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아,
새벽녘에 불던 바람소리를 들었니?
아침잠이 많아 늘 자명종 신세를 져야 하는 엄마도
오늘 아침에는 1시간이나 일찍 저절로 눈이 떠졌단다.@_@
사위가 아직 캄캄한데 들리는 것이라고는 집채를 삼키고도 남을만한 바람소리라
엄마는 문득 혼자서 자고 있을 너희들을 생각했어.
좀 더 솔직히 고백하면,
한번 잠에 빠지면 업어가도 모를 너에 대한 염려보다는
너보다 예민하고 여린 정운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단다.^^;;
너도 알다시피 정운이가 나이만 먹고 키만 컸다 뿐이지 아직 어린애잖니..^^

어렸을 때부터 정운이는 간혹 새벽에 깨어 안방을 기웃거리곤 했어.
무서운 꿈을 꿨다거나, 혹은 잠이 안온다는 핑계를 달고서 말이야.^^;;
중학생이 된 후 부터는 한동안 안방을 찾지 않아 이젠 정말 ‘다 컸구나!’ 싶었단다.
그런데 왠걸~~
겨드랑이에 디오더런트를 바르고,
이마에는 잔뜩 여드름 투성이고,
멋이들어 장발을 하고 다니는 녀석이 엄마가 일찍 깬 그 새벽에
어슬렁거리며 안방 침대로 기어들어왔지 뭐니?
너도 한번, 엄마와 아빠의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누운 녀석의 모습을 상상해봐.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엄마는 그 생각만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구나.
“왜? 무슨 일 있니?” 하는 엄마의 물음에
거뭇거뭇 콧수염을 가진 8학년 짜리 사내아이가 걸걸한 목소리로
“바람이 너무 쎄게 불어요..^^;;”라고 말을 하는 모습을 말야.

근데, 수인아..
엄마는 덩지 큰 녀석이 바람 소리에 놀라 안방을 찾았는데도
전혀 화가 나지 않더라.
오히려 정운이의 방문이 새벽녘에 일찍 깬, 엄마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어.
언감생심 엄마가 또 언제 정운이처럼 잘난 연하남을 곁에 두고 누울 수 있겠느냐구. ㅋㅋ
그래서 화를 내는 대신  ‘무서워서 엄마를 찾았는데 그게 뭐 어때서?’ 하며
제법 여유를 부리게도 됐단다.^___^

지내놓고 나면, 사소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힘빼고 목숨걸고,
바둥대며 맘 상하고, 자기의 에너지를 없애버리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아.
인생의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당히 놓을 줄도 알고, 포기할 줄도 아는 인생이
사실은 훨씬 살만하고, 한결 맛깔나는 삶을 사는 것이거든.
엄마도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여러가지의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가능했단다.
아직도 덜 다듬어지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엄마가 더 젊은날의 엄마보다 여유가 있어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가끔은 큰일도 사소한 듯 웃고 넘어갈 줄 아는 엄마가 더 멋진 엄마이리라…
그렇지?

바람소리가 무서웠던 새벽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하얗게 동이 터오는구나.
그런데 엄마는 동이 튼 후에야 비로소
이 아침의 바람이 지난 새벽의 바람과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빛이 있을 때의 바람과 어두울 때의 바람은
그 느낌이 하늘과 땅차이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어두울 때 느껴지는 바람의 세기나 소리가 훨씬 크게 느껴진다는 것을 말야.
똑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세상이 온통 암흑처럼 생각될 때,
그래서 오히려 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야.
사실은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햇살도 드러나고 하늘이 말간 얼굴을 드러낼 텐데
어둡다고 지레 겁에 질리고, 보이지 않는다고 눈감고 무서워하면
결국엔 희망조차 갖기 힘들겠구나 하고 말이야.

수인아,
그래서 엄마는 네게 한가지 꼭 해줄 말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말야.
우리를 숨쉬게 하는 공기,
환한 대낮에도 초롱초롱하게 떠있을 수 많은 별들,
나뭇잎을 건들고 지나가는 바람의 손길,
흐린 날에도 구름 위에 의연하게 버티고 있을 해의 근엄한 모습 등등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한결같이
네 맘 속에 살아 숨쉬는 엄마가 있다는 것도 알아줘.
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엄마의 지지가, 엄마의 응원이 없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줘.

지난 엄마의 생일날, 엄마가 혜란이 이모에게 책 선물 받은거 기억나니?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맞아. 엄마가 며칠 들고 있었던 책 말이야.^^
그 책은 작가 엄마가 위녕이란 이름을 가진 딸에게 보내는
수많은 편지글을 담고있어.
비록 나에게 보내지는 편지는 아니었지만 엄마는 그 책을 통해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단다.
그리곤 생각했지.
엄마도 엄마 마음을 엄마의 사랑하는 딸에게 알려야겠다.
엄마의 영원히 변치않을 격려와 지지와 응원을 담은 편지를 써야겠다..하고 말이지.

그래서 이 편지가 네게 씌여졌지만,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이 참 좋구나.^__^
너의 콜게이트 스마일을 떠올리면 엄마의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르고,
조금씩, 조금씩 숙녀가 되어가는 너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에 벅찬 감동이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해.
자신보다 남을 더 배려하고,
자만하지 않으며,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언제나 늘 주위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줄 아는,
너처럼 이쁜 아이가, 너처럼 고운 아이가 엄마의 딸이라서 정말 고마워.

수인아,
이제는 바람이 잦아들었는지
이리저리 쏠리던 나뭇잎들이 웅크리며 숨을 죽이고 있단다.
아무래도 마당 한 가득 소복이 쌓인 저 나뭇잎을 쓸어내는게
이 아침 엄마의 일이겠어.^^;;
하지만 덕분에 물청소를 쏴아~ 하고나면
바람으로 잔뜩 말라있던 풀들도 생기를 얻게 되겠지?
오늘 저녁엔 깨끗해진 마당에서 바베큐를 해 먹자구나.
사랑해..우리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