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가족이 뭔지 모르겠어. 부모가 무엇이고 자식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사람들 모두 가족이 소중하다, 소중하다,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어떤 때는 낯선 사람이 훨씬 더 내게 사랑스럽고, 날 더 이해하는 게 느껴져."

엄마는 한숨을 잠깐 쉬더니 손으로 턱을 괴었다.

"말야, 너희 키우면서 엄마도 그런 생각 했어. 대체 나는 남들이 말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심지어 남들이 보기에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나는 뭘 했었나? 외할머니는 그때 엄마에게 어떻게 했었나, 외할아버지는?..그런데 말이야. 생각나는 게 없는거야. 그냥 가족들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갔을 때 좋았던 거, 외할머니가 잔소리할 때 신경질 났던 거, 혼나고 울었던 거, 내 방 가지고 독립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외할아버지가 여자라고 밤 아홉시까지 들어오라고 할 때, 빨리 어른이 되어서 집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거..."

"정말?"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다시 생각해보고 신기했다니까. 이렇게 생각나는 게 없을 수가...싶었어. 그래서 솔직히 너희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이게 좋은 가정인지 모르겠는 거야....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더라. 혹시, 아무 생각도 없는 거, 그게 좋은 가정이라는 게 아닐까. 그냥 밥 먹고, 자고, 가끔 외식하고 가끔 같이 텔레비 보고, 가끔 싸우고 더러 지긋지긋해하다가 또 화해하고, 그런 거...누가 그러더라구. 집은 산악인으로 말하자면 베이스캠프라고 말이야. 튼튼하게 잘 있어야 하지만 그게 목적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게 흔들거리면 산 정상에 올라갈 수도 없고, 날씨가 나쁘면 도로 내려와서 잠시 피해 있다가 다시 떠나는 곳, 그게 집이라고. 하지만 목적 그 자체는 아니라고.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서 결코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삶은 충분히 비바람 치니까, 그럴 때 돌아와 쉴 만큼은 튼튼해야 한다고..."

그렇게 쉬운 곳이 집이라면 하기는 나는 이미 그런 집을 가진 것 같긴 했다.
이제는 아빠가 날 미워하는 것처럼 느낄 때, 천지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없으니까.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집>중에서-

한국에서 하나 뿐인 오빠가 책을 잔뜩 보내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오빠는 늘 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던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는 한결같음으로 제 곁에 있어주는 오빠는 언제나 저의 든든한 아군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다시 한번 오빠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오빠..고마워요~~^^

언젠가 칼럼에서 (혼자 굴러가는 아이들 #36 ) 공지영의 산문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산문을 쓰기 전의 작품이 이번에 인용을 하게 된 소설 '즐거운 나의집'입니다.
---개인적으로 공지영은 무척 좋아하는 작가는 아닙니다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자꾸 공지영의 작품을 인용하게 되네요.^^
그녀가 역시 글을 잘 쓰는 사람이기는 한 모양입니다.--

세번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사는 딸 '위녕'의 눈으로 적어 내려간 소설 속에는
성이 다른 동생 둥빈과 제제가 있고,
세상 사람들이 비록 비난할 망정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나름 행복을 아는 엄마가 있습니다.
엄마의 집에는 각이 잡힌 책장도 없고 액자에도 윤이 나지 않지만
소파도 둥글고 쿠션도 둥글고 책상도 삐뚜름하게 놓여있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어떤 일에든 좋은 점도 있음을 명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엄마는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평생을 미숙하게 살았던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고,
일자 무식한 여자처럼 갈팡거리고 질팡거리기도 하며
아픈 아이를 위해 허벅지살이라도 베어 입에 넣어줄 것 같은
봉건적인 엄마가 되어 처연하게 굴기도 합니다.

아빠와 함께 살다가 다 커서야 엄마와 살게된 위녕은
엄마와의 삶 속에서 슬픔을 치유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 아니라
때로는 정의보다는 사랑이고 이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새엄마를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쳐다볼 수도 있습니다.
섣불리, 쉽게, 모두 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 해도, 그건 다른 일이라 해도
이제는 그저 어쩌면 동등한 한 결점투성이 인간을 바라보는 여유까지 싹틉니다.
위녕이 그토록 바라던 어른이 되는 일이 십 미터 전방으로 와 있게 된거지요.  

위에 인용한 글은
아빠와 새엄마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후 위녕이 아빠의 집에 다녀온 다음에 엄마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엄마가 말한 <집=베이스캠프>라는 공식을 지지합니다.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든지 간에 쉴 수 있는 곳이 집이라고~
천지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없는 곳이 집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집이 호화롭고 삐까뻔쩍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치면 쉴 수 있고, 눈보라 비바람이 몰아치면 돌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다가 날씨가 좋아지고,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이 생길 때 다시 떠나면 되는 곳입니다.

위녕은 위의 대화가 끝난 후 제제와 둥빈을 재우고 엄마와 생맥주를 마시고 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문득 가족에 대해 생각합니다.
가족이란 밤늦게 잠깐 집 앞으로 생맥주를 마시러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팔짱을 끼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리고 편안히 각자의 방에서 잠이 드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라고요.^^

아이들과 함께 지지고 볶고 토라지고 싸우고, 울고 웃고 야단법석을 떠는 하나하나가
가족이니까...이 세상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된 사람이니까....라고 생각을 하니
비록 싸운 적이 있어 기분 나빠도,
비록 토라져서 눈물 콧물 다 뺐어도,
어쩐지 하늘에게 큰 선물 하나를 받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가족이 있어 든든합니다.^______^
이 자리를 빌어 우리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