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역꾸역 밥 숟가락 입에 넣다 문득, 운전 하던 중 신호등에 잠깐 서서 문득, 정신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더 미친듯이 일하다가 또 문득 ‘나 뭐 사는 게 이래?’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본다. ‘사는 게 뭐 이리 그지같애?’ 짧은 한숨과 함께 하루에도 몇 번이나 무의식 중에 튀어나오는 질문이다. 찬란했던 라떼의 시절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왕년에 좀 날렸다는 유튜브 동영상을 재생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나는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사는 게 팍팍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엔 나 혼자 뿐, 다시 한 번 묻는다. 나 지금 행복하니? 그리고 대답한다. 사는 게 뭐 이래? 그냥 콱 죽어버릴까?? 

사는 게 뭘까? 왜 살아야 하는 걸까? 태어났으니까? 죽을 용기가 없으니까? 엄마 때문에?? 애들 때문에?? 웃기고 있네. 그냥 사는 거야.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일말의 책임감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코딱지만큼의 양심만 있다면 다행이겠지. 가끔씩 뉴스에서나 보는 무시무시한 여자들 좀 봐봐. 아이를 학대하질 않나,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고.. 아이구 무서워, 나는 호러 무비도 못 보는데.. 살면서 생각, 아니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사건들을 접하면 기사조차 읽기 힘들어 지고 심장부터 벌렁벌렁하는 걸 보니 나는 사이코 패스도 아니고 남한테 피해 준 거 1도 없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 걸까? 해답없는 질문을 스스로 쏟아내고 자책하다 잠 못드는 밤의 연속이다.

#아는 동생

그 애는 참 예뻤다. 지나가면 남자들이 흘낏흘낏 쳐다보기 일쑤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얻은 전리품처럼 나는 그녀를 내 옆에 끼고 다니는 걸 즐겼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대시할라 치면 ‘얘는 안돼요!’ 라고 막아서는 게 나만의 권리이자 특권이었다. 비즈니스 미팅 특히나 술자리에 대동이라도 하면 그 어렵던 계약 건이 척척 성사되기도 했다. 그 어떤 조건보다 앞서는 게 여자의 미모라는 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왜 즐겼는지 지금 생각하면 낄낄 웃음만 난다. 예쁜 여자 앞에서 헬렐레 눈 돌아가는 추잡한 남자들을 이용해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쪽팔리기도 하고 말이지. 아무튼 여자에게 미모란 그 어떤 무기보다 강했다. 돈도 명예도 학벌도, 인생에 하나 쓸데 없는 착한 마음씨도 다 필요없다. 예쁘면 최고였다.

그녀가 의사 집안에 시집을 갔다. 남편 뿐 아니라 시할아버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의 누나, 그 누나의 남편인 매형까지 모두 의사에 대학 교수 출신으로 한마디로 짱짱한 집안의 외며느리로 발탁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키 3개(당시에는 부잣집 여자가 의사 사위 보려면 키 3개를 준비해야 했다. 집 키, 자동차 키, 병원 키)를 담보로 한 결혼도 아니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녀의 집안은 감히(?) 비교조차 안되는 평범 그 자체였다. 남자 집안의 무시무시한 반대가 있었지만 아까도 얘기했지? 이뻤다고? 겁나게 이뻤다고?? 의사 남친의 끈질긴 구애 끝에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결혼에 골인한 경우였다. 

강남 한복판, 리츠칼튼 그랜드 볼룸에서 2천 명에 육박하는(동네 일대 교통이 마비 됨)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호화로운 결혼식이 열렸다. 그리고 정확히 3년 후 그녀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내 방보다 넓은 그녀의 전용 화장실 욕실에서 목을 맨 채로 말이다. 시신이 수습된 지 하루 만에 화장을 해 정확한 원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결혼 생활 3년 내내 숨쉬는 인형으로 살았다고 한다. 아무런 얘기도 의견도 생각도 피력할 수 없었다고. 남편의 바람기와 시부모의 구박이 자살 원인일 순 없겠지만 화려함 속에 감춰진 지독한 외로움의 굴레는 충분히 자살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게 중론이었다.  

#아는 친구

그 친구는 참 씩씩했다. 평범한 집안에 평범한 외모, 평범한 학벌에 평범한 스타일로 크게 모자라지도 그렇다고 크게 뛰어나지도 않은 그런 친구였다. 단 한 가지 그녀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성실함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으며 학교를 다닐 때나 회사를 다닐 때도 지각이나 결근은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반드시 해내야 직성이 풀렸고 안되면 되게 하라는 명언대로 사는 친구였다. 

역시 평범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이런 저런 고난과 역경도 있었지만 두 아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녀에게 위기가 닥친 건 한국에 사는 남편의 여동생이 본인 딸을 미국에 유학시키려 하면서 부터 시작됐다. 팬데믹 전, 한국의 시댁 가족들이 미국에 자리 잡은 그녀의 집에 여행을 오면서 남편과의 마찰이 불거졌다. 시부모님, 여동생과 남편에 딸까지 처음에는 오랫만에 만난 남의 편 가족이지만 반갑기도 했고 또 내가 통역하고 내가 운전해 미국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 주는 재미도 나쁘진 않았다 사실. 

하지만 호의가 지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3주 씩이나 그 집에 얹혀 있으면서 방 값은 고사하고 기름 값, 밥 값 한 번 내지 않는 시댁 식구들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선 흔하지만 한국에선 불가능한 넓은 뒷마당 덕에 그녀가 돈이 많은 줄 착각하는 듯 했다. 미국 사는 게 무슨 재벌인 줄 아느냐고, 누구는 돈을 쌓아 놓고 사냐고 남편한테 하소연도 해 봤지만 돌아 오는 건 핀잔과 구박 뿐이었다. 내 친구처럼 그 남편도 크게 잘난 건 없지만 모자라지도 않은 건실한 가장이었는데 시댁 문제 앞에서는 남의 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팬데믹이 지나고 서먹한 상태로 지내던 중 남편 여동생의 딸을 미국, 그것도 그녀 집에서 케어하며 유학 시키자는 말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혼을 결심했다. 진지하게 불가하다는 의견을 몇 번이나 남편에게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씨알이 1도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새끼도 거두기 힘들어 죽겠는데 한참 사춘기 시누이 딸 애를 내가? 왜? 미쳤어? 어림도 없다며 이혼을 선언했다. 이 따위 일로 이혼 운운한다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은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리고는 아직도 양육권과 페이 오프된 집 하나로 이혼 소송 중이다.   

#아는 언니

그 언니는 참 무식했다. 한가지 장점은 아버지가 돈이 많았다. 굉장한 장점이다.이 얼마나 부러운 장점인가, 쩝쩝… 아무튼 무식했지만 용감했던, 추진력 강했던 언니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똑똑한 남편을 골라 결혼에 성공하면서 신분 상승을 꿈 꿨다. 결혼 한 그 해, 언니는 잘난 남편의 더 큰 성공을 위해 유학을 보냈다. 나는 아버지 돈으로 인생 편하게 살지만 우리가 낳을 자식은 똑똑한 부모 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공부에 소질이 없으니 당신이라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박사가 되길 바란다는 게 언니의 취지였다. 해외 여행도 쉽지 않던 시절, 남편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언니는 한국에서 일하는 아마도 대한민국 최초로 소위 기러기 아빠도 아닌 ‘기러기 엄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는 듯 했다. 사이가 좋던 부부는 언니가 일년에 한 두번씩 미국에 들러 장거리 연애를 하듯 결혼 생활을 이어 갔고 남편은 랭귀지 스쿨을 시작으로 4년 제 대학, 다시 MBA(경영학 석사)를 거쳐 변호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로스쿨 대학원을 진학했다. 그 동안의 모든 생활비와 학비를 비롯한 비용은 전액 언니가 지불했다. 공부하기 좋아하던 남편과 돈 많은 아버지를 둔 무식하지만 용감한 언니는 환상의 커플처럼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IMF가 터지고 모두가 어려워지면서 언니 아버지의 사업도 휘청이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건설사인지 시공사인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기꾼들의 조직적 범죄의 타깃이 되어 전 재산을 잃는 비극을 겪게 된다. (글을 쓰면서도 무슨 영화 시나리오 같음, 쯧쯧..)

당연히 남편에 대한 지원이 끊기게 된다. 어떻게든 공부를 마치게 하겠다며 미국의 남편 곁으로 달려 가 평생 안 해본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뒷바라지를 계속했다. 하지만 영어도 미국 생활도 서툴렀던 언니는 낯선 타국에서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부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식당 주방 아줌마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돈을 쓰는 법만 알았지 버는 방법이나 저금하는 당연한 상식조차 알지 못했던 언니는 미국에 있던 남편이 영주권을 핑계로 이혼해 달라는 소식과 함께 화려했던 영광을 과거로 묻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