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계신, 연로한 친정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당신의 목소리에 물기가 없다.

건조하고 척박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말이 막힌다.

언니 말로는 입맛이 없어 통 드시지를 못한단다.

입맛이 돌게 하는 약을 처방해서 그나마 조금 넘기고 있단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입이 짧았다.

외출에서 빈 손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지만 정작 자신은 손도 안댔다. 

아버지를 위해 추어탕, 염소탕 등 온갖 요리를 척척 해내도

정작 당신은 입이 짧아 평생을 살 찔 틈이 없으셨던 분.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린 두 동생들과 청상 과부가 된 어머니를 돌봐야 했던 분.

어쩌면 엄마는 입이 짧아 짧은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을 동생들에게 거둬 먹여야 했기에

스스로, 선택적으로 입이 짧아져버린 건 아니었을까?

이번에 외할아버지가 70년 만에 독립유공자가 되서 명예 회복을 하게 되자마자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니 세월이 무심하고 엄마의 인생이 짠하기 그지 없다.

엄마의 소식을 들은 날,

잠자리에 드려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설움에 엉엉엉 큰소리를 내고 울고 말았다.

엄마랑 딱히 친하게 지냈던 딸도 아니고

30년 미국 생활, 엄마를 그리워하며 엄마에 목맸던 사람도 아닌데,

(하긴...그랬으니 엄마를 떠나 미국 땅으로 시집을 왔으리라...)

어쩌면 자식된 도리로 전화하고, 안부 묻고 그랬던 딸이었는데

단 한번도 엄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지인들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을 때도

'언젠가 우리 엄마도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고,

엄마를 잃은 지인들의 마음도 온전히 헤아리진 못했을 터다.

나에게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냥 그렇게 영원히, 멀리나마 살아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런데...맥이 빠지고 물기 없는 당신의 아픈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어본 나는

'우리 엄마도 돌아가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밤,

엄마의 부재가 현실일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슬펐고 무서웠다.

눈이 탱탱 부은 채 아침을 맞고

한국 시간에 맞춰 엄마를 찾았다.

고장난 엄마의 목소리에 너무 화가나서

큰소리로 엄마에게 소리쳤다.

"그니까..좀 먹으라고...엄마가 너무 안 먹으니까 아픈거 아니냐고..

지금은 갈 수도 없는데...나 안 볼거냐고..."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언니도 울고..

모두들 우느라 말도 하지 못했다.

감정이 복받쳐서 서둘러 전화를 끊고 엎드려 엉엉엉 꽤 오랜 시간 울었다.

효녀도 아니면서 효녀 코스프레를 한 듯 싶어 겸연쩍었지만 

살아 계실 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까이 계신다면 같이 병원에도 가고, 한 끼 밥이라도 정성스레 차려드릴 테지만

멀리 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돈' 뿐이었다.

'돈'이라도 부칠 수 있는 형편에 감사하지만

'돈' 밖에 부칠 수 없는 형편이 서럽고 죄송했다.

내 아우성에 깜짝 놀라셨는지 요즘은 그래도 식사를 잘 하신단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목소리도 생기를 찾았고,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기색은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엄마라는 존재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그저 살아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것. 

그저 존재만으로도 내 삶이 공허하지 않게 해주는 것.

나에게 엄마는 그런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