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익준씨 아파트 앞이야, 하는 전화를 받은 지 1분도 안되어 띵동,띵동,띵동,띵동하고 숨 넘어가듯 네다섯번 연달아 초인종이 울렸다. 박익준은 무릎 위에 있던 랩탑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한시간여 가까이 들여다보고는 있었으나 생각이 딴 데 가 있어선지 전혀 일의 진척이 없었었다. 이제 그만 밀쳐놓고 운동이나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꺼놓았던 전화기를 확인했더니 열몇개의 미스콜이 들어와 있었다. 모두 진아로부터였다. 전화기를 켜자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요란하게 울린 것이다.
박익준은 천천히 현관쪽으로 걸어나가면서 벽시계를 보았다. 저녁 일곱시였다.
이상했다. 전혀 걱정이나 우려가 되지 않으니. 지금부터 진아와 마주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이다. 다만 성가셨다. 그러나 성가시다고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젠 부딪쳐도 부딪쳐야 할 일, 밀린 숙제해 치우듯 얼른 해치우고 가뿐해지고 싶을 뿐.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진아가 거칠게 박익준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바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서더니 소파에 소리나게 털썩 앉았다. 그러나 앉는다는 게 하필이면 박익준이 방금 내려 놓은 랩탑 위였다. 진아는 다시 일어나 랩탑을 거칠게 집더니 옆으로 휙 소리나게 내던졌다. 가슴 속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런식의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는 진아. 박익준은 물끄러미 진아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자, 이제 변명을 해보시지……”
진아가 팔짱을 끼면서 박익준에게 말했다.
“어떠한 변명이라도 들을 준비가 돼 있어. 시작해 봐”
박익준은 진아가 팽개친 랩탑을 끌어당겨 소파밑으로 넣어 놓았다. 얼른 이 재미없는 순서를 마쳐야 한다고 박익준은 생각했다. 박익준은 무엇보다 쉬고 싶었으니까. 진아가 오기 전까지만해도 운동을 나갈까, 생각 중이었던 박익준이었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복잡할 때 운동이 최고니까. 그런데 이제는 운동이고 뭐고 다 귀찮다. 얼른 진아를 보내놓고 한숨 푹 자고 싶다. 그런 다음 밀린 일을 마무리하고 싶다. 거의 한달 동안 일을 제대로 못했다. 바로 진아 때문이다. 안이 보일 듯 투명한 피부에 바른 빨간색 립스틱이 육감적인 진아, 바로 진아때문이다. 진아와 같이 지내기 위해 박익준은 거의 한달 동안 휴가를 냈었다.
“왜 사람 속터지게 전화를 안 받아? 전화는 왜 꺼놨었어?”
“너는 꼭 한국 연속극 같아”
박익준이 말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진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져갔다.
“한두장면만 보고도 뒷편이 어떻게 전개될 지 금방 예측할 수 있는 한국 연속극말이야”
진아는 단순하다. 머리를 돌리거나 꼼수를 쓸 줄 모른다. 어떻게보면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순진무구 그 자체다. 참 좋은 점이지만 그래서 상대하기가 더욱 피곤하기도 하다. 상대방 입장을 전혀 고려않고 자기 주장만 강하게 내세우는 아이같아서. 일단 원했다하면 무슨 수를 쓰서라도 손에 넣고야마는 아이같아서.
시원시원하고 명랑하고 귀엽고 예쁘고 섹시하고 매력있는 진아. 거기다가 조금만 사려깊고 진중한 성격이었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이렇듯 금방 찾아와서 따지지말고 아예 몇주간 잠수를 타버렸으면 어땠을까. 전화도 이메일도 받지 않고 아예 이쪽의 연락을 딱 끊어버렸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아마 걱정되고 궁금해서 박익준은 미쳤을 것이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진아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진아는 기세등등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미친 듯 따져들고 있다. 박익준은 벌써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아가 어떻게 나올지.
“아까 걔, 어떤 사이야?진짜 메이드 맞아?”
박익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메이드 아니야……”
“그럼?”
“사귀던 여자야”
될대로 되어라, 하는 심정으로 박익준이 말했다. 진아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게 선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하고 박익준은 생각했다.
거기서 진아랑 만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예상을 못했던 박익준이었다. 내일 한국으로 떠나는 친구들이기에 그동안 쇼핑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짐 싸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해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선희와 함께 쇼핑하러 간 곳에서 진아랑 정통으로 마주쳐버렸다. 더구나 선희랑 팔짱까지 낀 상태로. 선희가 조심스레 팔짱을 끼어왔을 때 박익준은 가만 있었다. 어렵쇼?하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선희가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이고 주저했을까, 생각하고 그냥 두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거짓말같이, 정말 영화의 한 장면같이 진아랑, 그녀의 친구들이랑 딱 마주쳤고 엉겁결에 메이드라고 말해버렸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박익준은 크게 후회했다. 누가 보고 들어도 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터였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둘러댄 새빨간 거짓말. 메이드랑 팔짱끼고 쇼핑을 가는 남자는 없을 테니까. 진아는 둘째치고라도 친구들은 자신을 얼마나 형편없는 남자로 생각했을까. 그러나 박익준의 가슴이 정작 저려왔던 것은 선희때문이었다.
내가 저 여자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는구나……
차에 탔을 때 박익준은 보았다. 파리하게 질려있던 선희의 얼굴을. 애써 참으려 했었겠지만 기어히 볼 위로 떨어지던 눈물 한 방울을. 그게 다였다. 한 시간이나 걸려 집에 올 때까지 선희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쪽의 심경을 건드리는 말이나 자신의 심경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않았다. 아무 일 없었었다는 듯, 채소와 생선으로 평소 때와 똑같이 조용조용한 몸짓으로 맛있는 저녁밥을 지어주었다. 물기 한 방울 없이 깨끗하게 부엌을 정리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 오지 않겠어요.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두번 다시 보지 않겠어요......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자신이 해야 할 귀찮은 절차 하나가 해결되었으므로. 손 안 대고 코를 푼 셈이 되었으므로.
사실 박익준은 오늘 선희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제 그만 관계를 끝내자고 말 할 참이었다. 그래서 그 통고를 하러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다. 그 통고는 선희에게 제대로 된 옷 한벌을 사준 뒤, 저녁식사를 하러가서 할 생각이었다. 두어달 전 빌려가서 아직도 갚지 못하고 있는 돈 만불은 되는대로 천천히 갚으라고, 그 돈 때문에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너무 아둥바둥하지 말고 일 년이 걸리든 이년이 걸리든 천천히 갚으라고 말 할 생각이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사귀던 여자?”
박익준의 말에 진아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참, 별 거지같은 소리를 다 듣겠네, 하는 표정. 상대방의 발언을 완전히 무시하고 업신여겨 치우는 표정. 거기서 박익준의 기분이 확 상했다.
“사귀는, 이 아니고?”
“글쎄. 사귀는,이기도 하겠지…….”
아까처럼 될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박익준이 대답했다.
“박익준씨!”
진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집안을 흔들었다.
“당신 겨우 고것밖엔 안되는 인간이었어? 청소해 주고 빨래해 주는 자기집 메이드랑……”
“메이드 아니라고 했쟎아…..”
“그 여자, 메이드만큼 초라하고 볼품없었어…..”
“함부로 말하지 말아. 인격적으로는 훌륭한 여자야…...”
훌륭한 여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하고 박익준은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도 재주라고는 자기 몸 하나 치장하는 재주밖에 없는 진아보다는 훌륭한 것 같다.
“언제부터야?얼마나 되었어?”
진아가 기어이 결판을 내고야말겠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다그치듯 물었다. 박익준이 제일 싫어하는 여자의 표정. 상대방의 약점을 틀어쥐었다는 득의만면한. 그리고 그 틀어쥔 약점을 빌미로 실오라기 하나까지 다 뽑아내고 건져내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
“너 알기 전부터 사귀던 여자야. 그러니까…..”
박익준은 그만 자초지종을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연하고 어두운 느낌이 독특하고 새로와서 먼저 전화해 사귀자고 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진아가 시비 걸 듯 박익준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그 여자랑 사귀는 중이면서도 내게 다시 작업을 걸었다 그말이군?”
진아가 조금 전의 전투적이고 결연한 표정에서 경멸스런 표정으로 바꾸면서 말했다.
박익준은 대꾸 대신 부엌으로 간다. 그리고 잔을 꺼내 와인을 따른다. 오늘 일 하기는 글렀군…..
참 이상한 일이다. 오늘 일로 인해 진아가 자신을 떠나갈 지도 모르는데 그게 그리 애닯지도 안타깝지도 않다. 오늘 아침까지만해도 진아와의 결혼을 생각했던 박익준이었다.
지난 한 달 박익준은 휴가를 냈었다. 진아의 친구들이 한국에서 와서 한달간 머무르므로 관광을 시켜준다는 게 이유이기도 했지만 방해받지 않고 시간에 쫒기지 않고 진아와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퇴근 후 그리고 휴일에 잠깐씩 얼굴보는 게 너무 감질나므로 한달동안만 실컷 얼굴맞대고 같이 지내고 싶다는 요구는 진아가 먼저 했었다. 박익준은 진아의 요구를 쾌히 받아들였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이상 일단은 진아에 대해 더 알아야 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도 박익준은 진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진아의 겉모습과 진아가 가진 조건과 환경에 대해서만 알 뿐.
다음 달로 벌써 마흔 넷이 되는 박익준이다. 이제 그만 이 여자 저 여자를 전전하는 걸 끝내고 결혼이란 절차를 통해 안주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엔 꼭 성공적인 결혼을 하고 싶었다. 벌써 한번 실패한 결혼이다. 두번째 마저 또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진아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그러니까 어떤 여자인지가 아니고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가까이 지내면서 파악하고 싶었다.
친구들을 구경 시키러 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박익준은 진아와 거의 시간을 함께 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으며 며칠을 지내기도 했고 거의 이틀동안은 한발자욱도 나오지 않고 침대에서 뒹굴어보기도 했으며 하루종일 서로 말 한마디 않은 채 영화를 보기도 했다.
결과는 괜찮다,였다. 진아는 참 괜찮은 여자였다. 굳이 취약점을 찾으라면 살림을 할 줄 모른다는 것. 그쪽으로는 아예 관심조차도 없다는 것. 그러나 메이드랑 결혼한 게 아닌 바에야 그 정도는 얼마든지 지나쳐 줄 수 있었다. 선희처럼 맛깔지고 정갈한 밥상을 차려내지 못하는 게, 선희처럼 깨끗하게 집안을 정돈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때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하고 박익준은 생각했다.
진아의 큰 장점은 명랑함과 쾌활함이었다. 진아의 일생에 짜증나거나 골치아픈 일이 있었을까. 그녀는 해바라기같이 환한 여자였다. 상대방의 기분마저 환하게 하는.
그리고 또 굳이 진아의 단점을 찾으라면 이쪽의 기분은 아랑곳없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모든 것을 한다는 것 정도. 이를 테면 하루종일 친구들을 데리고 다니느라 피곤한 박익준은 집에서 라면이나 먹으며 쉬고 싶은데 기어이 자기가 먹고 싶은 걸 먹으러 나가자고 닥달하는 것. 그러나 그 정도 또한 얼마든지 참아줄 만 하다,고 박익준은 결론내렸다.
박익준은 따른 와인잔을 진아에게 내민다. 진아가 쏟을 듯 거칠게 잔을 받더니 단숨에 들이킨다. 그러나 급하게 마신 와인이 목구멍에서 걸렸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켁켁, 기침을 해댔다.
“사실은 오늘 관계를 정리하자는 말을 하려고 했었어…..”
박익준의 말에 진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그러면 아무 문제없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진짜야?진짜 오늘, 오늘 관계를 정리하자는 말을 하려고 했었어?”
“그래…….”
“거짓말! 믿을 수가 없어.그냥 해보는 소릴 거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해보는 궁여지책의 변명이겠지……. ”
믿든지 말든지, 하고 박익준은 속으로 말하며 와인 한모금을 마셨다. 완강하게 믿지 않겠다는 여자한테 애써 믿으라고 설득할 에너지가 지금 박익준에게는 없었다. 그는, 그 남자는 그저 피곤했다. 쉬고 싶었다.
“내일 친구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갈 텐데, 가서 우리 집에까지 다 풍기고 다닐 텐데 뭐라고 그래?”
“네가 알아서 해. 난 모르겠다……”
“박익준씨!”
“진아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나를 두고 어떻게 그런 여자랑 어울려 다닐 수 있어?”
“그 여자가 먼저였어.너를 알기 전 부터 사귀던 여자야”
“그럼 얼른 정리했었어야지. 나를 사귀게 됐음 그 여자부터 정리했어야 되는 게 순서쟎아?”
“오늘 정리하려고 했었다고 말했쟎아?”
“우리가 사귄지 벌써 몇 달째야. 그동안 어떤 식으로든 빨리 관계를 접었어야 하는 거 아냐?”
“………..”
진아의 말에 박익준은 생각했다. 그래, 그 말은 맞다. 어떤 식으로든 얼른 정리를 했었어야지….
“사랑했었어, 그 여자?”
그 말엔 박익준은 대답을 못한다. 선희를 사랑했을까? 사랑한다는 감정은 무엇일까.
눈에 안 보이면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만지고 싶고 자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감정. 그게 사랑일 거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손해나 희생도 감수하고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겠다는 감정, 그게 사랑일 거다.그러나 선희에겐 그런 감정이 없었다. 그저 안되었다는 생각뿐. 선희에겐 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진아에게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진아는 소유하고 싶다. 다른 놈에게 가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다. 진아에게 느끼고 있는 게 사랑일까.
“박익준씨, 여자에 대한 취향이 참 독특하네……”
“……….”
“어떻게 그런 여자, 예쁜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여자랑 사귈 생각을 했을까?”
".............."
"취향이 독특한 게 아니야. 눈이 낮은 걸 꺼야......"
"생긴 게, 차림새가 다가 아니니까. 예수님도 부처님도 넝마같은 옷을 입고 다닌 걸 몰라?"
선희를 변호해 주고 싶은 마음과 함께 진아에게 한방먹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박익준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생긴 것과 차려입은 걸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진아에게 정말 신물이 난다. 몇달동안 사귀면서 싸운 일이 있다면 바로 진아의 그런 점 때문이다. 박익준도 옷잘 입고 멋지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지만 진아는 정도가 심하다. 아무리 훌륭한 인품과 학식을 갖추었다해도 생긴 게 초라하거나 볼품없으면 일단 무시부터 하고 멸시하려 든다.
“착하고 현명하고 좋은 여자야”
적어도 너보다는, 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박익준은 애써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촌스럽고 초라하고 구질구질하쟎아.”
“………”
진짜 두손,두발 다 들겠군, 하는 아연한 심경으로 박익준은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가 입을 비쭉대며 말했다.
“난 억울해.정말 억울해. 난 익준씨가 나랑 그런 여자랑 함께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줄 몰랐어……..”
미안해, 하고 박익준이 말했다. 어쨌든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까…..
“언제 만났어?
“한 일년 쯤 됐어….”
“어떻게 만났어?”
“같은 직장에 있었어”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
“그 주제에 여자가 먼저 감히 손을 내밀지는 않았을 거구 오브 코오스 익준씨겠지?”
“그래……..”
“지금 내게 하듯 그 여자에게도 했겠네?
“…………”
“얘기해 봐. 하나도 빼지 말고 다 얘기해 봐……”
박익준은 이제 그만 진아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과하려 했던 마음은 벌써 물 건너로 간 뒤였다. 진아와 더 이상 선희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진아야!”
정색을 하며 박익준은 진아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우린 아직까진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결혼한 사이도, 약혼한 사이도 아니야. 법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나 의무가 없는 사이야. 설사 내가 지금도 선희랑, 아, 그 여자의 이름이 선희야. 설사 내가 지금 선희랑 잠을 잔다 해도..….”
“……….”
“설사 내가 지금 선희랑 잠을 잔다 해도 네가 나 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없어. 알겠니?”
진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붉으락 푸르락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더니 마침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
“익준씨…….”
“미안해. 미안하게 생각해….”
진아의 투명한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보면서 박익준은 생각했다. 오늘로서 이 여자와는 마지막이구나. 감히 진아를 울렸으니, 천하의 진아를 울렸으니 재고의 가치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왕 내친 김이다. 헤어짐이 무서워 할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네가 나를 문책하거나 추궁할 권리는 없어…..”
예외로 진아는 순순했다. 박익준이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도 가만히 울기만 할 뿐이다. 박익준이 예상한 진아의 반응은 펄쩍펄쩍 뛰며 난리법석을 떠는 거였다. 니가 나 한테 이럴 수 있어!?헤어져!헤어지자구!......
한동안 눈을 내리깐 채 눈물을 흘리던 진아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박익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박익준은 다 마신 와인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팔짱을 꼈다. 진아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벌써 연기처럼 저 멀리로 날아 가버리고 말았다. 진아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이제는 박익준이 자신이 없다.앞으로 이런 식으로 사사건건 괴롭힘을 당하겠지. 문득 선희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박익준의 머리를 스쳐들었다. 선희라면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익준씨 때문에 나는 너무 슬퍼…….”
"..........."
“어떻게 나랑 동시에 다른 여자랑 사귈 수 있어?”
“미안하다고 했쟎아………..”
진아가 앉은자리에서 무릎걸음으로 박익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박익준의 가슴에 어린 강아지처럼 안긴다.
“나 익준씨 사랑해…..”
“………”
“많이 사랑해……”
“나도 그래”
박익준의 손이 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말하려고 했었는데 우리 부모님 허락떨어졌어. 몇달 안으로 한국으로 들어 오래. 일단 얼굴을 보재. 그리고 결혼식은 한국에서 해야한다고……..”
“나중에 얘기 하자…..”
“익준씨!”
“나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아. 나중에 한가할 때 얘기하자…..”
“그래서!”
진아의 얼굴이 다시 표독해졌다. 그녀는 익준의 가슴에서 급하게 머리를 떼어냈다. 그리고 흥,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그 여자하고 쇼핑 갈 시간은 있었다, 이거지?”
“………..”
“둘이 팔짱끼고 다정하게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그곳까진 갈 시간이 있었다 이거지?”
“말했쟎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었었다고…..”
뭐가 목구멍에서 욱, 하고 치미는 걸 참으며 박익준은 애써 조용조용하게 말한다. 진아를 더 이상 자극하고 싶지않다는 마음이 욱,하는 마음을 눌렀다. 진아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찮아서다. 게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진아. 정말이지 이런 대화, 더 이상 나누고 싶지 않다.
“정말 헤어질 생각이었어. 그래도 1년동안이나 사귄 여자인데 헤어지면서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었어. 그것 뿐이야……”
박익준은 국어책을 읽듯 또박또박 한마디,한마디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여기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마라. 나도 이제 더 이상 변명하지 않을 테니까…..”
박익준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었는지 단호한 표정이 무서웠는지 진아는 다시 옆에 찰싹 붙듯이 앉는다.
“그래, 용서해 줄께. 용서해주고 싶지 않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힘드니까. 그만 용서할께”
박익준이 한숨을 쉬면서 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로서 다 끝난 건가?
“고맙기도 해라”
“대신 꼭 기억해 둘거야. 그래서 앞으로도 여기에 대해 두고두고 씹을 거야. 나 한테 잘못하는 일이 있을 때 마다…..”
진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박익준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오늘 여기서 자게 해 줘. 자고 갈래”
“친구들은 어쩌고?”
“걔네들은 지들이 알아서 할 거야. 영어를 못해, 차가 없어?”
“진아야”
박익준은 진아의 머리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할 일이 너무 많아.내가 거의 한 달이나 쉬었쟎니”
“나 방해 안 할께. 그냥 얌전히 있을께….”
“누가 옆에 있음 신경쓰인단 말이야……..”
선희라면 어땠을까, 하고 박익준은 다시 선희를 떠올린다.
물 같은 여자다, 선희는. 무색무취의. 그녀가 색깔을 내보일 땐 오직 침대에서 뿐이다. 둘이 사랑을 나눌때 뿐.
문득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어요, 하던 목소리가 박익준의 귀에 들려온다. 가늘게 떨리던 선희의 목소리.
박익준은 버릇처럼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벌 받을 거야. 벌 받고 말 거야……..
기어이 자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진아를 가까스로 달래 내보내고 박익준은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잔 마셨다. 그리고 소파 밑에 내팽겨쳐있던 랩탑을 끌어당겼다. 길고 긴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쉬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겠다고 박익준은 랩탑 스위치를 켰다.
“!”
이 메일이 와 있었다. 친구 유 박사한테서였다.
친구. 가능하면 빨리 내게 연락을 해주게. 왜냐면…..
유 박사의 이메일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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