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고등 가정법원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Kenneth A. Black 판사가 5월 11일 폐렴으로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접하고 가정법 커뮤니티가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저 또한 아직까지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요.  이 분이 워낙 특출나게 훌륭한 기억력을 갖고 계셔서, 이 분 법정에서 10년, 15년전에 했던 주장들을 시간과 장소 뿐만 아니라 발언하던 사람의 차림새까지 다 기억을 해서, 자신이 무슨 얘길 했었는지 기억도 못 하고 상반되는 주장을 하던 변호사 여럿을 당황하게 하시고, 수천개 판례의 이름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사건번호까지 줄줄 다 외워서 걸어다니는 법률 백과사전이라고 불리웠던 분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이분이 수천의 판사와 변호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이 분의 일에 대한 열정 뿐만 아니라 자신이 판사로서 사람들에게 훈계하던 양육권 관련 이슈들을 본인이 그대로 살아낸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랙판사는 판사에 임명된지 단 4년만에 (그 전에는 커미셔너로 5년 근무) 가정법원 부장판사 직을 맡게되는 초고속 진급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들과 딸이 고작 5,2살 이었을 때, 심리학 박사이자 엘에이 법원에서 양육권 평가사를 하던 전부인이 이혼을 결심하고 엘에이에서는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오렌지카운티로 이사를 간 후 오렌지카운티에 이혼서류를 접수해 버립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판사직은 굉장히 정치적인 자리이고, 엘에이 고등 가정법원 부장판사에 앉아있던 블랙판사는 분명 항소법원, 대법원까지 올라갈 길을 닦고 있었던 것일 텐데요.  엘에이에서 가정법원 판사로 일을 하며 (워낙 일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오렌지 카운티에 사는 어린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없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만큼, 블랙판사는 그 누구도 쉽게 예상치 못했던 결단을 내리고 시행합니다.  바로 엘에이 고등법원 판사직을 내려놓고 본인도 오렌지 카운티로 이사를 내려간 것이죠.  그리고 롱비치 법원에서 판사로 7년을 더 일을 한 후 2008년에는 아예 공직에서 내려와 사설판사 일을 시작합니다.  그의 이런 행보는 전적으로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죠. 이혼 수속 직후부터 판사일을 빡시게 하면서도 전부인 집 바로 옆으로 이사를 가 아이들을 50:50 (풀타임으로 판사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양육권 스케쥴은 거의 불가능입니다) 으로 돌봤다는 얘기는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이 분이 판사로 앉아있는 법정에 양육권 문제로 공판 또는 재판에 들어갔다가 혼쭐이 난 부모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이 너무 바쁘고 직장과 아이들 집이 너무 멀고 어쩌고 저쩌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이유를 줄줄 대는 부모들은 블랙판사의 호통을 때려맞기 일쑤였다고 하네요.  집이 멀면 이사를 하면 되고, 네 말대로 돈을 벌고 일을 하는 게 다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아이들에게 아빠/엄마가 되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본인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아낸 분이셨기 때문에 이 분의 훈계가 그만큼 더 영향력 있었다고 합니다.

이혼 이후 이 분은 전부인과 어떤 관계를 유지했을까요?  이혼을 한다고 애들과의 관계가 바뀌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이혼을 하겠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를 간 후 뒷통수를 때린 전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블랙판사도 인간이니만큼 좋은 감정을 갖고있기는 힘들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평소에는 대쪽같고 까칠하기 짝이 없는 이 분이 아이들을 위해서 전부인과의 악감정을 내려놓고 말 그대로 이상적인 공동육아 (co-parenting) 관계를 근 15년간 유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장례식에서 전부인도 추도연설을 하더라는... 현부인과 전부인이 추도연설을 하는 장례식은 또 처음 봤네요.  아무리 미치도록 바빠도 아이들 스포츠 경기 한번을 빼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생의 최우선은 아이들이었다고 하고요.  블랙판사가 얼마나 훌륭하고 세상 최고의 아빠였는지에 대해 간증 아닌 간증을 해준 사람이 바로 전부인... 이분이야말로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아빠 캐릭터가 아니었을런지...  

향년 66세였던 블랙판사는 2개월 전만해도 멀쩡하게 강의를 했었는데요.  천식으로 시작된 건강 적신호를 무시하고 병원도 안 가보고 과로하다가 결국 패혈증이 와서 페렴으로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아니면 이 사건은 골로 간다는 사명감이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미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제발 병원부터 가라는 40년지기 친구 변호사의 조언에 "월요일에 시작되는 재판 준비를 위해 주말내내 만오천장의 서류를 검토해야 해.  재판 끝내주고 목요일쯤엔 시간을 내서 병원에 가볼게"라고 답을 하셨다고 하는데요...  결국 일을 다 끝내고서야 쓰러지셔서 목요일에 응급실로 실려 들어가신 후 사경을 헤매다 48일만에 사망하셨다고 하네요...  블랙판사의 죽음을 통해 수많은 법조계 인사들이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너무도 쉽게 잊고 사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명석한 판결도, 앞뒤 안 맞는 거짓주장에 정면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원투펀치 날려주시던 사이다 발언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이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과연 마지막으로 맡으셨던 사건이 아직 16, 19 밖에 안 된 아이들,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했던 아이들을 남겨두고 떠날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건이었을까요?  아마도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예고도 없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말 그대로 죽도록 일을 하셨을 겁니다.  결국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일이야말로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힘들고 큰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전에도 몇 번 글 올려드렸지만, 이혼이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힘들고 어두운 시간을 견뎌내면서 건강을 해치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힘든 시간이건간에 아이들을 위해서는 살아내셔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는 낫고, 이왕 죽지 못하고 살 거, 건강하게 버텨 내십시오.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끼니 챙겨 드시고, 아무리 꼼짝하기 싫어도 스트레칭이나 제자리 뛰기라도 하시고, 아무리 자신에게 쓰는 돈이 아까워도 이상기운 느끼시면 곧바로 병원 가십시오.  나를 위해 내 몸 챙기는 거 아닙니다.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들을 위해 내 몸 챙겨야 하는 겁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