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커피집에서 커피 한잔을 사서 나오는데 반짝, 하얀색 운동화가 빛납니다. 어제 남편을 따라 운동화샵에 갔는 데 제 것도 하나 생겼습니다. 새 신을 신고 기분 좋게 걷는 데 문득 떠올랐습니다.
선물. 선물을 받아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저희 부부는 서로 선물을 잘 하지 않습니다. 실용적으로 살다보니 각자가 본인에게 필요한 것 스스로 사서 쓰는 편입니다. 테니스 채가 좋은 게 나왔다, 스웨터가 필요하다, 이 귀걸이가 예쁘다, 화장품이 필요하다, 이런 말에 대답은 크리스마스에 사, 발렌타인 선물로사면 되겠네로 이어지는 편이고요.
그런데 오랜만에, 예상치도 않게 남편에게 선물을 받고 보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아침 출근길에 말했습니다.
남편이 사준 운동화를 신고 나오니 기분이 좋네.
제가 정말 좋아라 했나봅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사줄 걸. 올 한해 수퍼스타같은 삶을 살기 바래.
남편이 선물한(이라고 쓰지만 사실은 계산한) 운동화 이름이 수퍼스타 였거든요. 어째 신발보다 “올 한해 수퍼스타같은 삶을 살길 바래”라는 남편의 말이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 한마디가 더 좋은 선물이 된 느낌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선물 같았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5년 전 지금 살고 있던 도시로 이사를 왔을 때입니다. 이삿짐을 다 풀기도 전에커다란 소포 박스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아는 동생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동생은 이사 오기 전 살았던 동네 이웃이었습니다. 위, 아랫집에 살았는데 제가 그 동생에 잘해준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대신 언니 밥 먹으러 와요라는 말에 쪼로록 내려가 밥은 많이도 얻어 먹었던,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큰 의지가 되어준, 일하는 동네 언니를 어여삐 여겨 집밥 맛을 자주 보게 해준 고마운 동생입니다.
그 동생이 멀리이사간 동네 언니를 위해 선물을 보낸 겁니다. 크리스마스에 산타에게 받은 선물도 시간이 지나니 잊혀지는데, 그 때 그 동생이 보낸 커다란 박스는 아직까지도 또렷히 기억합니다.
뜻하지 않게 도착한 박스를 한참 넋놓고 쳐다보다, 왠일이래 왠일이야를 연발하며 가위 어딨지 말하고. 가위를 찾아와서, 테이프가 붙어 있는자리를 찾아서, 가위로 그 테이프를 잘라내기까지. 그리고 짜잔 박스를 열기까지, 한 10초쯤 걸렸을까요? 그 시간이 10분보다 길었습니다.
박스의 윗부분을 열고 속 상자에 있는 냄비세트 사진을 보는 순간 참았던 숨을 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날을 떠올리면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 코 끝에 느껴지던 공기, 손가락의 느낌, 심장의 쿵쾅거림까지 모든 감각들이 되살아나 그 순간을 재현해 낼 수있을 정도록 많은 기억들이 또렷합니다.
강렬한 기억은 그 순간의 감정과 함께 머릿속 깊은 곳에 오래오랜 남는다던데, 그날의 그 순간이 그렇게 내 안에 그렇게 남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동생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이렇게 흔하지 않은 순간을 선물해줬다는 사실입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도못한 사람에게, 예상치도 못한 선물을 받아서일 겁니다. 그 선물이 아니었다면 예상 밖의 선물이 선물이 주는 이런 특별한 느낌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겁니다. 물론 박스 안에 들어있던 진짜 선물인 냄비도 지금까지 실용적으로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실용적인 선물로 꼽자면, 우산도 둘째 가라면 서럽습니다. 우산 선물에 얽힌 기억도 있습니다. 제가 평소에 알고 지냈던 큰 회사의 회장님이 계십니다. 전 몇년 전 회사를 옮겨 새로운 분야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회장님의 조언이 필요했습니다. 많이 바쁘신 분인데도 뜬금없이 연락한 저를 흔쾌히 만나주셨습니다.
그래, 무엇을 도와줄까. 회장님의 첫 마디였습니다. 특별히 무슨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새로 시작한 분야가 막막해서, 어떻게 무얼 해나가야 할지 잘 몰라서 조언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맞습니다. 그때 전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것이 막막해서 어떤 도움에라도 기대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도와줄까, 그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 것 같았습니다.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내 손을 잡아주실 분이 계시구나, 확인 한 것 같아서 든든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고 일어서는 데 뭐 좀 줄 것 없나 하시며 회장님이 사무실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거 가지고 가,라며 판촉용으로 만드신 빨간색 우산을 내미셨습니다. 살짝 주저했습니다. 제 차가 빨간색입니다.
회장님 이게 좀…, 괜찮아요. 손사래를 쳤습니다. 빨간 차에서 빨간 우산을 들고 내리는 여자, 생각만해도 우습습니다. 회장님 사실은제 차가 빨간색이에요. 하하하. 웃음으로 무마해보려 했습니다.
그래도 가져가, 튼튼하게 만들었어, 쓰고 다니면서 우리회사 홍보도 많이 해주고. 그렇게 손에 쥐어 주시는데 마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뭐 어떻습니까, 빨간 차에 빨간 우산. 차 안에서 우산 쓰는 것도 아닌데,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년만에 처음만나 첫 마디에 무얼 도와줄까 하시는 분인데, 저도 비오는 날 우산 쓰고 다니며 그 회사 홍보정도는 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받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우산이란 선물이 참 묘합니다. 쓸 때마다 준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해 유난히 비가 많이 왔습니다. 비가 잘 오지 않는도시에 살고 있는데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빨간 차에서 내려 빨간 우산을 펼 때마다 빨간 우산을 주신 빨간 회장님을 생각했습니다.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우산을 펼 때마다 건강하신지 어떻게 지내시는지 속으로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일상에 녹아들고 싶다면 우산을 선물해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자 지갑을 선물해준 동생도 떠올랐습니다. 생각이란게 신기하게도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동생이 미국에 왔고, 우린 신나게 같이 놀았습니다. 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공항 게이트로 들어가기 직전에가방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한국가서 쓸꺼라며 샀던 지갑이었습니다.
언니 니 지갑보니 바꿔야겠더라. 이거 나 쓸려고 샀는데 언니 니 써라.
그렇게 지갑을 던져주고 후다닥, 돌려줄 틈도 안주고, 돌려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후다닥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저 멀리서 손을 막 흔드는데 나는 한 손에 지갑을 든 채 눈만 껌벅껌벅했습니다. 겨우 다른 손을 들어 흔들 수 있을 땐, 눈을 계속 껌벅껌벅이며 애써 눈물을 꾹꾹 참아야했습니다. 그 순간은 떠올리면 지금도 눈끝이 지그시 아파옵니다.
선물이란게 그런 것 같습니다. 꼭 무얼 받아서, 꼭 그게 무엇이어서라기 보다, 그 순간을 함께 선물로 받는 것 같습니다. 물건의 존재보다 그 때의 감정, 분위기, 그리고 그 사람이 함께 나에게 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건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사라지지만 그 순간의 느낌과 사람은 오래도록 마음 속에 남는 것 같습니다.
그런 순간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게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선물해준 나의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여러분들의 삶속에 수퍼스타가 되시는 한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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