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다

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만나자고 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데 자기 혼자 남겠다고 버티는 중이란다. 

어학연수로 수속을 밟아 같이 가는것은 어떻겠냐고 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하시는 일이 잘 안되어서 부쩍 흰 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가는 아빠와 한숨소리가 잦아진 엄마를 보며

상의 드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한참을 말을 잃고 마주 앉아 있었다.

석 달 동안 거의 매일 민을 만났지만, 끝내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민은 윤지의 손에 미국 주소를 쥐어 주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 섰다.

얼마 후 잘 도착했다는 편지가 왔다. 

민은 뉴욕에서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을 했고 2년 후에 원하는 대학에 편입을 해서 다시 경영학을 공부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서로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조급하게 마음 먹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일기 형식의 긴 편지가 왔다.

은혜도 부지런히 답장을 했다.                                    

IMF가 전국을 강타하여 그렇지 않아도 허덕이던 윤지아빠의 사업체가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났다.

아빠는 임시방편으로 어디론가 잠적을 하고 남은 가족들은 매일 빚장이들에게 시달렸다.

    급한 김에 사채도 땡겨 썼는지 지독한 사채업자 들은 아예 안방 차지를 하고 앉았다.

윤지엄마가 빚잔치를 해서 급한 것만 해결하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기로 타협을 보고 나서야 아빠가 돌아 오셨다. 

대학 2학년의 윤지도 원하던 대학에 입학해서 한 학기를 마친 신지도 일단 휴학할수 밖에 없었다. 

민에게서 방학을 맞아 보러 오겠노라는 편지를 받은것이 그 무렵이었다. 

도저히 그 상황을 알릴 수가 없었다.

집도 가재도구도 쓸만한 것은 다 넘겨 주고 산 동네 쓰러져가는 무허가 판잣집을 세얻어 밤 도망을 하듯 이사를 했다. 

민에게는 그만 헤어지자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다.

아빠는 재기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국내 경제가 워낙 안 좋으니 방도가 없었다.

술에 취해서 늦에 들어 오시는 횟수가 점점 늘어 났다.

몸이 약한 엄마는 사흘이 멀다하고 앓아 누웠다. 뚜렷한 병명도 없이 말하자면 일종의 홧병이었다.

   윤지는 조그마한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적은 월급에서도 매달 얼마씩 은행에서 대출 받은 돈의 이자로 들어갔다. 

   어린 신지 마저도 일일 학습지 방문교사로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다.

   더 이상 인생은 장밋빛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