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키우던 소가 점점 불어나서 30여 마리가 되어갈 무렵부터, 아버지는

냇가나 산에서 베는 꼴로는 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윗말 넘어 걸어서는 한 시간 조금 넘기는 거리에 밭을 얻으셨다.

거기에 겨울에는 유채를 심고 봄이 되면 유채를 베어준 후에, 호밀을

심고, 또 호밀을 베어내면, 옥수수를 심으실 요량으로 넓은 밭을

얻으신 것 같다.



아랫말에서 산 아래 길을 걸어 윗말에 도착하면, 윗말 가장 꼭대기에서

왼쪽 집인 진숙이네를 지나 산길을 따라가면 넓은 밭들이 나온다.

이 밭들을 따라 산속을 지나가면 용암리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밭이었는데, 아버지가 얻은 밭 위쪽에는 포도밭도 있었다.

포도밭 옆으로는 작은 냇가도 있었고 냇가 위에는 시멘트로 다리도

만들어 놓아서 경운기도 지나갈 수 있었다.



밭을 도지로 얻은 그해...

밭은 말이 밭이지 그야말로 돌 밭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그야말로 휑 휑한 들판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방과 후 모두들 산밭으로 가서 돌을 고르는 작업을

하라고 명하셨다. 나와 막내 언니 그리고 셋째 언니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터라 같이 집에 왔는데, 집에 오면 물 한 바가지 마시고

엄마가 만들어 놓으신 막걸리 술빵으로 배를 채운 뒤 아버지의

경운기를 타고 산밭으로 갔다.



두어 시간 돌을 고르고 나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그래도 돌을 고르고 또 고르기를 며칠 동안 하다 보니

어느덧 돌무더기는 여기저기에 돌탑을 만들어놔서

마치 서낭당 같았다. 언니들과 나는 누가 돌을 더 높이 쌓나

그 와중에도 내기를 하고, 높이 쌓아놓은 후 소원을 빌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 아버지는 유채 씨를 뿌려놓으셨다.



봄이 되자 유채는 노랗게 피어나기 시작하는데, 꽃이 피기전까지는

가을철 무밭 같았다. 아버지는 유채를 베어다 소들에게 먹이고

재빠르게 호밀씨를 뿌렸다.

그런데 심어놓은 유채나 호밀... 모두 잘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버지는 다시 밭을 갈고 옥수수를 심으셨다.

그런데 옥수수조차 그다지 풍작은 아니었다.

다시 가을이 되고 베어낸 옥수수밭을 갈아엎은 뒤

소똥을 경운기에 실어 나르기 시작하셨다.

소똥은 좋은 거름이 되어 다음 해에 농작물을 풍작으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했다.



다시 땅을 갈고 아버지는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우선 겨울에 뿌려놓은 유채는 다시 힘차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망가져있던 돌 밭이었던지, 유채는 또다시 실패했다.

이상하게 집 앞에 있는 밭에 심은 유채는 잘 자랐는데 유독, 산밭에

심은 유채는 자라다 마는 흐지부지 유채가 된 것이다.



아버지와 우리들은 다시 땅을 고르고 돌들을 골라내었다.



유채를 갈아엎고 호밀을 심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다.

잠시 쉬었다가 초여름이 되니, 의정부 시장에 가서 이상한 줄기를

사 오셨는데 물에 불린 고사리 같기도 하고... 이파리가 난 것을 보니

고사리는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줄기를 커다란 다라로 두어 다라

사 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들을 불러 모두 산밭으로 갔다.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밭고랑에 괭이로 홈을 파 놓으면 거기에

일정한 간격으로 갈색 이파리를 심어두었다. 그리고 흙을 덮고

물을 주면 끝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고구마였다.

고구마를 한 번도 심어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고구마를 심은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구나 소가 먹을 풀이 아닌 우리들이 먹을...

그것도 김장용 배추나 소들의 김장인 옥수수로 만드는 엔시 레지가

아닌 ... 우리들이 겨우내 먹을 ... 감자처럼 반찬으로도 만들 수 없는

순수한 간식거리인 다디단 고구마를 심었다는 것은 대단한 반전

이었던 것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자, 우리들은 각각 호미를 손에 들고

산밭으로 갔다. 산밭은 온통 갈색 덩굴이다.

아버지는 우리들 보고 각각 한이랑 씩 호미로 고구마를 캐라고 하셨다.

다디단 고구마를 먹을 생각에 우리는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모르고

귀한 고구마에 혹여 호미로 상처라도 낼까 살살 캐내었다.

그렇게 캐낸 고구마를 자루에 담아 경운기에 싣고 우리들은

고구마 위에 걸터앉아 집으로 왔다.

고구마는 맛있었다. 그리고 풍작이었다.

아버지는 고구마를 한 자루씩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구마를 심지 않던 응달마을에 대단한 혁명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맛있게 고구마를 쪄 먹고, 생으로 까먹고

남겨두었다 겨울에 아궁이에 구워 먹거나 화롯불에

구워 먹었다.



아버지에게 왜 올해는 고구마를 심었냐고 물어봤다.

왜 소에게 먹일 것이 아닌 우리가 먹을 것을 심었냐고 물어보니...

아버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 땅은 유채나 옥수수처럼 땅 위에 열매 맺는 것을 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자갈밭이라 무엇을 심을까 생각 중에

씨앗 시장에 물어보니 고구마를 심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씨앗은 땅에 맞는 것을 심어야지, 무턱대고

심었다간 열매도 맺지 못하고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고 하셨다.

좋은 땅에는 무엇을 심어도 잘 자라지만, 그렇지 않은 땅에는

땅의 상태에 맞는 씨앗을 심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때는 어려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척했었는데

지금 나이를 먹고 보니 참 가슴에 와닿는 말씀이 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이들 개개인의 성향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데 남들과 같은 씨앗을 뿌리려 힘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아이들에게서 좋은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아이들의 밭에

맞는 씨앗을 뿌려주어야겠다.

쓸모없던 돌 투성이 산밭에서 귀한 고구마의 풍작을 생각하며

한국 마트에서 고구마 한 박스를 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