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봉이 옅은 분홍 빛깔의 립스틱을 입술에 마악 갖다대려던 찰나였다. 부엌 카운터에 올려둔 휴대전화 벨이 요란스레 울린 것은.

은봉은 립스틱을 손에 쥐고 종종걸음으로 나가서 전화기를 집는다. 그리고 액정화면을 들여다 본다. 선희의 전화가 아니면 받지 않을 참이었다. 그렇잖아도 좀 늦었다. 3,4분 안에 집을 나서지 않으면 상대방을 기다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건 너무 미안한 일이다.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은봉은 잠깐 망설였다. 이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은봉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불쌍한 녀석같으니라고. 은봉은 전화를 받기로 했다.

"으응, 유진이구나....."

"예에.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으럼. 잘 있지. 오랫만이구나.그래, 넌 어떠니? 너도 잘 있지?"

"예......."

예, 하는 대답을 끝으로 전화기 속에선 침묵이 흐른다. 일 하는 중에 전화를 했는지 멀리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 타이핑 치는 소리, 대화하는 소리. 은봉은 안다. 유진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먼저 나서 얘기를 꺼낼 생각은 없다.

"어머님은 여전하게 잘 지내시니?"

그까짓 유진의 노모가 잘 있던 말던 은봉은 알바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80이 되도록 하루같이 늘 병치레만 하는 노인네, 목숨줄도 참 질기다는 생각을, 이제 그만 살 때도 되지 않았나는 생각을 늘 해오던 터다. 그러나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 은봉은 짐짓 살가운 목소리를 낸다.

"그만해도 참 건강하신 거야. 벌써 몇 년째야. 문턱이 닿도록 병원을 드나드시는 게. 그렇지만 아직도 혼자 거동을 하시는 것 보면 보통 건강하신 양반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은봉의 말에 유진은 예에, 그렇지요, 하고 마지못한 듯 대답한다.

"골골 삼년이라고 앞으로도 이십년은 거뜬하게 사실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럴 일은 없어야 된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은봉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시는 게 자식들 짐 덜어 주는 일이지 뭐......

은봉의 말에 예, 예,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 같던 유진이 마침내 결심이 섰다는 듯 은봉의 말을 막는다.

"어머니!"

"응?"

"선...선희는, 선희는요....."

"선희? 으응. 아마 일하고 있겠지....."

유진이 물은 게 방금 대답한 뜻이 아니라는 걸 은봉은 알면서 짐짓 바보인 척 한다. 뭐라고 대답하랴. 유진아. 선희를 단념하렴. 너도 알쟎니. 걔는 버얼써 다른 남자가 생겼단다, 하고 말 할 수는 없다. 7년을 사귀면서 온갖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을 아이들이다. 어쨌든 마음들이 무척 아플 거니까.

은봉은 유진과 헤어진 선희의 결정에 대해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선희가 유진을 배신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이별 통고를 했으니까. 그러나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선희의 여린 어깨에 온갖 짐을 지우게 한 것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할 판인데 시집식구들 떨거지까지 선희의 어깨에 얹힐 걸 생각하면 유진과의 결혼을 무작정 찬성할 수 없었다. 선희가 무슨 죄라고. 선희도 이제 제 살 방향을 찾아야지. 내일 모레 나이가 마흔이다. 조건 좋은 남자 있으면 변심할 수도 있는 게다. 무조건 선희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사실 처음에 유진과 헤어졌단 얘기를 들었을 때 은봉은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얘, 웬만하면 그냥저냥 잘 지내보지 그러니. 7년이란 세월이 아깝지 않니? 가진 게 너무 없어서 그렇지 유진이만큼 착하고 너만 위해 주는 남자찾기도 쉽지 않아..... 그러나 선희가 새로 사귄다는 남자가 직업도 좋고 재력도 웬만큼 있는 남자란 말에 마음이 변한 은봉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요즘 세상은 돈이 최고지. 여지껏 온갖 고생을 다했는데 시집가서는 좀 편안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돈도 마음대로 좀 써가면서. 식구들 뒷바라지 하느라 자신을 위해서는 변변한 옷 한벌을 사입지 못하고 살아온 선희만 생각하면 은봉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제발 이제 돈 많고 훌륭한 인품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었다.

"유진아"

은봉은 결심한다. 둘의 관계를 7년동안 지켜 본 사람으로서 차마 하기 힘든 말이지만 그래도 선희를 위해서, 아니 아직 미련을 접지 못하는 유진을 위해서 할 얘기는 해야겠다고.

"그만 선희를 단념하렴. 선희는 좋은 남자랑 지금 사귀고 있쟎니. 유진이 네가 진정으로 선희를 생각한다면, 선희가 잘 되길 빌어주렴. 이제 미련을 놓을 때가 되었어......."

"선..선희가......"

은봉의 말에 대꾸를 않고 유진이 더듬더듬 물었다.

"선희가 행복하대요?많이...많이 행복하대요?"

"그래. 행복하단다. 많이, 아주 많이 말이지......"

은봉이 알기로 선희가 행복하진 않은 것 같다. 지금 사귀는 남자에 대해 별다른 말은 안하지만 은봉의 느낌이 그렇다. 평상시에도 조곤조곤 수다가 많은 아이는 아니지만 최근에 들어 말수가 더욱 줄었고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상대방 남자에 대해 물어봐도 그냥 웃기만 할 뿐이다. 말을 하지 않기에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선희가 지금 사귀는 남자와 썩 행복하지 않다는 걸 대충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진에게 그렇게 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너도 얼른 좋은 여자를 만나도록 노력하렴......."

은봉의 말에 유진은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끊었다. 은봉도 한숨을 내쉰다. 우리 선희야 워낙 쑥맥이니까 그렇지 정신이 똑바로 박힌 여자라면 유진이 너랑 엮이고 싶지 않을 거란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늘 병치레를 하는 팔순이 가까운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사남매의 장남이라니. 벌써 말만 들어도 고생문이 훤한데 어느 여자가 그 고생을 사서하겠는가 말이다.

부엌카운터에 기대 생각에 잠겨있던 은봉은 불현듯 벽에 걸린 시계를 흘낏 보고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다. 벌써 약속시간에서 5분이나 지나있는 것이다.

아이고, 내가 미쳤지....

고꾸라질 듯 목욕탕으로 달려간 은봉은 아까 바르려다 만 립스틱을 다시 입술로 가져간다. 그러나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 맘이 급하니까 곱게, 예쁘게 발라지지가 않고 자꾸 입술선 옆으로 삐쳐져 나오는 것이다. 아이고, 망할놈. 하필이면 그때 전화를 해서는......

간신히 립스틱을 다 바른 은봉은 목욕탕 불도 제대로 끄지 않은채 현관으로 허둥지둥 뛰어나간다. 아까 물걸레로 깨끗하게 닦아둔 구두를 급하게 신으면서 은봉은 버릇처럼 거실을 한번 쳐다본다. 풀로 붙여둔 듯 항상 같은 자리에 있던 남편 호성의 모습이 없다. 붙박이 가구처럼 꼼짝도 않은 채 밥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만 제외하고 늘 똑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와 하루종일 웅웅 돌아가던 텔레비젼이 꺼져있는 거실은 휑등그레하다.

잘 하고 있나 몰라.....

호성은 지금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번 감옥에 며칠 갖혀 있을 정도로 대판 싸운 뒤로, 집에서 한국연속극만 보고 있는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더 이상 하지않겠다고 선희가 난리를 친 후부터다. 페인트 칠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허드렛을 하고 있다. 인간 강호성이가 그런 시덥쟎은 일을 하겠냐고 생야단을 하면서도 그래도 지난 2주 동안 800불이나 되는 돈을 벌어 왔다. 그러나 은봉은 별 기대를 하지않는다. 언제 어느 때 집어치우고 털레털레 집으로 기어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일을 집어치우고 들어올 때 들어오더라도 호성이 집에 없다는 사실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다.

마음이 급하니 손은 더디다. 현관문에 열쇠가 제대로 꽃히지 않는다. 두어번 헛손질을 하던 은봉은 가까스로 현관문을 잠그고 열쇠꾸러미를 백에 집어넣으면서 큰 길가를 향해 뛰기 시작한다. 9월 중순. 여름의 끝자락이긴하나 한낮, 중천에 떠 있는 햇볕이 뜨겁다. 은봉은 사정없이 얼굴로 내리꽃히는 햇볕을 손으로 가리면서 달음박질을 한다. 이게 무슨 일이야. 승용차로 하는 첫 데이트인데 늦어버리다니. 약속시간도 잘못 지키는 칠칠맞은 여자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호성이 조금만 일찍 집을 떠났더라도 이렇듯 늦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성의 아침을 차려주면서 오늘은 집에서 빨래도 하고 집안청소도 할 거라고 혼잣말 비슷하게 했다. 호성이 들으라는 듯이. 그런데 오늘따라 호성이 11시가 훨씬 넘어서야 집을 나간 것이다. 조바심이 났지만 집안일을 한다던 사람이 화장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호성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치장 하느라 늦어버렸다.

오늘은 화요일. 은봉이 노는 날이었다. 마켓이 주 7일을 오픈하기 때문에 토요일, 일요일에 맞추어 쉴 수 없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서로 사정을 봐가면서 대중없이 쉬었다. 그날이 월요일,화요일이 될 수도 있고 목요일, 금요일이 될 수도 있고 어쩌다가는 이틀을 건너뛰어 화요일, 목요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달 들어 매니저 양씨와는 쉬는 날이 같이 되는 날이 한번도 없었다. 부엌에 걸린 칠판에 적힌 스케쥴을 보면서 은봉은 한숨을 푹 쉬었었다. 그런데 며칠전 아줌마 하나가 치과 예약이 있다며 날짜를 바꾸는 바람에 운 좋게도 매니저 양씨와 같은 날 쉬게 되었던 것이다. 가까운데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는 양씨의 제의에 의해 오늘은 양씨의 차를 타고 야외로 나가기로 한 것이다.

숨이 턱에 닿을 듯이 뛰다가 저만치 차가 다니는 도로가 보이기 시작하자 은봉은 걸음을 늦추었다. 약속시간에 좀 늦고 말지 헐레벌떡 뛰는 꼴을 양씨에게 보여줘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여자다운 생각이었다. 불과 두어블락 뛰었을 뿐인데 뜨거운 햇볕아래 뛴 때문인지 이마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아침에 목욕하고 갈아입은 속옷이 땀에 젖어 척 몸에 들러 붙는 게 느껴져서 은봉은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이마를 훑어내린 손바닥에 화운데이션이 묻어나는 것이다. 조금전 갖은 정성을 들여 바른 화운데이션이 땀에 녹아서 흘러내리고 만 것이다.

어디가서 화장을 좀 고쳤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하는 은봉의 눈에 저만치 버스정류장근처 길 옆으로 서 있는 매니저 양씨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두어번 본 적 있는 하얀 색의 오래 된 승용차. 은봉은 화장을 고치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채 급한 걸음으로 양씨의 차를 향해 다가갔다. 양씨가 은봉을 발견하고 조수쪽으로 몸을 굽히고 팔을 뻗어 문을 열어주었다.

"미, 미안합니다. 막 나오려는데 전화가 와서요......"

"예에. 얼른 타세요...."

"많이 기다리셨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후덥지근한 바깥 날씨와는 달리 양씨의 차안은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어 서늘했다. 차가운 공기가 은봉의 달아오른 얼굴과 몸을 기분좋게 덮치는 것이다. 은봉은 두 다리를 오무리고 얌전하게 들어가 앉는다. 양씨가 시트 벨트를 매라는 시늉을 했기에 선생의 말을 잘 듣는 유치원생처럼 양순한 몸짓으로 시트 벨트를 맨다.

양씨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신호등 몇 개를 지나 고속도로로 진입하기까지 양씨는 별 말이 없었다. 늦어서 화가 났나 싶어 은봉은 마음을 졸였지만 자신을 보고 두어번 빙긋 웃는 걸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안심한다. 은봉은 핸드백 안에서 콤팩트를 꺼냈다. 그리고 행여 양씨가 눈치채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재빨리 얼굴을 살펴본다. 다행히 생각보다 얼굴은 멀쩡한 것 같다. 땀에 흘러내린 화운데이션으로 볼썽사납게 돼있을 줄 알았었는데 아까 손바닥으로 훑어내린 이마 쪽이 약간 얼룩졌을 뿐이다. 은봉은 앞만 보고 운전하는 양씨를 흘낏 보고는 얼른 분첩으로 이마쪽을 토닥거린다. 흔들리는 차안이었지만 대충 마무리된 것 같다. 얼굴에 자신이 생긴 은봉은 그제서야 두리번 거리며 차안을 찬찬히 살폈다. 유리로 된 손톱만한 십자가가 줄에 매달려 백미러 밑으로 늘어뜨려져 있고 은봉을 기다리면서 읽은 듯한 한국신문 한 부가 접혀져 뒷 좌석에 놓여있는 것 외엔 아무런 물건도 없는 깨끗한 차안이었었다.

"차가 참 깨끗하네요........"

은봉이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말하자 양씨는 다시 은봉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뻗어 스윗치를 눌렀다. 한국가곡이 낮게 흘러나왔다. 은봉도 익히 들어본 적 있는 그리운 금강산.......

"가곡 좋아하세요?"

전직 교장선생님이라 취향도 참 고상하다고 생각하며 은봉은 양씨를 보며 물었다. 나훈아와 배호 노래광인 남편을 자신도 모르게 떠올리며. 좋아한다기보다 마땅히 들을 게 없으니까, 하고 말꼬리를 흐리며 양씨는 다시 은봉을 보고 빙긋 웃었다.

참 말이 없는 남자다, 하고 은봉은 양씨의 옆 얼굴을 바라본다. 검은색을 찾아보기 어려운 백발이긴 하지만 숱이 많은 머리를 양씨는 가지고 있다. 올백으로 빗어 넘긴 그 스타일이 참 잘 어울린다. 눈동자가 두겹세겹 겹쳐보일 만큼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양씨는 선입관을 가지고 보지 않더라도 한국 중고등학교의 인품 좋은 교장 선생님같이 생겼다. 점잖고 지적이고 과묵한.

점잖은 것과는,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호성을 은봉은 떠올린다. 초등학교도 졸업도 가까스로 했던 자신과는 달리 그래도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람이 호성이었다. 조실부모하고 어릴 때부터 고모집으로, 남의 집살이로 굴러다닌 자신보다는 모든 면에서 월등히 나을 줄 알았던 남자였다. 그러나 성격은, 인품은 교육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준 남자가 호성이었다.

은봉은 호성으로부터 아내로서의 대접을 한번도 받아본 적 없다. 아내대접은 고사하고 최소한 인간으로서 대접조차 받아보지 못했다. 결혼한 이래 지금까지 평생을 단 한시도 쉬지 않고 몸종 노릇만 해온 것 같다. 이렇게 편안하고 다정하게 호성과 같이 차를 타본 적도 없다.

나는 그 남자의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려 해 은봉은 눈을 감고 차 시트에 몸을 기댄다. 양씨와 같이 있으면 참 편안하다. 오늘로써 세 번째 데이트다. 지난 달 초순에 있었던 첫 데이트. 같이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에 위치한 동물원에 갔었다. 기린, 사자, 곰을 구경하면서 동물원 안을 산책했다. 동물원을 나와 햄버거 가게에 들러 콜라와 감자튀김, 그리고 치킨 너겟을 사 먹었다.

그리고 두 번째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각자 따로 버스를 타고 가서 만났다. 두 번째 데이트는 은봉이 먼저 제의를 한 것이다. 선희가 사준 여름 투피스를 자랑하고 싶어 만나자고 한 것이다. 남색의 투피스에 하늘색의 작은 물방울 무늬가 어우러진 블라우스는 여지껏 은봉이 산 옷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옷이었다. 몇 년전 선희가 어머니 날 사다 준 짙은 남색 샌들에 맞추어 신으니 은봉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멋졌다. 한껏 성장을 하고 나타난 은봉을 보고 양씨도 눈이 둥그레졌었다.

"참으로 근사합니다"

그날 양씨가 은봉의 옷차림을 보고 한 말이다. 은봉은 근사하다는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예쁩니다. 멋있습니다가 아닌 근사하다는 말. 일반인들은 잘 쓰지 않는 말. 그런 특별하고 고상한 말은 매니저 양씨이기에만 가능하다는 생각까지 했던 은봉이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데이트. 밤잠까지 설쳐가며 나온 세 번째 데이트다. 그러나 오늘 양씨가 지나치게 말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항상 과묵한 양씨였지만 오늘따라 너무하다 싶게 말이 없는 것이다. 또한 흘낏흘낏 훔쳐 본 양씨의 옆 얼굴이 침울해 보이기까지해서 은봉의 마음도 어두워진다.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언젠가 선희와 한 번 와본 적 있는 호수였다.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도는데 2시간 이상이 걸린다는 바다처럼 광활한 호수. 웬만해서는 운전을 잘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 양씨가 차를 가지고 나온다고 해서 은봉은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어떤 멋진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갈까. 항상 신중하고 사려깊은 양씨가 이번에도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하긴했지만 늘 다시 와보고 싶었었던 호수가 눈에 보이자 은봉은 차창을 내리면서 와아, 하고 환성을 질렀다.

"이 호수에 와 본 적 있어요?"

차를 주차시키면서 양씨가 물었다.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똑바로 은봉의 눈을 주시하면서.

"예에, 그럼요. 딸이 저를 데리고 왔었어요"

딸이 데리고 왔었다는 말은 괜히 했다...... 대답을 해놓고 은봉은 살짝 후회한다. 그냥 한번 와봤었다고 할걸. 누구랑 왔었냐고 물을 테지. 그냥 누구랑요, 하고 궁금증을 유발시켰으면 좋았을 텐데.

시트 벨트를 끄르고 차문을 열고 나오며 은봉은 도리질을 한다. 아니다. 지금까지 봐온 양씨의 성품으로 봐서 더 이상 묻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은봉은 이것저것, 이를테면 뉴욕으로 시집 가 살고 있다는 양씨 딸의 가족관계라든지 지금 양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렌트비라든지 소소한 것들에 대해 많이 물었다. 양씨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알고 싶어서였다. 반면 양씨는 은봉에 대해 일절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도통 자신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양씨가 섭섭하기도 했었지만 그게 양씨의 일관적인 성격이라는 걸 깨닫고나서 그런 마음을 접었었다.

"이리로 와요. 날이 약간 뜨겁긴 한데 저쪽으로 잠깐 걸읍시다"

양씨가 손짓하는대로 은봉은 다가갔다. 그리고 양씨보다 조금 떨어져서 호숫가로 난 오솔길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은봉은 양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싶다. 그러나 양씨가 좋아할지 어떨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늘 반 걸음 쯤 뒤로 걷는다.

은봉은 문득 핸드백 안에 들은 썬글라스가 생각났다. 선희가 사준 비싼 상표의 썬글라스. 쓸 일이 없어, 아니 쓰기가 멋적어 한번도 쓰지 않았던 썬글라스다. 멋지게 척 쓰고 양씨 앞에 나타나려고 했었는데 약속시간에 늦는 바람에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러나 여지껏 쓰지 않던 썬글라스를 이제와 새삼스레 꺼내기도 뭣해서 은봉은 핸드백을 들어 올려 햇볕을 가린다.

"오늘 날이 꽤 덥네......"

매니저 양씨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어 한 마디 하더니 몸을 돌려 은봉을 쳐다 본다. 그의 그윽한 시선은 언제나 따뜻하고 정답다.

"저기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나무 그늘이 있고 벤치가 있어요"

"........."

"덥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

날이 더운 건 괜찮은데 아까처럼 흘러내린 땀으로 화장이 또 지워질까봐 은봉은 걱정이다.아닌게 아니라 차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에 잠시 말랐던 등이 다시 땀으로 축축하게 차오르는 걸 느낀다. 이렇게 날이 더울 줄 알았으면 좀 가볍고 시원한 옷을 입을 걸. 가을이니, 그리고 차를 타고 나가는 것이니 멋을 좀 부려도 되려니 생각한 은봉이었다. 야외로 나올 줄 알면서 원피스에 정장 쟈켓을 차려입은 자신이 한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양씨와 은봉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 중 은봉같이 부자연스런 옷차림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오, 오늘은 왜 이리 모든 게 엉망이지.

은봉의 낭패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씨는 아무 말 없이 앞서서 걸었다. 간간히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은봉을 향해 빙그레 웃으면서. 그럴 때마다 은봉은 행복감으로 젖었다. 양씨는 웃는 것만 가지고 여자를 행복하게 할 줄 아는 재주를 가진 남자라고 은봉은 생각한다. 오늘까지 세 번을 만나는 동안 양씨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승객이라곤 단 둘밖에 없는 텅텅 빈 버스에 나란히 앉았을 때도. 그러나 은봉은 그저 좋았다.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둥둥 떠가는 것처럼 설레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말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어쩌면, 하고 은봉은 생각한다. 오늘은 어쩌면 손이라도 잡아줄지 몰라. 숲속의 벤치에 나란히 앉게되면 말이지. 은봉은 얼굴을 붉히며 쿡쿡, 속으로 웃었다. 생각만으로도 황홀해서.

양씨가 말한 벤치는 금방 나타났다. 대여섯그루의 고목이 충분히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곳에 나무로 된 벤치가 두 개 마주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몸에 쫘악 달라붙는 형광색의 운동복을 입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바람처럼 둘을 지나쳐 갔을 뿐 주중, 한낮의 그곳은 고즈넉하고 조용했다.

은봉은 양씨가 가리키는 벤치에 앉았다. 치마에 벤치의 먼지가 묻을까 걱정이 되긴했지만 뜨거운 햇볕을 피해 앉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그리고 양씨와 단둘이 가까이 앉을 수 있다는 설레임에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호젓하고 약간은 은밀하기까지 한 숲속의 벤치에 양씨와 단 둘이라니, 오오 꿈이라면 절대 깨지 말길. 그러나 옆에 와 앉을 줄 알았던 양씨는 은봉의 앞 벤치에 앉는다. 자신의 옆이 아니라는데 약간 실망을 하지만 은봉은 이내 마음을 바꾼다. 아직 기회가 많은데 뭐, 하고.

은봉은 양씨를 보고 미소지었다. 여기 참 조용하고 좋네요......

은봉의 말에 양씨도 같이 미소지었다. 그리고. 양씨가 한참동안 은봉의 얼굴을 바라 본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바라 본다. 그때 은봉은 보았다. 양씨의 눈빛에 형연할 수 없는 슬픔과 고뇌가 가득 담긴 것을. 은봉의 가슴이 쿵, 하고 소리없이 내려앉는다. 은봉의 가슴이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양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강 여사......."

".........."

"할 얘기가 있어요......"

"............"

"오늘이 우리 둘이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 될 거요....."

"..........."

"우린 그래야만 해요..."

".........."

"미안해요......"

은봉은 망연자실한 채 양씨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양씨의 말은 솜사탕처럼 한껏 부풀어 올라 있던 은봉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서 박혔다. 그 비수는 은봉의 가슴을 마구 헤집으며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은봉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지금 내가 들은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지금 양씨는 내게 이별을 고하고 있는 건가. 이별의 말을 하러 이 호수에 나를 데리고 온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