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때 그 닭 말이야, 산에 묻어 준 거. 사람들한테 그 말하면 다들 엄마가 참 좋은 엄마래."
"야가, 야가, 뭐라카노."
오래된 이야기의 진실은 어느날 우연히 밥상에서 밝혀졌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땐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팔았습니다. 종이 상자 안에서 봄 햇살 맞으며 '짹짹짹' 울어대던 노란 병아리는 새학기의 상징이었습니다.
병아리 한 마리를 샀습니다. 애지중지 키웠지만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학교에 다녀오니 죽어 있었습니다. 정말 서럽게 오랫동안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 해 또 다시 병아리를 샀습니다. 이번엔 두 마리 였습니다. 밤낮으로 들여다 봤습니다. 엄마도 병아리가 다시 죽을까봐, 그래서 딸이 죽을 듯이 울어댈까봐 병아리들을 열심히 돌봤던 것 같습니다.
병아리의 노란 솜털은 몸집이 커갈수록 하얀 깃털로 변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마당엔 닭장이 생겼습니다. 엄마 말로는 두 마리 모두 숫닭이어서 새벽마다 울어댔다는 데 기억이 없습니다.
예민한 아빠는 그 울음 소리에 매일 밤 잠을 설쳤다는데 그 기억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노란 병아리가 커다란 흰닭이 된 게 신기한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옆집 언니가 뛰어왔습니다. "너희 집 닭들이 죽어간다"는 말에 깜짝 놀라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수돗가엔 나의 '흰닭' 두 마리가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어릴 때 일이라 많은 기억이 사라졌지만 조각으로 남은 몇몇 순간들은 아직도 또렷합니다. 닭을 봤고, 엄마를 봤고, 그리고 그 시절 네모난 나무통을 등에 메고 동네를 다니며 "칼 갈아요"를 외치던 아저씨가 우리집에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 다음 기억은 엄마와 함께 양동이를 들고 뒷산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양동이 안에는 죽은 닭 두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와 산에 묻어 줬습니다. 나무로 십자가도 만들었습니다. 두 손을 모았습니다.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가게 해달라고, 저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그 곳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다시는 병아리를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엄마 닭 잡은 이야기'는 그렇게 어린 시절 추억의 일부분이 됐습니다.
그날 동생과 엄마와 둘러 앉아 점심을 먹다가 오랜만에 닭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 칭찬을 많이 한다고, 아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데 훌륭한 엄마 뒀다고 한다며 엄마를 치켜세워주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던졌습니다.
"야가 뭐라카노. 잘만 묵더만."
"…."
모든 것이 잠시 멈췄습니다. 엄마만 묵묵히 국에 만 밥을 수저로 뜨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동생과 잠시 멈춤 상태에서 눈이 마주쳤습니다. 길게 이어지던 침묵은 동생이 먼저 깼습니다.
"먹었어? 언니가 그 닭을 먹었다고?"
"무슨 소리야? 누가 먹어. 나, 엄마랑 같이 산에 묻어줬어."
엄마는 옛 생각이 나는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야야, 말마라. 야가 하도 울어싸서 내 닭을 사왔다 아이가."
순간 또렷한 두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수돗가에 있던 닭과 양동이에 있는 닭의 모습이었습니다. 수돗가 닭은 내가 예뻐하던 하얀 깃털도, 붉은 벼슬도, 뾰족한 부리도 그대로 있던 ‘진짜 닭’이었습니다.
반면 양동이에 들어있던 닭은 요리할 때 쓰는 살결이 매끈한 닭이었습니다. 깃털도, 벼슬도, 부리도 없는 '닭고기' 그대로인 닭 말입니다.
엄마의 어떠한 부연 설명도 필요 없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 두 닭이 선명했습니다. 두 장면의 닭이 분명 달랐는데 20여 년이 넘도록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한 닭은 '진짜 닭'이었고, 다른 닭은 '닭고기 닭'이었다는 것을 연결짓지 못했습니다. 두 퍼즐이 맞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엄마는 덤덤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걸 와 산에 묻노. 월매나 정성껏 키웠는디. 그기 유기농 아이가, 유기농. 올개닉이다 안카나. 밥 식는다. 고만 밥 무라."
그때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억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세상엔 몰라도 좋을 진실이 가끔은 존재한다는 것까지요.
그리고 저 역시 엄마가 된 지금은 하나 더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식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다는 것을요.
그리고 또 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 그때 그 닭 키우느라 참 고생했을 것 같습니다. 병아리를 사오는 건 저였지만, 그 병아리를 닭으로 만든 것 우리 엄마였으니까요.
늦었지만 엄마 감사해요. 어린 시절의 참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 - - - - - - -<덧붙이며>- - - - - - - - - -
제가 엄마를 소재로 썼던 글들이 몇개 있는데, 이 글이 무엇보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에요.
엄마가 닭잡은 이야기도 너무 놀라운데, 그 닭을 제가 먹었다는 사실을 20년 지나서 알게됐을 때의 황당함이란, 지금 생각해도 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요. 그래서 이 글은 몇번을 다시 읽어도 그 때의 장면과 감정들이 마구 밀려 온답니다. 저에게는요.
제가 10년쯤 전이려나? 처음에 미씨 시작하고서 이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미씨에 열심히 글 써보기로 한 기념으로 여기에 첫번째 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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