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LA에서 이메일을 보내오는 독자가 있다. 유학왔다가 교포남자 만나 결혼하고 아들 하나를 둔 평범한 여성이라 하길래 그런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중에 봤더니 결혼 전, 한국 유력일간지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던 재원이었다.

이 여성이 편지에서 나를 칭하는 호칭이 ‘선생님’이다. 학벌로나 실력으로나 경력으로나, 모든 면에서 나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이로부터 듣는 선생님이란 호칭은 영 편치않았다. 거북했다. 마치 맞지 않은 남의 옷을 입고있는 것처럼. 나란 존재는 선생님이란 호칭이 전혀 어울릴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선생님이란 호칭, 요즘은 그야말로 흔해빠지고 가치가 떨어진 호칭이지만 사실은 정말로 존경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그러니까 타의 모범이되고 모든 면에서 주위의 우러럼을받는 사람이 들어야하는데.

우리 동네에서 선생님이라 불릴 만한, 그러니까 그 호칭이 어울리게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찬찬히 주위를 훑어보았더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할배만큼은 선생님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겠다 싶었다.

이 할배의 생김새는 볼품없다. 키도 작고 비쩍 말랐고 머리카락도 없고. 스탁하는 종업원도 없이 혼자 큰 한국마켓을 30년동안 운영하면서, 오랜 중노동으로 인해 무리가 간 허리와 어깨때문에 자세도 바르지 못하고 구부정하다. 그러나 마음 씀씀이는 이 동네 최고다. 내가 50년 넘게 살면서 이 할배처럼 나눔의 삶을 직접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안 쓰면서 (티셔츠 한 벌을 안 사 입는다. 할배가 입은 옷은 모두 주위 사람들로부터 물려받은, 남이 입던 것들)남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를 여는 할배. 할배가 가장 많이 기부금을 내는 데는 한인사회. 한인 단체 중 이 할배의 기부금을 받지 않은 데가 없다. 액수도 후하다. 500달러 아니면 1000달러다. 주위에 어려운 사람에게도 알게모르게 후원금을 전하는데 그 기부가 그냥 일시적인 게 아니다. 매년이며 일 년에도 몇 번이다. 이 할배를 처음 만난 게 30년 전이니, 필경 그 전부터 기부활동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기부금을 모두 합치면 집 한 채는 거뜬히 사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할배가 말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라고. 어머니가 생전 누누이 말했단다. 교회에 십일조를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만약 교회에 나갈 상황이 안 된다면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사회에 환원하면서 살라고.

할배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나도 한때 한인단체에 적지않은 기부금을 냈었다. 한인회, 한국학교, 암환자 협의회, 그리고 육이오 참전 전우회. 내 비록  없는살림이지만 성의껏. 적게는 2백불에서 많게는 1천불까지. 그런데 후원금을 받은 단체들이 재정보고를 전혀 안 한다. 자기들의 모임은 늘 비싼 식당에서(신문에 게재된 사진이랑 기사로 자연적으로 알게된다)가지면서.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낸 후원금이다. 어느 용도로 쓰이는지는 기부자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절 모르고 시주할 수는 없는 일이니. 게다가 걸핏하면 단체장이 공금을 유용했다는 소식만 들리는가운데 한 단체에서 내가 준 돈때문에 큰 싸움이 났다. 체크아닌 현찰로 1천불을 주었는데 중간에서 누가 착복을 한 것이다. 이 일로 회장이 물러나는 등 난리를 쳤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 후로 기부하는 일을 중단해버렸다.

할배는 일단 내 손을 떠난 돈은 그 사람들 소관이니 어떤 용도로 쓰여지든지 일체 관여를 않겠다고한다. 이것저것 따지다보면 절대 기부할 마음이 안 날 거라면서. 나는 할배처럼 마음이 태평양같지 못하니까.

이 할배를 존경하는 이유가 또 있다. 한글맞춤법에 관해서 이 할배를 따라갈 자가 없다는 점이다. 일흔이 넘은 할배인데, 그리고 미국온 지 50년이 가까워오는데도 할배는 교과서처럼 정확한 맞춤법을 구사한다. 고 김근태, 손학규 씨등  걸출한 정치인을 배출했던 한국최고의 고등학교에서 반장을 도맡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책과 신문을 손에서 놓지않은 결과일 것이다.

얼마전, 한국에 사는 고향 남자친구 하나랑 ‘카톡’으로 할배 이야기를 했는데 신기하게도 둘이 같은 대학출신이다. 할배의 학번을 묻길래 알려줬더니 그가 말했다.

“영광인줄 알아라, 그런 훌륭한 분이 네 옆에 계시다는 것을. 까불지말고 잘 해드려...”

친구의 말인즉슨 할배의 학번들은 그 대학의 전설로 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서울대를 포기하고 장학금 및 기숙사를 제공하는 그 대학을 선택했던 수재들로 이루어진 학번들로.

아닌게 아니라 최근, 이 할배는 한국의 한 고아원에 한 달 5백달러씩 후원을 시작했다고한다. 친구말대로 장학금과 무료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대학을 마쳤던 할배. 그때 받았던 장학금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던 차, 도움이 절실하다는 고아원을 알게 돼 마침내 그 뜻을 펼치게 된 것이다. 화장실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확연하게 다른 요즘 세태에 정말로정말로 대단한 할배가 아닌가.

이십 몇년 전, 이 할배가 한 인사와 러닝 메이트로 한인회 회장단 선거에 출마, 다른 팀과 경선했던 적이 있다. 경선이 붙었으니 이기기 위해 당연히 선거운동을 했을 터. 당시 이 지역에 ‘무궁화 친목회’라고 막강한 한인단체가 있었는데 꼭 필요한 기기가 있었으나 가격이 비싸 선뜻 구입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할배가 약속했다. 선거에서 이기면 그 기기를 기증하겠다고. 그러나 애석하게 몇표 차이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이 할배는 그 기기를 기증했다. 할배가 말했단다. 이겼든 졌든 전 회원들이 선거에 힘써 준 게 고맙다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 할배가 자신과 경선붙었던 회장단을 위해 평이사로 들어가서 봉사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기자를 해봐서 안다. 감투 쓰고 신문에 이름나기 위해 나와 설치는 사람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한인사회 발전에 공헌하기 위해 나온 사람인지. 이 할배는 진정으로 한인사회를 우선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할배말고도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있다. 자신은 실밥이 여기저기 터진 낡은 핸드백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한인사회에 아낌없이 기부금을 내는 K씨, 식당 부엌일에 손이 마를 날 없으면서도 동물 구호단체를 계속 돕고있는 W씨도 이에 속한다.

우리는 학식이 높거나 무에서 유를 일구거나 상상할 수 없는 부를 이룩하거나 특출한 재능으로 인류사회에 이바지한 사람을 우러러보고 존경한다. 사회발전이나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사재를 털어 기부하는 사람도 물론 존경을 받는다. 그 중에도 나눔의 삶을 직접 실천하며 사는 사람, 즉 기부를 잘 하는 사람은 특히 더 존경받아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생 남을 위해 밥 한끼를 나누지않는, 1달러를 가지고도 벌벌 떠는 사람 천지인 요즘 세상에 아무 댓가없는 곳에 내 주머니를 풀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돈이 있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을 실행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존경의 대상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