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에는 빨리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명령이시다.

날씨는 쌀쌀해져서 스멀스멀 온몸이 추워지는데 양팔을 교차로 접으며

몸을 둥그스름하게 모으고는 학교에 간다.



학교 가는 길은 산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가는 길 옆에는 배밭도 있고

꽃밭도 있다. 사실 꽃밭이 꽃밭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꽃밭이라 불리는

이유는 정원수를 키워 파는 집이라 어른들이 그렇게 부른듯했다.

꽃밭 집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또 다른 배밭이 나오는데 이 배밭은 약간 작은

배밭이다. 평지에 있고 관리인은 말숙이네다. 말숙이는 같은 반 친구였는데

배 따는 철 학교가 끝나면 재빨리 배밭 원두막으로 달려와 자기네 배를 지킨다.

혹시 집에 가는 아이들이 자기네 배를 따먹을까 열심히 지키지만

우리들은 그래도 한두 개씩 따먹는다. 그러다 걸리는 날에는 말숙이가

"야!!!"라고 소리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하면 우리들도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그런 다음날은 여지없이 말숙이가 두 팔을 걷어올리고는 어제

자기네 배따먹은 아이들을 찾아 나서지만 그래도 별 소용이 없다는 걸 말숙이도

알고 있었다. 김장철에 배는 벌써 다 따서 없지만 그래도 대롱대롱 달려있는

배는 까치밥하라고 남겨놓은 것들이다.



이 배밭을 지나면 작은 실개천이 나오는데 잘 뛰면 한방에 건널 수도 있지만

실수하면 발뒤꿈치가 물에 빠지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아침에 절대 뛰는 법이 없다. 발뒤꿈치가 물에 젖으면

하루 종일 젖은 신을 신고 있어야 하니 여간 불편하진 않다.

간혹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이 뛸 때도 있지만 그러다 실수를 하면

신을 벗고 맨발로 학교에 가서는 햇볕에 신을 말린다.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공기를 하거나 고무줄을 하자고

하는데 ... 마음은 그렇고 싶어도 늦게 집에 가면 무서운 얼굴을 한 어머니에게

혼쭐이 날 생각을 하면 온몸이 부르르 떨려서 곧장 집으로 와야 했다.

그래도 좀 아쉬우면 혼자서 흔들리는 그네를 대여섯 번 타고 오거나 것도 아쉬우면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학교 건물이 하늘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고는 재빠르게

뛰듯이 걸어왔다. 또다시 산길을 돌아올 때는 못 다 놀은 것이 아쉬웠는지

실개천 사이의 돌다리를 한번 내려보고는 하나뿐인 내 월드컵 운동화를 쳐다본 뒤

한숨을 한번 쉬고 돌다리를 건너 왔다. 다시 고개를 돌려 돌다리를 한번 보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건너온 돌다리를 다시 건너가 낮은 언덕배기를 올라간 뒤

다섯 발짝 정도를 뛰어와서는 실개천을 폴짝 뛰어넘었다.

발뒤꿈치가 살짝 젖었지만... 월드컵 운동화가 다 젖은 건 아니기에 그래도 그나마

만족의 미소를 띤 뒤 집으로 폴짝폴짝 뛰어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우리 집 배추밭을 보니 엄마는 배추를 뽑고 계신다.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 안마당에 놓여있는 자줏빛 고무 다라에 가득 담긴

물을 분홍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한 바가지 떠서 마른 목을 축이고는 배추밭으로

달려갔다.



배추가 좀 자라면 지푸라기로 묶어주는데 이유는

김장용 배추가 벌어져 버리면

김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배추가 어느 정도 자라면

지푸라기 대여섯 개로 묶어주어야만 한다.

이렇게 묶인 배추는 속은 노랗고 겉은 단단해져 달고 맛있는

김장용 배추로 거듭난다.

두 고랑을 다 뽑아야 하는데 엄마는 나보고 배추는

거의 다 뽑았으니 무를 뽑으라 하신다.



무는 내 종아리 보다 훨씬 굵고 실했으며 무청은

내 무릎보다 훨씬 컸다. 무꽃이 피면 무청을 먹을 수 없으니

꽃이 피기 전에 무를 다 뽑아야 한다. 무청에는 작은 가시들이 있다.

엄마가 주신 하얀 목장갑을 끼고 뽑기 시작했는데

한두 개 뽑고 나면 작은 손에 끼워진 목장갑은 자기들끼리 놀고 있다.

엄마는 옆에서 이리저리 장갑을 만지는 나를 보고 피식

웃으시고는 노란 고무줄로 팔목을 고정시켰다.

장갑 탓을 하며 꾀를 내고 싶었는데... 눈치 빠른 엄마 때문에

말짱 꽝이다.



반고랑 정도를 뽑고 나니 허리도 아프고 힘도 들었다.

엄마는 잠시 쉬었다 하라며 나를 부르셨다.

그 사이에 학교가 끝난 언니들도 일을 도우러 왔다. 엄마는 배추 꽁다리를 칼로 잘라

흙을 살살 돌 여낸 뒤 우리들에게 먹어보라고 주셨다. 갓 뽑힌 배추 꽁다리는 너무

맛나고 달달했다. 배추 꽁다리를 두세 개 먹고 나서 셋째 언니가 분홍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한 바가지 떠왔는데 우리는 모두 한 모금씩 돌려마셨다.



엄마는 집안일을 하러 들어가셨고 나머지 무는 언니들과

내가 다 뽑아야 했다. 셋이서 뽑으니 한결 수월해져서

단숨에 나머지 반이 고랑을 다 뽑았다.

다 뽑고 나서는 셋째 언니가 가져온 부엌칼로 무청을

잘라내고 무만 남겨놓아야 했다.

때는 이때라며 언니들과 나는 무를 잘라먹었다.

​

무의 녹색 부분은 달고 흰 부분은 약간 매운맛이 났는데

셋째 언니는 무를 길게 잘라 우리 보고 "이건 바나 나란다~"

그러면서 주면 우리는 마치 노란 바나나 껍질 속의 하얀

바나나를 먹는 양 맛나게 먹었다. 이렇게 잠시 온 뒤 무청을

다시 잘라내어야 했다. 물론 배추 꽁다리도 다 잘라내야 했다.

거의 다 잘라낼 무렵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오셨다.

배추들을 리어카에 하나둘씩 실었고 한 리어카가 꽉 차면

아버지는 리어카를 다시 끌고 집으로 올라가셔야 했다.

집은 밭과 불과 4~50여 걸음 차이이나 오르막길이라

아버지 혼자 리어카를 끌고 올라가시기엔 다소 벅차 보였다.

나와 막내 언니는 아버지가 끌고 가는 리어카를 뒤에서 밀었다.



그렇게 가져간 배추는 모두 안마당으로 옮겨야 했다.

이렇게 서너 번 더하니 배추 200포기와 무 50여 개 정도가 되었다.

사실 무는 더 있었는데 밭에 아버지가 구덩이를 깊게 파서

그곳에 묻어두었다. 김장김치가 떨어질 무렵 봄 배추가

나오기 전 엄마는 이렇게 만들어진 무 구덩이로

파내어 무를 꺼내 무김치를 만들 거나 무생채를 해서 먹었다.

무 구덩이 위는 지푸라기로 덮어놓았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엄마는 소젖을 짜시고 아버지는

소운동장 청소를 하신 후에 내일 소에게 먹일 지푸라기들을

작두로 잘라놓으신 후 무청들을 지푸라기로 엮어

놓으시려 밭으로 내려가 무청을 가져 올라오셨다.



그사이 셋째 언니는 저녁을 하느라 바쁘고 나와

막내 언니는 무를 열심히 씻었다. 손은 시리고 씻어도 씻어도 줄어들 생각을 안 하는지 남아있는 무들은 산더미 같았다.

언니와 겨우겨우 씻어서 소쿠리에 담아놓고 물을 빼면

무들을 모두 안방으로 옮겨 놓아야 했다.



그사이 일을 마치신 엄마는 배추를 반씩 자르고 계셨다.

우리들도 엄마를 도와 배추를 반씩 자르면 엄마는

목욕통보다 큰 고무 다라에 배추를 차곡차곡 뉘어놓고는

거침없이 소금을 뿌린다. 또 그 위로 켜켜이 배추를 올려놓고

소금을 뿌리고.... 이것을 반복해서 하다 보니 배추는 모두

서너 통이 되었다.



아버지도 일을 마치셨는지 부엌 가마솥에서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떠다가 세숫대야에 붙고는 찬물과 섞어 얼굴을

씻으시고 발도 씻은 후 걸레를 빨아 꼭 짠 뒤 마루에 올려놓는다.

엄마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씻으신 후에 우리들도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면 셋째 언니가 차려놓은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으면서 86아시안 게임은 컬러로 본다며

아버지가 시내에서 사 오신 대우 14인치 티브이를 보는 호사를

잠시 누리기도 했다.



상이 물려지면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둘씩 칼과 도마를 들고

"꼭지야~" 를 부르며 들어오신다. 딸부잣집 막내인 내 동생을

끝으로 아들을 바라시는 아버지가 막내의 이름 대신

별명을 꼼지로 지으신 이후 동네 아줌마들은 울 엄마를 부를 때 꼭지네라고

부르신다. 꼭지 때문인지 엄마는 막내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을 낳으셨다.



아줌마들이 대여섯 명 오시면 우리들은 저녁상을 치우고

아버지는 건넌방으로 건너가신다. 엄마는 커다란 다라를

가져다 안방 가운데 놓으시고는 아까 씻어놓은

무들을 칼로 썰기 시작한다. 모두들 한석봉 어머니의

후예들은 지 하하 호호 웃으면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칼질은

계속된다. 나는 그 장면이 어찌나 부럽던지 나도 빨리 커서

아줌마들처럼 탁탁 탁탁 칼질을 하며 이야기도 하며 티브이도

보고 싶었다.



이렇게 썰어진 무채가 두 다라가 되면 마루로 옮겨지고

나머지 무들은 큼직한 깍두기가 되거나 넓적하게 잘라져서

김장김치 사이사이에 넣어지기도 한다.



무를 다 썰고 나면 아줌마들은 막걸리 한 그릇에 김치 한 조각

씩을 입에 넣고는 아줌마들 특유의 웃음인 "아~하하하하하!!!"

이렇게 콧소리 들어간 하이톤의 웃음을

마무리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지쳐버린 나는 아줌마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따듯한 아랫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