가을은 유난히 짧게 느껴진다. 

철새도 제 곳으로 돌아가고 

우리네 마음도 지나온 길 어느 곳으론 가 문득 돌아가 있는 계절이다. 

돌아오는 길은 늘 가깝지 않은가. 

늦가을의 칼칼한 바람에 휘감긴 평창동의 비탈에는 택시 기사의 말대로 작은 화랑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북악산, 인왕산, 북한산의 연봉이 둘러서서 피워 올리는 불꽃, 

문필 봉 형상이라는 평창동이 

진즉 그림쟁이나 글쟁이의 터가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 모른다. 

강남 어디서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3층 건물이 

턱 하니 산을 가로막고 어색하게 언덕에 앉아 있었다.

저 식당이 지어지기 까지 건축 주와 건축가 사이에 논쟁이 꽤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인간의 이기심이 둘 중 하나를 혹은 둘 다를 손쉽게 이겼는지도 모르겠다. 

비탈길을 오르자 그림들이 저마다 말을 걸어대니 

얹잖아 진 마음은 접어두고 호사나 좀 누려보기로 했다. 

게다가 나는

본 적 없는 작가의 모습과 목소리까지 맘 내키는 대로 상상해 보기 좋은 망중한의 계절가운데 있지 않은가.

나만의 재미에 푹 빠져 유심한 듯 무심한 듯 걷고 있던 내 발목을 순간 붙잡은 것은 

이음새 없는 통 창에서 뿜어져 나오던 서늘함이었다. 

족히 100호는 더 됨직한 작품은 

귀퉁이 어디쯤에 있을 화가의 이름을 볼 필요도 없이 낯익은 그림이었다. 

깊은 푸름의 그림. 

무언가로 어깨를 감싸고 싶게 만들던 낯익은 서늘함이 거기 유리 벽에 갇혀있었다. 

기쁨이던 슬픔이던 사랑이던 이별이던 이 화가의 붓 끝에서는 죄다 초겨울 새벽달이 되었다. 

꽃도 노인도 깊은 고요에 잠기고 푸른 새벽의 처녀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얼굴을 통 창에 대고 뻔 할 화가의 이름을 확인 해 보았다. 

S화백은 여전히 십 수 년 전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 서늘한 푸름은 그의 안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캔버스를 물들이는지도 모른다.

S화백과 내가 처음 만난 곳은 학교의 어느 빌딩 복도였다.

그와 나의 작업실은 달랐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종종 마주칠 수 있었고 우리는 종종 마주쳤다. 

그는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언제나 나를 넉넉한 마음으로 대해 주었다.

나 또한 까탈스럽고 고집스런 그의 편애가 마음에 들었었다. 

청솔 같던 그가 인생의 중턱에서 곤혹스런 시간을 지내다 순식간에 궁핍으로까지 이어졌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그를 보며 

나는 어느 날부턴가 중개인을 사칭해 그의 그림을 사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를 내가 얼마 동안이나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꾸준히 그림을 사들였다. 

그러나 중개인을 사칭한 대가로

S화백의 그림들은 한번 내 집 벽에 걸려 보지도 못하고 

그 곳을 떠나 올 때까지 서재 뒤편에서 등을 돌린 채 포개져 있었다. 

그가 추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무심히 그의 곁에 머묾으로 내 우정의 작은 의리를 지키려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샀지만 

그 때도 그 이후에도 

우리의 거래가 그에게 정작 도움이 되었는지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때 그는 도움이 절실했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기에 그랬다. 

그의 그림은 그때도 나를 서늘하게 했다. 

작은 하트들이 만발한 꽃나무도 그랬고 문짝만한 캔버스 속 여인의 옆 선도 그랬다. 

하물며 여름 바다도 서늘했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나를 11월 속에 가두었다. 

어느 날  S화백이 

가격 흥정을 하는 법도 없이 자신의 그림을 사간다는 그 수집가를 만나고 싶다고 해 날 당황케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직장이 생겨 급히 떠났고 

나도 그 이듬해 그 곳을 떠남으로 우리의 거래와 함께 내 고민도 다행히 끝이 났다.

그 화랑의 입구에는

S화백의 단독 전시장이라는 깔끔한 포스터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술계를 대표하는 중견 화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그의 직장이

 평창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피카소보다 내 그림이 더 낫지 않냐며 해 맑게 웃곤 하던 그가 

그 후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확신 하건데 

그는 십 수 년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 일 것이다. 

무슨 불한당 같은 운명에 치여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왜냐면 

내 앞의 그림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라고.

서둘러 식당에 들어서니 친구는 이미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창 너머 그의 그림이 있음직한 곳을 힐끗 보니 여전히 푸른빛이 감도는 거 같기도 했다. 

식사 내내 정갈한 음식들이 한 젓갈씩 담겨져 부지런히 상에 올랐고 

우리는 요리사를 감동시킬 양 그릇들을 비워냈다. 

사실 양이 너무 적었다.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운 친구와 나는 

오늘은 내 부르주아적 사치로 남은 밤을 채워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두르고 앉은 담요 위로 별을 이고  

약간의 한기 속에 나누는 벗과의 담소가 왕후장상 부럽지 않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마침 비탈 길 옥상에 야외 와인 바가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포실한 담요까지 준다는 매력적인 그 옥상은 푸른 그림 맞은편 쯤 있어 보였다.

검정 줄무늬가 있는 빨강 담요라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포실한 빨간 담요를 두르고 

벗과 함께 가을밤을 맞다가 

서늘한 기운이 깔린 푸른 비탈길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달콤한 로제와인을 홀짝이며

S화백의 기분 좋은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어볼지 

이젤을 향해있을 S화백의 어깨를 느닷없이 두드려볼지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 후 내게도 몇 가지 일이 생겼었노라 궁색한 변명을 해 볼지도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결정해야겠다. 

문필봉 위에 걸린 가을달이 

평창동의 큰 대문들과 

유리창 안에 갇힌 푸른 그림을 

환히 비추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