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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해피스쿨

아, 아! 아버지 2. 금싸라기 땅을 헐값에 넘기고 Dukhee Choi (Grace150) 2019-11-19  11:41:04

 

         위의 사진은 군관시절의 아버지, 아래는 직장 다니실 때의 동료들과... 가운데 서신 분입니다.


     *이 글을 보시기 전에 아, 아! 아버지 1. 거인의 정원을 먼저 보고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집니다.

       동양화, 서예가 수준급이셨고 노래도  가수 뺨치게 잘하셨던 아버지. 현인, 이미자, 백설희,

       문주란  로 가수들의 노래를 이불 속에서 아버지를 따라 불렀습니다.

        평양 큰 교회 성가대에서 테너 솔로를 하셨고 엄마는 소프라노를 하시다 목사님의 중매로

        맺어지셨답니다. 

       

        축구는 프로급이라 고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동경체대 장학생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당시  일제 점령기라  할아버지께서 강력하게 반대를 하셔서 못가고  대신 간 친구는 후에

       서울에 돌아와서 체육대학(이름은 잊어 버렸음)  교수로 재직하다  학장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작은 할아버지는 몰래 유랑극단을 따라 다니며 연극을 하다 주역인 '호동왕자'역을 맡아 평양의

        큰 극장에서 데뷔무대를 갖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아시고 노발대발. 집안망신시킨다고 집에  

       서 못 나가게 가둬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 때 같이 연기를 하던 분들이 김희갑씨(다른 분은  생각   

        안 나지만...) 유명한  원로영화배우들입니다.

       이 시대에  태어나셨더라면 본인들의 꿈을 마음껏 펼치셨을 텐데...

        두 분 다 시대를 잘 못 태어 나셨지요 

   

    


  아버지는 양 쪽 부모를 다 부양하고 계셨다. 친부모님은 안채에 모시고 처가를 돕기 위해 주안,

  !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훗 날 땅값이 기하급수 적으로 뛰어 많은 땅부자를 배출한 그 금싸라기 땅에 집과 양계장과 꽤 넓은 땅을 사서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셨다.


 외할아버지는 시골생활에 적응이 안되어 걸핏하면 술을 드시고 구불 구불 시골길을 집 찾아 오시다가 넘어져서 다치신 일도 있었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시골로 내려가 같이 생활하던 그 때의 우리는 그저 좋기만 했지만 점 점 연로해 가시는 부모님을 멀리 둔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외동 딸인 엄마를 생각해서 아버지는 주안 집을 헐 값에 파시고 ( 2년 후인가? 땅 값이 폭등함') 우리 집 넓은 뜰 한 쪽에 별채를 짓고 처가 부모님을 모셔 왔다. 그 때는 그 일로 우리 가정이 파탄의 길을 걸을 거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아버지는 양 쪽 부모님을 다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최서방 같은 사람 없어. 아마 크게 복 받을 거야" 친척할아버지들께서 하시던 말씀이 어린 내 기억에도 있다.


 연희전문대학 ( 지금의 연세대학교라고 한다) 을 나오시고 중학생 영어 공부를 봐 주실 정도로 인텔리셨던 외할아버지는 도시로 오시자 고향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사돈이랑 같은 집에서 사위에게 얹혀 산다는 자격지심이었을까? 외할아버지는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친목회 등을 통해 친하게 지내던 엄마의 인맥을 동원해서 자금을 구하고 전망 있는 사업을 시작하려 했던 것이 완전 사기단에게 걸려 든 것이다.

  아버지 모르게 막아보려고 이 돈 저 돈 사채로 막 끌어다 급한 불부터 끄다 보니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수습 불가능이 되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주변 거래처 사장들이 소위 말하는 사과궤짝이다 롤렉스 시계다, 가지고 집으로 찾아와도 단호하게 돌려보내시던 아버지였기에 측근에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장을 그냥 다니면서 빚 정리를 천천히 하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사람들 볼 면목이 없다는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셨다. 엄마의 친목회가 거의 아버지의 거래처 사장부인들이었으니 그럴 만 하겠지. 그래도 돌아 볼 때 아버지께서 하신 일 중에 가장 큰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 모든 도움의 손길을 다 거절하고 재산을 정리하여 빚 잔치를 하고 도시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의 시골로 이사를 갔다. 스레트 지붕에 양계장이 딸린 방 두 개 짜리의 조그만 집. 작은 방은 거동이 불편하신 친할아버지를 모시고 큰방에는 아버지, 엄마 우리 네 자매가 주루룩 서열대로 누워서 잤다.


  원래 섬세하고 자상한 성품의 아버지께서는 매 해 새 달력이 나오면 가족들 생일을 찾아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셨다.


  학교 소풍 때는 일 주일 전부터 싸가지고 갈 것 다 적어서 내라고 하시고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 전날 저녁에 사 들고 오셨다.. 내 기억에 나는 '크라운 산도, 껌 한 통, 사이다 2, 오징어 한 마리, 카스테라, 캬라멜... 그런 것들을 적어 냈던 것 같다.


  잦은 출장을 다녀 오실 때마다 과자며 선물을 한 가방씩 사오셨다.

  그 당시 귀했던 구체관절 인형도 우리 자매들은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시골로 이사 한 후 이런 일들은 없어졌지만 이 때부터 아버지의 이불 속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겨울에는 웃풍이 심하고 온돌 바닥은 쩔쩔 끓었다. 서로 아랫목 쪽으로 가까이 발을 뻗으려 발 싸움을 하며 두터운 솜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고 듣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추억할 만큼 정겨웠고 재미있었다.


  '유끼와 꽁꽁 아라레와 꽁꽁 훗에와 훗데와 즌 즌 즈모르...' 이 동요는 일제시대 때 아버지가 학교에서 배운 노래로 '눈이 내린다 내려서 내려서 땅에 쌓인다'라는 뜻이라고 하신 것이 어렴풋한 기억 속에 있다. 입으로 따라 부른 노래라 발음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노래를 잘하셨다. 엄마와도 교회 성가대에서 만나 목사님의 중매로 맺어지셨다고 하셨다. 테너 솔로를 하셨고 엄마는 소프라노... ㅎㅎ

  출장을 가서 거래처 사장들 술 접대해야 하는 자리에서도 한 모금도 입에 안대시고 노래로 떼우셨다. 딸만 넷인 아버지를 놀리느라 기생집에 가서 하룻밤만 모시면 집 한 채 사준다고 한 방에 넣고 밖에서 문을 잠그는 짓궂은 장난에도 무사히 살아 귀환하신 쑥맥 아버지셨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직장에서도 인정 받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시골집에서 아버지는 우리 식구 먹을 만큼의 조그만 텃밭에 오이 토마토 호박, 가지 등을 심으셨고 신선한 계란과 닭고기는 질리도록 먹었다. 외할아버지 할머니는 언덕 위 조그만 방을 얻어 따로 모셨다. 후일에 아버지의 친구분이 찾아오셔서 같이 아르헨티나로 가자고 권유하셨다.

 

  몇 년 전에 가족이민을 가서 양계장으로 성공한 친구였다.

  우선 아버지만 가서 일 이년 자리 잡은 후에 가족 초청을 하라고 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줄줄이 어린 자식들, 연로하신 양가 부모님을 엄마한테 맡겨 놓고 도저히 발이 안 떨어졌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하신 두 번째 잘못이셨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을 보호하느라 아버지께서 하신 마음고생은 그 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었다.


  *이 후의 글에는 아버지의 이불 속 이야기들이 공개됩니다.

    6.25 전쟁 이후 마을에 남아 청년활동을 하다 일사후퇴 때 죽을 고생하며 남하한 이야기,

    일제시대 때 징용에 끌려가다 일본의 패망으로  포로 수용소에 갇혔다 돌아온 이야기,

    태국의 포로 수용소에서의 돼지 중대장(둥뚱해서가 아니라 돼지를 키워서 ㅎㅎ)

    많이 읽어 주시고 댓글, 공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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