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al Face Reader (의학관상술사)- 19
소아 치료를 오래하던 필자가 가끔 좀 남다른 아이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어린 아이가 꼭 어른들이 하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4살? 5살? 정도 되었는데 신세 타령을 한다던가, 중년의 성인들이 할 것 같은 말투로 이야기를 한다던가, 조금은 또래들이랑 남다른 취향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10대 아이들 중에서는 더욱 도드라지게 이런 성향이 분명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데 아주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거나, 옛날 사람들이 하던 행동이나 문화적 흐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거나, 혹은 본인 또래 보다 나이 차이가 훨씬 많이 나는 어른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20대 정도 된 친구들로 올라가면 본인이 너무 옛날 취향을 이야기 하거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어른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겉으로 티내지 않으면서, 눈빛으로 대화를 하는 친구들이 있다. 심연(深淵)의 눈빛을 하고는 그윽하게 사람을 바라본다. 가끔 나도 모르게 그 눈빛에 취해서 마음으로 의지하게 되고, 정신적 지주인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다 또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30대 정도 되면, 자꾸 여러 세대를 아우른다. 어리면 어린 사람대로, 연령이 많아지면 많은 사람대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영혼을 감싸주는 것 같은 행동을 자주 한다. 그리고 인생이 길지 않고 덧없음을 알아버렸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내 호흡대로 인생을 살겠다고 말한다. 40대 정도가 되면, 자꾸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이번 생에서 꼭 아껴야 하는 사람과 챙겨줘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별일 없어도 자꾸 사람들이 찾아드는데 늘 조심 조심 사람을 마음으로 껴안는다. 귀한 유리잔을 손에 쥐듯이 매번 조심 조심 일을 하고, 사람의 마음도 다독인다. 그리고 50대 정도가 되면, 종교적으로 의미있는 사람같은 삶을 산다. 종교를 초월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모든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 모두 종교적으로 옳은 일, 윤리적인 일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처럼 '법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사람의 표본이 되어간다. 그렇다고 본인의 성향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묵묵하게 보는 사람 없어도 자기가 갈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60대가 되면, 조용히 자꾸 죽음을 준비한다. 가까운 미래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 죽으면 이건 누구줘야지. 나 죽으면 이건 이렇게 해야지 하며 혼잣말을 되뇌이고 말 없이 준비를 하면서 평화로운 얼굴이 완연한 표정을 자주 짓는다. 고생도 추억이었고, 아픔도 지나보니 다 행복이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도 이 나이 될때까지, 큰 마음 고생 없이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자꾸 '너희만 잘 살면 된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한다. 70대가 되면, 자꾸 이런 사람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따라 붙는다. 이상하게 다른 노인들에게 잘 가지 않는데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관상'을 갖고 있는 노인분들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인기가 더 많아진다. 공원에 앉아있어도 꼬마들이 와서 말을 시키고, 지나가면서 사탕도 나눠주고, 그냥 난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다고 자꾸 매달린다. 본인은 사람 귀찮게 할 생각 없다며 찾는 사람 많은데도 혼자 올곧이 집안 청소하고 화초 가꾸면서 조용히 무던하게 하루를 지내신다. 80대가 되면, 별걸 다 기억하는 사람이란 소릴 심심치 않게 듣는다. 동년배 노인들은 자꾸 기억이 가물 가물해진다고 하는데, 이런 분들은 별별일을 다 기억해서 이야기 해주신다.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시는지 물어보면, 뭐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런다고 손사레를 치신다. 그리고 자꾸 주변 사람들 잠들기 전에 잠자리 돌봐주고, 화초 키우고, 동네 돌아다니는 강아지, 고양이 밥 챙겨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나 이제 곧 저 세상 가야한다고 자꾸 그런 소릴 하신다.
분명,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작고 작은 아기의 모습이었고, 시간이 흘러서 몸이 성장하고 노화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겉모습과 다르게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것 처럼 진중하고 소중하게 하루하루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이라고 부른단다. 필자의 지인이 가르쳐줬다. 왠지 세상을 살다 보니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필자가 열심히 어떤 사람들이 그런 관상을 갖고 있는지 또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고 조사해 보고, 고민해 보았다. '간절히 바라면, 열릴 것이다' 처럼 반복해서 그런 사람들을 찾았더니 또 그런 분들이 필자를 자꾸 찾아와서 조용히 앞에 앉아 관상을 보고 가신다.
이번 생이 처음인 것 같은 사람은 '에너지 분출의 삶'을 살다가 떠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빠른 속도를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자주 즐기거나 조금은 위험할 수도 있는, 약간은 위태로울 수도 있는, 어쩌면 조금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들을 겁 없이 뛰어드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아주 많은 나이까지 세월이 흘러도 늘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 오랫 동안 유지된다. 마냥 해맑고, 마냥 재미있고, 마냥 철 없기도 한 모습을 보여서 함께 하다 보면 즐겁고 유쾌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같이 감정에 휩쓸리고, 같이 위험에 휩쓸리기도 한다. 이런 삶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냥 삶의 스타일이 봄에 새싹이 피어나는 것 처럼, 용수철이 튀어오르는 것 처럼 재미나고 생동감이 좀 더 강하다.
그런데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감정 처럼, 겁도 좀 생기고, 위험한 일은 피하기도 하고, 삶의 걸음 하나하나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우리가 어릴 땐, 어른들이 술 마시고, 클럽에 가고, 여행 다니며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너무 동경해서 빨리 어른이 되면 나도 저런 어른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어서 해봐야지 하는 맘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은 마치 꼭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해 본 사람들처럼 딱히 강한 요구도 관심도 없다. 어떨 때는 당당하고 활기차게 무엇이든 시작하는 사람이 부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냥 점점 더 조심성이 늘어난 사람 같아서 매번 더 신중하고, 꼼꼼하게 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꾸준히 이어간다.
가끔 필자에게 이제 막 세상에 뛰어들려고 하는 젊은 친구들이 관상을 보러 올 때가 있다.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에너지를 강하게 분출하고 있고, 놀랄 만큼 신기한 행동들을 거침없이 하는 친구들을 보면, 마음 속으로 '아이쿠~ 조심해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일어난다. 필자가 관상 공부를 하면서 조금 빨리 삶을 알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우선은 걱정이 먼저 밀려온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그래도 참 부럽네, 나는 언제 저렇게 열정을 불태웠던 적이 있었던가?' 라는 마음이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요즘엔 부쩍 겁나는 일이 많아져서, 포기하기도 하고 여러 번 수 없이 고민하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다시 조심스럽게 내려놓기도 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이런 필자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긴 하나보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필자의 잘 아는 교수님 한 분이 이런 명언을 하셨다. '쥐약 먹은 것은 숨겨도, 나이 먹은 것은 못 숨긴다'고 아마 이것도 그런 유형의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래서 이번생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이 자주 교차한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깊은 호수로 빠져들 것 같은 눈빛으로 사람을 응시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아린다. 아리고 아린 마음을 다 표현하기도 전에, 작고 여린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강한 의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빠에게 매번 폭언과 폭행을 당한 엄마에게 말 없이 다가와 엄마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내가 어른이 되면 엄마를 지켜줄테니 내 걱정을 말라고 한다. 사업에 실패해서 온 집안에 빨간 표지가 붙고, 엄마 아빠가 망연자실로 자리에 앉아 엉엉 울고 있으면 책가방에 책을 챙기며 내가 집안 일으킬테니 울지 말고 어서 정신 챙기라고 말한다. 할머니한테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 집안 대를 이어줄 아들이 태어났을 텐데,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했다고 아무리 혼이 나도, 할머니 손 꼭 잡고 할머니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 해서, 너무 미안해요. 내가 할머니 속상하게 해서 너무 죄송해요.라고 말한다.
가끔은 어린 아이 모습 처럼 떼도 쓰고, 화도 내고, 응석도 부리면 좋겠는데 혼자 세상 다 살아본 사람 처럼 어른을 아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런 친구들을 보면, 가끔 마음속으로 상상도 한다. 저 친구는 도대체 이번 생이 몇 번째일까? 얼마나 많은 세상과 세월을 알고 있을까?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하구나. 그런 상상을 자주 한다. 그래서 흔하진 않지만, 그런 친구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오지랖이 생겨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진다. 자꾸 뭐라도 집어서 넣어주고, 마음에 위로의 말도 해주고, 자꾸 다독여준다. 그럼 또 언제 필자의 마음을 알았는지, 나는 괜찮으니 선생님이나 잘 지내면 된다고 그런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냥 눈물이 핑 돈다. 혼자 너무 많은 것들을 다 짊어지고 사는 것 같아서 그 짐 나눠주려고 하면, 그냥 원래 자긴 이만큼 지고 가야 하니까 놔두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그냥 마음이 짠해진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눈빛이 정말 깊고 아련하다. 그리고 참 신기한 것은 아주 화려하게 생긴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부분 굉장히 평범해 보이고, 수수하다, 그런데 곁에 있으면 강단이 느껴진다. 작고 예리해 보이는 눈을 갖고 있다. 큰 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눈이 정말 깊고 깊어서 호수 같다. 조용 조용 이야기를 하는데 말 재주가 있어서 굉장히 조리있게 이야기를 잘 한다. 그래서 상담받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릴 때 부터 꾸준히 있다. 간혹, 본인의 나이보다 더 어려보이는 동안도 꽤 있다. 그래서 어려보이는 외모를 뒤에 숨기고 너무 어른같은 이야기를 자꾸 해서 이것은 도대체 무슨 조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조용한 듯 한데 에너지가 있어서 가만히 있는 동안에도 무엇이든 만들어낸다. 생각을 정리하고 결과물을 잘 만든다. 외로움을 어릴때부터 빨리 타기 시작한다.
완전한 외형적 특징 보다는 주로 행동과 언어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한 눈에 알아보기 어렵고,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그래서 그 가치를 알아주는 매니아층들이 조용히 따르고 좋아한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꼭 이런 사람들을 알아보는 방식 처럼 나타낸 시가 한 구절 있어서 필자가 그 내용을 인용했다. 참 좋아하는 시인데, 짧지만 화자가 주고자 하는 메세지가 정확하다. 그래서 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몹시 아껴주는 글 중에 하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 풀꽃->
오늘도 마음 속으로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필자에게 또 찾아와 주길 마음으로 바란다. 단순히 그 분들에게 관상을 봐주고 상담을 해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마음에 잔잔한 호수와 같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기다려 본다. 참 신기한 것은, 필자가 택한 공부이고 필자가 사랑하는 직업이고 필자가 너무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관상을 본 다는 것은 참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행복한 경험인 것 같다. 너무 아픈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나도 늘 심심한 위로를 받는다. 마음을 다독여 주다가 나도 힐링의 기분을 느끼고, 내게 마음 다해 의지해 주는 사람들을 통해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
그래서 오늘도 내게 오는 사람들을 자꾸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내 삶이 이번 생이 처음인지, 아니면 몇 번째 인지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꼭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다 해서 내가 갖고 있는 재주로 맘 껏 도움을 주고 정성을 다해주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섬세하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의학관상술가'가 되고 싶다. 갈길은 늘 멀었지만, 가고자 하는 방향은 명확하게 길이 '하나'니까. 이렇게 50년 걷고, 60년 걷고,70년 걸으면 언젠간 도착하지 싶다. 만약 이번 생에 도달하지 못 하면, 다음 생에서 또 열심히 노력해서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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