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자잘한 집안일은 항상 우리 딸들의

몫이기에, 어려서부터 밥을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혹은 소를

돌보는 일은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다.



응달마을을 둘로 나누어 윗마을은 위에 응달마을 아랫마을은

아래 응달마을로 불렸다. 주소상은 이렇게 쓰지만 언제고 우리들은

윗말과 아랫말로 불렀다.



추운 겨울이라 우리들은 집안일을 마치면 안방으로 가서 따듯한 아랫목에

깔리워진 이불 속으로 두발과 손을 쏙~ 넣고는 언 몸을 녹이기에 바쁘다.



때는 방학이라 언니들도 모두 집에 있었기에 집안일은 훨씬 수월해졌다.



윗말에 사는 진숙이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기에 엄마와 아빠는 문상을 가시고

우리들은 소밥도 주고 우리들 점심밥도 해먹어야 했다.



소밥은 둘째 언니가 주기로 하고, 밥은 셋째 언니가 하기로 하고, 소 꼴은 넷째 언니가

주기로 하고, 쇠 물통은 꼼지가 채우기로 했다. 나는 셋째 언니를 도와 밥 차리는 것을

도와주고 설거지를 같이 하기로 했다.



셋째 언니는 동그란 스테인리스 밥통을 나에게 주며 우물 옆 뒤뜰로 가서 김장김치를

꺼내어 오라고 했다. 안 그래도 추운데 스테인리스 밥통은 얼음장같았다. 손이 시려

옷소매로 감싸고 뒤뜰로 갔다. 김장김치는 아버지가 뒤뜰 상나무 아래에 땅을

파고 내 키만 한 항아리를 묻어두고 두꺼운 플라스틱 비닐봉지를 씌운 후

그 안에 김장김치를 담아놓으면 겨우내 먹고도 남을 만큼이 된다.

배추김치 항아리 옆에는 깍두기도 있었고 총각무로 만든 달랑 무김치는 조금만

담갔기에 작은 항아리에 넣어서 부엌 옆에 놓아두었다.



우선 항아리 뚜껑을 열고 지푸라기를 엮어만든 작은 가마니를 치우고 똘똘 묶어놓은

비닐봉지를 풀어 집개로 김치 한 포기를 꺼내어 밥통에 덜어놓고 다시 묶어둔 뒤

꾹꾹 눌러놓고 옆 항아리의 깍두기도 가져간 국자로 퍼서 밥통 뚜껑에 가득 담았다.

깍두기 항아리 뚜껑을 닫을 때도 배추김치 항아리처럼 똑같이 닫아놓았다.

밥통은 옆구리로 감싸 안고 뚜껑은 두 손으로 들고 우물을 지나 안마당을 지나 토방

으로 한 발짝 올라가면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이 나오고, 문지방을 넘어 계단을

두 개 내려가야 부엌이 나온다.

부엌으로 가져가서 언니에게 주니, 국그릇 두 개를 주며 거기에 덜어 놓으란다.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담아서 작은 밥상 위에 올려놓으니 한상 가득해 보였다.



남은 김치들은 연탄보일러 위에서 김칫국이 되었고 가스레인지 위 압력밥솥은

달랑달랑 칙칙을 반복하며 거의 다 되어간다는 신호를 보내어왔다.

언니가 국과 밥을 하는 동안 상위에 수저 통을 올려놓고 안방으로 가서 밥 먹을

바닥을 걸레로 닦았다. 걸레는 거의 살얼음이 얼어 차가워 저 있기에 방에 들어오기

전에 따듯한 물로 빨아온 것이다. 대충대충 쓱쓱 닦고도 따듯한 걸레가 아까웠는지

방문을 열로 문지방도 쓱쓱 닦고 마루도 대충 쉬리릭 닦은 뒤 마루 구석에 던져 놓았다.



언니들의 일도 다 끝나고 밥을 먹으러 하나둘씩 들어오자, 나와 셋째 언니는

차려진 상위에 국을 떠놓고, 압력솥의 김을 뺀 뒤 밥을 그릇에 펐다.

압력솥의 김을 뺄 때 나오는 수증기에 손을 쬐면 여간 따듯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차려진 밥상을 언니와 내가 같이 들고 방까지 가져가려면, 우선

부엌에서부터 토방까지 두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난 뒤 부엌 문지방을 넘어서 토방을 지나 마루에 상을 내려놓은 뒤

언니와 내가 마루로 올라가고, 마루에서 또 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여다

놓았다. 셋째 언니는 바로 밥을 먹지 않고 다시 부엌으로 가서 압력솥의 밥을

다 밥통에 터놓은 뒤, 누룽지 위에 물을 부어 다시 끓였다.

밥통은 방으로 들고 들어와서 아랫목 이불 아래 묻어두었다.



우리들은 다 같이 밥을 먹었다.

배추김치와 깍두기 그리고 김칫국과 흰쌀밥인 밥상이지만 어찌나 밥이 달고

맛있던지... 우리들은 모두 셋째 언니의 음식 솜씨에 감탄을 하며 밥을 먹었다.

방학 때부터 밥 당번을 하더니 날로 날로 밥맛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이상하게 다른 언니들이 밥을 하면 맛이 별로였는데 셋째 언니의 밥은

정말 맛있었다. 배추김치 쭉쭉 찢어 흰쌀밥에 올려놓고 먹으니, 한 그릇

가득했던 김치는 금방 동이 났다. 밥을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셋째 언니는

다시 부엌에 가서 칙칙 거리는 밥솥의 김을 빼고 뚜껑을 열은 뒤

방으로 가져왔다.



아까 깍두기를 퍼 올 때 뒤뜰에 두고 온 국자 때문에 언니는 작은 밥그릇 하나를

국자 대용으로 가져왔다. 그러면서 이따가 설거지할 때는 꼭 가져오라고 했다.



먼저 밥 푸던 나무주걱으로 압력솥의 누룽지를 긁어내고 뜨거운 밥 물과 섞어서

숭늉을 만들어 작은 밥그릇으로 한 그릇씩 떠서 우리들의 빈 밥그릇에 한 그릇씩

떠주면 그 맛이 어찌나 고소하고 맛있는지 ... 심지어 달달하기까지 하니

요즘의 다디단 서양 디저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기가 막힌 맛이 났다.



이렇게 밥을 다 먹고 나면 상이 치워지는데, 상째로 우물로 들고 간다.

어차피 김치도 국도 싹싹 먹었기에 모두 빈 그릇 들이라 어차피 상까지

우물로 가져가면 편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언니는 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들통에 부어 우물로 가져왔다.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설거지통에 붓고, 꽝꽝 얼은 얼음 물을 깨서

찬물을 한 바가지 뜬 뒤 따듯한 물과 섞어서 설거지물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섞여서 설거지하기에 좋으면 노란색 퐁퐁통에 있는 퐁퐁을

설거지통에 꾹~ 짜준다. 그 후 두 손에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는

두 손을 열심히 물속에서 휘저어 준다. 그러면 거품이 뭉게뭉게 올라오고

그릇들을 다 설거지통에 넣고 쪼그려 앉아 설거지를 시작한다.

셋째 언니는 내 설거지통 옆에 두 개의 설거지통을 더 만들어

내가 설거지를 해서 옆에 맑은 물통에 넣으면 한번 헹구고 또다시 옆에

통에 넣어서 두 번 헹구면 설거지는 끝난다. 깍두기를 꺼낼 때 두고 온

국자를 가져다 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설거지를 다 끝낸 그릇들은

고무 다라에 넣어 부엌으로 가져와 선반에 뒤집어 놓으면 자연건조가

된다.



이렇게 밥을 다 먹고 치우고 나면 저녁때까지는 한가하다.

이때는 언니들과 인형놀이를 한다든지, 사료포대의 속지를 뜯어다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인형놀이를 할 때 언제고 나는 나쁜 놈이고

언니들은 공주였다. 나도 공주를 하고 싶었는데 언니들은 매번 나만

나쁜 놈을 시켜 불만이 많았던 나는 실생활에서도 간혹 나쁜 놈을 할 때가

많았다. 언니들이 나쁜 놈을 하던 나에게 화를 내면 "나도 공주 시켜줘!!

그럼 나쁜 놈 안 할 거잖아!!" 이렇게 따질 때도 있었지만 공주가 되기에는

아직도 멀어 보였다.

그림을 그릴 때는 언제고 공주를 그렸었다.

머리는 올림머리에 왕관은 반짝이고, 눈은 왕방울만 하고 입은 밥도 못

얻어먹을 정도로 작고, 어깨는 얼굴보다 좁은데 간혹 파마머리 휘날려 주는

공주님의 어깨는 아예 없다. 손은 매우 작아 공주의 눈동자 보다 작고, 어깨보다

좁은 허리에 드레스 치마는 풍성해서 양옆 머리만큼 커다랗고, 발은 신데렐라

발보다 작고 구두는 언제고 반짝이는 뾰족구두다.



이렇게 놀다 보니 문상 갔던 엄마 아버지가 돌아오셨고, 소 저녁을 주고

젖을 짤 때가 다 되었나 보다. 옷을 갈아입으신 엄마 아빠는 다시 집안일을

시작하시고, 우리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저녁을 먹을 때도 셋째 언니는 밥을 했다.

밥상에서 아버지는 셋째 언니의 밥을 칭찬하며 흡족한 표정으로

"야~ 셋째는 이제 시집가도 되겠다.. 이리 밥을 잘하니 아주 잘 살겠는걸~"

이에 엄마도 한수 거드시며 "그러게요.. 밥맛이 마치 아끼바리 쌀밥 같아요

호호호" 나는 한술 더 떠 "찰밥 같아요.. 너무 맛있어요~" 그러니 모두들

맞아 맞아 그러며 동조했다.

일반미는 비싸서 차마 못 사 먹고 정부미만 사 먹던 그때 아끼바리 쌀은

구경도 못 해본 쌀인데 그리 칭찬을 하시니 셋째 언니는 부끄러웠는지

"엄마가 압력밥솥을 사셔서 그래요... 제가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솥이 좋아서

그래요 ㅎㅎㅎ^^" 활발한 셋째 언니가 수줍어하니 너무 웃겼다.

엄마는 내일 고사떡을 하러 가야 한다며 누가 같이 갈 건지를 물어보셨다.

언제고 어딘가에 갈 때는 내가 제일 먼저 자원을 했다.

엄마는 그러자고 하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을 드셨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우리는 모두 9시 뉴스를 보며 다 같이 한방에 모여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우리들을 광으로 불렀다.

"야!!! 얘들아~ 너네 여기 있던 찹쌀 못 봤니?"

우리들은 광으로 달려가며 "아니요~ 못 봤는데요?" 그러며 대답을 했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마는 찹쌀이 없어졌다며 오늘 고사떡 위에

찰떡을 해야 하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시며 찾고 있었다.

분명히 쌀 항아리 옆에 작은 항아리에 찹쌀을 넣어두셨는데 깜쪽같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광으로 온 셋째 언니가 "어.... 그 쌀로 밥했는데요...ㅡㅡ"



우리들은 왜 그리 셋째 언니의 밥맛이 맛있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