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로 족하면 지인이요

신의와 소통이 흘러야

비로소 나는 

그를 친구라 부른다.

얼마 전 한 날 

사(巳)시에 

두 여인이 

집에 오기로 했다.

12진법 시간대가 벅찬 

한 여인을 만나려면

진 (辰), 사(巳), 오(午), 미(未), 중 한 시(時)를 고를 수밖에 없다.

설령 이 모임이 

그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시간은 ‘불시(不時)’ 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지만

불시에 만나도 좋을 사람은 혈육이거나 은인이고

그 외는 마음이든 뭐든

매무시를 가다듬을 조금의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게 사람이란

근거 없는 설렘이고

기대를 품게 하는 경이로운 존재다.

가끔 약간은 무모해 보이는 모험을 감행 하는 이유도

어눌한 내 마음이 사람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내게 말해주는 까닭이다.

이 여인의 일 년은

열두 달이 아니라 사계절이라

“우리 다음에 또 봐” 라고 해봐야

춘, 하, 추, 동중의 기약인 걸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어떤 해는 하절기와 동절기로 착 접는데도

그리 거슬리지 않는 것을 보면

내 안 어느 구석에도 

시간 전의 원시적 유유자적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다른 한 여인에게 시간은

분, 초 단위로 쪼개져서 흐른다.

우리 오전 9시 49분에 만나자고 한다면

49분에 가까운 49분이야

50분에 가까운 49분이야

좀 명확하면 좋잖아 투덜거리며

체념하듯 Ok 라고 할 사람이다.

이런 연고로 이 둘은

맞대면해서 앉는 것 보다는

둘은 나란히 앉히고

맞은편에 한 사람이 앉아야

직렬적 기의 흐름이 병렬로 구비 돈다.

그 날도 세 여인은 한 시간의 간격을 둔 후에야 마주 앉았다.

사(巳)시란

아내와 엄마인 여인들에겐

마침내 혼자가 되어보는

황금 같은 시간대이다.

무어든 한잔씩 들고

어제 얘기,

옆집 얘기,

글쎄 알고 보니~로 깔깔대며 일상을 털고

자신이 자신이란 걸 스스로에게 확인해 주며 우쭐하는 시간이다.

압력솥이 시끄런 소리로 한 김을 빼며

안으론 능청스럽게

마지막 뜸을 들여 식구들 먹일 준비를 하는

뭐 그런 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 셋은 모이면

그야말로 일초를 아껴가며

바로 진담 베틀로 들어간다.

분기별이나 계절별로 보는 얼굴들인데다

한 여인이 ‘미(未)’ 시의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잊었던 급한 일이 생각날지

그녀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인간으로 사는 감회나 단상들을 뭉텅뭉텅 던지며

우리 사이를 흐르는 갓 딴 버섯 같은

밍밍한 듯 싱그러운 자유와 암묵적 신뢰를 향유하고 있었다.

세상사 짊어진 보따리가 작지 않은 여인이

종교를 가지고야 마침내

평화를 찾았다고 했다.

모두 숙연해졌다.

그랬더니

만사형통의 복락이 찾아와

이 후 쭈욱 잘 살고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만

별 변한 거 없이 그대론데

그것들이 퍼즐이 되어 꽤 수긍이 가는 그림을 만들더란다.

그 뒤론 쓰면 쓴 채로 그냥 삼켜진다고.

그 종교만이 주는 해답일진 모르지만

이 여인에겐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고개까지 끄덕이며

참으로 잘했노라 격려가 절로 나오고

그녀가 자 이제 기도합시다 해도

고분고분 손이 모아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그녀가 경전을 읽다가 고민에 빠졌단다.

이거 말고 딴 거 알아봐야하나,

억울해서 울었노라고.

응달 진 골짜기도 이젠 결연히 지난다는 그녀를 좇느라

덩달아 비장해졌던 내가,

거기까지 말하곤 다문 입술위로 가늘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윤회가 없다는 그 종교의 교리 때문 인가...

휙 스치던 생각이 순간 확신으로 왔다.

여전히 아름다운 이 여인은

꼭 만나고 싶은 소년이 있었으리라.

손도 한번 못 잡아서 더 그리운 사람일지 모른다.

이생은 어찌어찌 살아내고

담 생에 새 판 한번 제대로 짜볼라 했더니만

인생 단 한번으로 끝이고

패자 부활전이 없다는 경전의 구절로

다시 못 볼 정인을 향한 그 녀의 안타까운 낭패감이 절절히 느껴졌다.

죽었다던 저를 고친 의사를 붙잡고

이 한 목숨 이제는 남을 위해 살겠노라

은혜를 갚겠노라

눈물 콧물 빼며

제일 험지가 어디냐

내가 가겠노라 하다 갑자기

낯을 싹 바꾸며

표시 안 나게 잘 좀 꿰매시지 그랬냐고

거울을 보며 심각해 하며 타박하는 상황이랄지.

친구들이 배우는 뮤지컬 나도 할 거라고 엉엉 우는 어린 딸의 생떼에

“그래, 껴달라고 해보께” 하는 엄마를 보며 멩멩이 소리로

“근데 뮤지컬이 뭐야” 할 때랄지, 아니면

말이 필요 없는 소통이 주는 카타르시스랄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잠시 후

그녀도 쿡쿡대기 시작했고

한 두 박자 늦게 나머지 여인도 합세해

이게 저러해서지 란 말이 없어도

셋은 허리를 꼬부라뜨리며 눈물까지 흘렸다.

뜻밖의 그 어처구니 없는 웃음은

세 여인을 공중제비 돌리며

어디쯤에 서리서리 덮여 있던 무엇들을

가을 햇살 아래로 퉁겨 올렸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기에 떠난 길이

사막으로 이어졌을 때

신기루라도 되어주던 기억의 편린,

이별할 수도 없는

정인 일 것이다.

순수의 시간 속 사람은

그냥 덮여진 것일 뿐 결코 잊히지 않는다는 걸

어느 날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라고 다 흐르는 것은 아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시간은 사람을 가둔 채 정지해 버리고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법이다.

이상한 것은

그 데굴 웃음이

여인들의 멈춘 시간 속 전구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밝히며

멈춰진 바퀴를 움직이고

펼쳐진 데를 호호 불어주었다.

손자의 작은 웃음이

골 깊은 불화를 어이 없이 종식시키는 거처럼,

나비의 하찮은 날개 짓이

무더운 여름을 끝내버리는 거처럼.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으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적으니’라는

명심보감 한 귀퉁이에 기대어 보노라면

그 아침에 우리는

참으로 우정으로 엮인 사이라고

셋 다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터진 웃음보를 주체 못하는 여인들을 위해

잘 길들인 철판을 꺼내어 김치를 볶기 시작했다.

열에 달궈진 묵직한 철판은

묵은 김치의 얇은 잎사귀를 하얗게 살짝 부풀어 올리다 노릇이 지져대며

여인들을 그 가을 아침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여인들이 펼쳤던 마음을 주섬주섬 거두는 동안,

난 바싹 말려서 곱게 간 멸치와 홍합을 섞어 볶은 김치를 밀치고

밥알을 고들 하게 덖어 설렁설렁 섞었다.

동그랗게 부친 계란 위에

살짝 구운 김도 맛깔스레 얹고 보니

시간이 벌써 미(未)시에 쑥 들어 서있다.

여인들은 자기 몫의 접시를 싹 비우고도

철판은 긁어야 제 맛이라며 바닥까지 훑고서야,

살아볼만한 날들을 함께 할 가족이 있음을 감사하며

새삼스런 설레임으로 떠났다.

속이 텅 비어지게 웃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군자의 사귐은 맑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기가 단술과 같다는데

이 절기 여인들과의 사귐은

꿀과 같이 달기도 하여

그 날 나는 이 말을 꽤나 반추하며 오후를 보냈다.

얘들아 오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