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어머님 말씀이, 어차피 의사 만나러 가면 당연히 수술 하라고 할테고, 당신께서는 몸도 약하고 연세도 많으셔서 수술은 겁나고 받기 싫으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사를 만나기조차 하지 않으시겠다는 거..

아들들이 난리치는 통에 결국 제가 다시 예약을 잡고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는데요.  수술 전문의 선생님 소견은 내시경을 집도한 의사의 말대로 종양을 다 도려낸 것 같기는 한데, 배를 가르고 들어가서 보기 전까지는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게 멀쩡해 졌다는 100% 확신이 없다는 거.  따라서 가장 안전하게 가려면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해야하는 것.  하지만 연로하신 환자가 수술로 인해 외려 건강만 더 악화될 것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니, 두고 보시려면 장내시경을 자주 해주는 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주"는 3개월 후에 다시 해보시라는 거였는데.  고집 있으신 우리 어머니, 당신은 1년쯤 후에 하고 싶으시다고... ㅜ.ㅜ

답답~~~한 마음으로 어머니 옆에 앉아있다가 칼럼에 질문 올리는 분들, 또는 상담 들어오시는 분들 생각이 났습니다.  이혼은 당장 할 생각이 없는데 뭘 좀 간단히 묻고 싶다는 분들.  또는 미씨에 변호사 만나러 가면 이혼을 하라고 할까봐 겁나서 미씨에만 질문을 올린다는 분들.  이혼은 결혼보다 훨씬 중대한 결정이고 이혼 앞에서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님처럼 수술하라고 할까봐 무서워서 의사도 안 만나러 갔다가 암세포가 자라는 줄도 모르고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적당한 타이밍인 1년 후에 내시경 검사를 하려다가 그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정확하게 본인의 옵션이 뭔지, 본인의 결정으로 인해 가장 크게 잃을 수 있는 게 뭔지, 아니면 가장 최선의 결과는 뭔지, 이것들을 알지도 못하는 상황은 만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저 자신도 대다수의 변호사들에 대한 이미지가 그닥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입니다만, 적어도 제 칼럼을 다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어떤 변호사가 지가 뭔 소릴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인지, 돈만 챙겨먹고 제대로 일을 안 할 사람인지 정도의 판단은 설 정도의 내공은 쌓이셨으리라 생각 합니다.  실제로 칼럼을 다 읽은 분들이 변호사 도움 없이 온라인과 법원의 도움만 받고도 혼자 이혼을 잘 처리하셨다는 분들도 꽤 있구요.  따라서 칼럼을 다 읽고도 이게 암인지 종양인지 종기인지조차 판단이 안 서신다면, 전문가에게 가셔서 정확히 본인의 상황이 어떻고 어떤 옵션들이 앞에 놓여 있는지를 배우셔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이혼의 문제는, 암세포처럼, 내버려두고 기도 열심히 한다고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제가 가장 많이 존경하고 좋아한 할아버지 변호사가 81세의 연세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착수금을 많이 줘야만 사건을 맡기로 유명했던 분이라는데요.  제가 안 지난 5년은 그 누구보다 궁지에 처한 사람들을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셨고, 변호사들이 협회 이메일로 질문들을 올릴때마다 바쁜 시간에도 직접 전화로 조언을 해주곤 하셨던 분입니다.  저도 그렇게 도움을 받았고요.  이 분이 돌아가신 후 이 분께 도움 받았고, 이 분을 롤모델로 삼았던 백여명의 현직 판사, 변호사들이 그분께 도움받았던 경험들을 공유했는데요.  그 이메일들을 읽으며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제 아무리 일 잘하는 변호사라고 해도 일년에 수천명의 인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분처럼 백여명의 변호사들을 제대로 된 길로 인도하고 마음을 만지면, 수천, 수만명의 삶이 긍정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생을 마감했을 때, 이분과 같이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 했습니다.   

저한테 오셔서 이혼을 하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인의 인생에 대해 본인이 책임을 지고 후회 없이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본인이 내리는 결정이 informed judgment 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혼을 하고 말고는 본인이 모든 옵션을 이해하고 고려한 후 결정을 내리시는 거죠.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르는 책임도 본인의 몫입니다.  다만 겁이 난다고 무슨 옵션이 앞에 있는지도 모르고 종양이 곪아터져 암이 되고, 제 아무리 세계에서 제일가는 전문의라고 해도 손을 댈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지는 마시라는 겁니다.

엘에이는 갑자기 추워졌네요.  갑자기 추워지니 저도 감기기운이 도는 거 같습니다.  환절기에 건강 유의하시고, 연휴 준비 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