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여름 나의 미국 생활은 시작되었다.

영어라고는 알파벳이랑 인사와 이름 소개정도가 전부였던 나는 난생 처음

부모곁을 떠나 할아버지, 오빠와 함께 살기시작했는데 나의 미국 생활은

얼마가지 못해 삐거덕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빨리 미국에 적응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국방송 시청

금지는 물론이요,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으라고 명령하셨다.

한국 친구들이 보내오는 편지는 번번히 할아버지 장농속으로 들어갔고

할아버지는 외출을 하실 때마다 전화기를 떼어 갖고 나가셨다.

혹시 오빠와 내가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쁜길로 빠질까봐

염려하시던 할아버지 마음을 지금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당시엔

모든 것이 얼마나 서럽고 무심하게 느껴지던지 할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계실 때는 그 누구보다 나를 예뻐하시던

자상하고 멋진 할아버지셨는데 손자들 뒷바라지하는 타국살이가 날이갈수록

할아버지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 당시 일기장은 온통 한국에 대한 향수와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고 나는 그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못해 눈물 젖은 일기를 쓰곤

했었다. 그리움과 외로움때문에 삶이 벅차고 힘들다는둥, 사랑을 해보고

싶은데 사랑뒤에 찾아올 헤어짐이 두렵다는둥... 지금 일기장을 읽어보니

꽤나 유치한 내용들 뿐이지만 그래도 그당시의 외로움이 물씬 풍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건 엄마의 잔소리였다. 날씨를 맞추지 못하고

더운날은 춥게, 추운날은 덥게 옷을 입고나갈 때면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을 찔끔거리곤 했었다. 몸이 시름시름 아픈 날은 병든 병아리처럼

침대에 누워 눈물, 콧물을 잔뜩 쏟아 부으며 내가 왜 미국에 와서 이렇게

고생일까... 그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땐 또 어땠던가... 잔소리를 듣더라도 "엄마,이거

사줘.", "엄마, 여름옷 사야하는데..." 라고 말할 수 있던 시절이 그리웠다.

준비물을 사야할 때도 꼭 필요한 물건을 사야할 때도 나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던가...


차가 없으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곳 생활은 나를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께서 오빠와 나의 발이 되어주시긴 했지만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를 앞세워 이곳 저곳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할아버지는 두어번의 차사고를 내셨고 그 후로 나는 할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차만 생겨봐라...'하면서 차없는 설움을

삼키며 이차 저차에 눈치보며 실려다니던 처지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남의 차라도 얻어타고 다닐 수 있는게 참으로 감사한 일인데...


너무 외로웠다. 한국에서처럼 이친구 저친구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학교생활이 신나는 것도 아니였다. 말 한마디 하려면 몇번이나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야했고 혹시라도 영어 못한다고 무시당하거나 차별대우를

받게될까 늘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다녔다. 외로움이 더해갈 수록

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고 나의 가슴은 설깃 설깃 서리가

맺혀 얼음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부모와 함께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나라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체념하며 살아야 했다.


미국 생활 1년을 넘기며 나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온 친구들을 만나며

그들과 형성된 공감대로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나의 외로움을 서서히

잠재울 수 있었다.마음을 열지 못해 서로 바라보기만 했던 친구들과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나누며 따뜻한 끈으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조금씩 백지위에 화살표가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외롭고 어둡게만 느껴졌던 나의 사춘기를 이제는 토닥여주고 싶다.

잘 했다고... 장하다고...

내 외롭던 1992년을 떠올리며 이제는 내 자신에게 "괜찮아" 라고 말 할

때가 온 것 같다.





♡♡미시 메모♡♡

이제는 하루에 일과처럼 MissyUSA를 찾는 나...
오늘은 반가운 쪽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우리 칼럼을 다녀가신 어느 미시님께서 칼럼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요즘엔 글이 뜸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쪽지를 보내주셨어요. 그 쪽지를
받자마자 서둘러 칼럼을 올립니다. 사랑받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너무
행복한 거 있지요. ^^ 쪽지 보내주신 님, 감사 감사해요~~!!

그리고, 이제 갓 미국땅을 밟으신 분들, 또 1992년의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자녀를 두신 분들, 저처럼 외로운 미국 생활을 경험하신 모든분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고 싶습니다. 모두 힘내세요!
우리 해낼 수 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