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TV 드라마 제목 중에 ‘봄이 오나 봄’이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드라마 내용이나 주인공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제목은 잊히질 않았다.

오직 한국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이 얼마나 기특한 언어의 유희인가.

‘봄’이라는 명사와 ‘~하나 보다’라는 조동사의 줄임말인 ‘봄’이라는 동음이의어가 만나

한 번 들으면 기억에 콕 박혀버리는 제목,

참 한국 드라마 관계자들 똑똑해, 요런 참신한 생각을 해내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과연 내 인생에도 봄은 올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남들은 은퇴를 계획하고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과정인 나이에

과연 나에게도 봄은 올까? 하는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겨울은 갔다.

라스베가스의 겨울은 생각보다 추웠다.

사막따위가 추워봤자 하고 얕잡아 봤다 깜짝 놀랐다.
거짓말 조금 보태 바람 부는 날에는 한 덩치하는 내가 날아갈까 무서웠고

타주에서 이사올 때 다 정리하고 온 밍크코트가 사무치게 그리운 겨울밤 추위였다.

더 서러운 건,

추워 죽겠는 집 안에서 개스 값 무서워 히터도 빵빵하게 못 트는 나,

오직 나만의 서러움은 아니었으리라.

워낙 더운 여름을 보냈기에 겨울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이고 그래봤자 한 겨울 기온이 낮으면 30도 전후로 

섭씨로 치면 영하권으로 내려갈까 말까 한 정도의 추위다.

한강이 꽁꽁 얼어버리는 한국이나, 상상도 못할 칼바람이 부는 시카고, 

눈폭탄이 일상인 뉴욕에 비하면 당연히 세발의 피다. 

지 아무리 추워봤자 호텔 안으로 들어가면 따뜻했고 방 안은 아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추웠다. 

날씨만큼이나 마음도 가슴도 이성도 감성도 꽁꽁 얼어버렸다.

지구 상에 나 홀로 달랑 버려진 느낌,

목 놓아 꺼이꺼이 울고 싶은데 눈물마저 말라버린 느낌, 

나 보다 힘든 사람 많고 많을진 데 배 부른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렇게 생각할 수, 분명 있다.

하지만 한 겨울 내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일까?

그래도 시간은 간다.

예전 어르신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시간이 쏜살같다.

니들 나이 젊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라.

나 원 참, 하루하루가 지겹고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는데 웬 꼰대같은 소리람?

비아냥거렸었다.

젊음의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이가 주는 막대한 베네핏을 차마 실감하지 못했다.

나는 젊었었고 부와 명예도 있었다.

영원할 줄 알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환경이, 행운이, 언제나 내 곁에 머물 줄 알았다.

내가 맘만 먹으면

젊음도 돈도 명예도 언제나 꺼내 쓸 줄 있을거라 자만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식한 사고방식인가.

이 얼마나 구태의연하고 이기적인 자존심이란 말인가.

젊은 날의 객기라고 치기엔 조금 부끄럽다.

나는 이렇게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봄이 오기는 할까?

하루로 치면 어스름한 저녁길, 계절로 치면 늦은 가을의 문턱,

일생으로 치면 생을 정리하고 나를 되돌아 볼 시기에 스스로 반문한다.

내 인생에 봄이 다시 오기는 올까?

솔직히 말해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고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태함이 싫었고 게으름을 용서 못했다.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하곤 상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살찐 사람을 무시했다.

오직 내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내 몸뚱아리 하나인데

살 따위 빼지 못해 전전긍긍 하는 사람 코웃음 쳤다.

그랬다, 사실 그랬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갑상선 저하증이라는 그럴싸한 핑계 하에 하염없이 뚱뚱해지고 있는 중이다.

의사 박사 전문직이 아니어서 일을 하고 또 했다.

돈 많은 부잣집 딸임에도 불구하고 좋아서 했고 성취감도 있었다.

샤넬 백을 사는 대신 집 앞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즐겼고

세 가지, 네 가지 일을 하며 스스로 뿌듯해 했다.

엄마 병원에 출근을 했고, 개인 디자인 회사를 운영했으며

식당을, 술집을 운영하면서 틈틈히 글을 썼다. 책도 여러 권 냈다.

불면증이 뭔지, 하루 온 종일 일하면 저절로 잠이 든다 믿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갱년기라는 그럴싸한 핑계 하에 오늘도 잠들기 위해 약 통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