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아닌 시작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앤'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내 머리 속에 스쳐가는 수많은 에피소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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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 웃음. 나의 청춘. #앤의 사랑. 나의 추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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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들이 앤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모르게 뒤섞여 가득해 버릴 만큼 앤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앤을 뺀 내 인생은 텅 비어있다고 느껴질 만큼 나의 감성은 늘 앤과 함께 해 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내 사십인생만큼 긴 이야기이고 앤이 쓰여진 지 백여년만큼 또 긴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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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보았던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으로 시작하는 애니메이션은 내 또래라면 누구나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킬 향수 가득한 작품이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그 만화로 앤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나에게도 그 만화는 앤 그 자체이다. 대학교 때 전 작품 DVD 리미티드 에디션도 사서 간직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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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에게 진정한 앤과 함께 하는 삶의 시작은, 아주 아주 오래된, 너무도 낡아버린 노란, 아니 누런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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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감아도 떠오르는 나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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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낡아서 아주 누래져버린, 그것도 심지어 세로문장으로 써진 그 옛날 책.

바로 1963년 창조사에서 나온 신지식 번역의 앤 시리즈이다. 나에게 있던 그 책은 엄마와 이모들이 그 옛날 구해서 읽었던 것으로 나에게 소중하게 건네져 온 것이었는데 전 시리즈가 다는 없었고 여섯 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출판본은 너무나 글씨가 작고 종이는 누렇고 해져서 읽기가 열악하여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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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받아서 소장만 하고 있었으며 그 전에 문자로 내가 접한 앤은 계몽사에서 나온 세계동화 전집 중에서 앤 시리즈 1,2권을 편집해서 낸 ‘#빨강머리 앤'이다. 이 책은 ‘이석봉’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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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계몽사로 시작된 빨강머리 앤 앓이는 엄마가 물려준 낡은 책으로 이어졌는데 얼마나 얼마나 그 책을 사랑했던지, 안그래도 낡았던 책은 나에게 온 순간부터 더욱 너덜너덜해졌다. 세로로 되어있고 글씨가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읽고 읽고 또 읽어서 책은 자꾸만 뜯어져갔고 나는 다시 테이프로 붙여가며 읽었다.

자기 전의 어떤 의식이랄까. 워낙 책을 좋아했던 나였기에 책을 읽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지만 대학입시에 매어 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책 읽는 것조차 죄악시 될 때였으므로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자기 전의 아주 짧은 시간 뿐이었다. 그것도 주로 주말에. 평일에는 늘 열두시 넘어 침대에 쓰러지면 그대로 잠들어버리기 바쁜 일상이었으니까. 그때 달콤한 주말밤에 앤 책을 한 두 에피소드씩 읽으며 꿈꾸며 잠든 시간들은 바쁜 고등학교 생활 중 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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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앤이 길버트의 청혼을 받는 장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장면이었다.

​나는 한 가정을 꿈꾸고 있어요. (갑자기 뜬금없이 존댓말 등장인데 이게 또 너무 잘 어울렸던 번역) 그 집에는 개와 고양이가 있고, 난로에는 불이 타오르고, 친구의 발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네가 있는.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들릴 정도였다. (정확한 문장은 아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번역은 이러하다.)

하던 길버트와 앤의 고백이 지금도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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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참으로 좌절스러운 비극을 하나 이야기하자면 그 소중한 초판번역본 책을 다 갖다버리신 우리 엄마의 만행이다. 내가 공부안하고 책만 읽을까봐 걱정하셔서 그 중요한 책을 몽땅 갖다 버렸다는 엄마의 변명은 지금까지도 내가 두고두고 엄마를 원망하는 대목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이십년이 넘도록 엄마는 변명하고 나는 원망하고를 반복해 오는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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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대학에 들어간 이후 교보문고에 가서 신지식 선생 번역본 앤을 찾다가 참으로 감사하게도 딱! 두 권을 발견하게 되어 지금껏 소장 중이다. ‘앤의 친구들'- 사실 이 책은 실제 앤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쉽다 - 과 ‘앤의 행복' 편이다. 아마 이 편집본은 1985년 판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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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후 전권을 사서 소장한 새로운 번역본은 2002년 동서문화사의 ‘김유경’ 번역본이다. 나로선 간직하고픈 옛 문체를 싹 빼버린 현대적 번역이다. 아쉬운대로 소장하고 종종 읽지만 내가 썩 좋아하는 번역본은 아니다.다만 매 책의 뒤에 특집처럼 그 당시의 문화나 작가 등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는 점이 좋다.

​애니메이션도 마르고 닳도록 보았고, 앤 영화 넷플릭스 시리즈도 다 보았지만 그 번역본만큼 앤의 감수성, 작가의 분위기를 잘 살린 책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적어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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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쩌면 지금 내가 보는 번역본들에 빠진 것은 작가의 번역이 아니라 고등학교 그 시절 나의 감수성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이란 목표에 강요당하며 오직 책과 꿈 속에서만 나의 감성을 녹여낼 수 있었던 그 때 그 시절 나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감수성. 내가 지금도 찾아헤매는 건 신지식 번역본이 아닌 그 때 그 시절 나의 모습. 나의 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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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열심히 하느라고 요즘 미씨방에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당분간은 제가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는 '내 인생의 빨간머리 앤 이야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관심가져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