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시간이라며 내 큐비클을 찾아 온 ‘낭’이 전화기를 꺼내면서 말했습니다.

“새 티셔츠로 갈아 입으라고한 후 한 장 찍었어. 너 보여주려고...”

나는 낭이 건네주는 전화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제이슨의 모습이 들어있네요. 고심하며  골랐던 셔츠가  제이슨의 몸에 잘 맞는 것 같았습니다. '라지'를 사면 맞을 것 같다는 낭의 말에 설마 그 정도로 몸집이 줄었을까, 했는데 낭의 말이 옳았습니다 제이슨의 배는 아주 훌쭉했고  팔다리도 많이 가늘어졌고 그동안 살속에  파묻혀있던 목이 쑤욱 빠져나와 있는 게 보였어요. 

짐작은하고 있었지만 제이슨의 눈빛이 많이 슬퍼보였습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은 형연할 수 없이 슬픈 빛을 띄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든대, 셔츠가? 티셔츠를 담았던 박스는 왜 들고 있대? 티셔츠보다 박스가 더 마음에 드나보지?”

압니다. 셔츠쪼가리 하나가 제이슨이 현재 처한 상황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쌀알 만큼의 작은 위로라도 되었길 바랐습니다. 낭이 대답했습니다.

"아무말 안했어.  니 '시스터'에게 전하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라고 했지만 그냥 묵묵부답이었어...”

무슨 말을 하고싶었겠습니까.

이 딱하고 가엾은 남자를 처음 알게 된 건 직장에서였습니다. 내가 지금의 직장에 일하게 된지 1년 후 쯤, 제이슨이  입사를 했고 내 옆자리 동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10여년동안 친 자매처럼 믿었던 인간한테 뒷통수를 호되게 맞은 후부터는 새로운사람과 인연을 맺는 걸 주저하는 지금이지만 그때만해도 동네 참견은 다 하며 오지랍을 펼칠 때였습니다. 내가 먼저  제이슨에게  가서 인사하고 말을 걸었지요. 제이슨은 별로 친화적이지 못한 남자였어요.  내 물음에 예스 노, 단답으로만 일관합니다. 이것저것 먹을 것을  갖다주고 일도 도와주어도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인가보다, 내성적인 사람인가보다했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어요. 나중에 친해지고보니 말도 많고 농담도 잘 하는 재밌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처음에는 뜸을 들였냐고요. 뜸을 들인 게 아니었어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매일 잠을 설칠 만큼 아주 힘들고 안타까운 사정이.  부인이 제이슨 곁을 떠나버린 사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회사에 입사했을 무렵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제이슨이 베트남에서 데려온,  오, 제이슨이 어느 인종인지 얘기를 안 했네요.  제이슨은 베트남, 아니 중국남자라고해야 옳겠습니다. 모친이 베트남인이고 부친이 중국인이었으니요.

어쨌든 베트남에서 여자 하나를 데려왔다고합니다. 베트남에 있는 친지의 중매를 통해서요. 베트남까지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요. 결혼앨범을 회사에 가져와서 보여주었는데 들러리까지 세운 꽤 성대하고 화려하게 올린 결혼식이었습니다. 부인은 인물이 출중한 여자였네요.  짙은 화장이 아니더라도 영화배우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예쁜 여자였습니다. 제이슨보다  여덟살이나 어리다고했는데  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하고 머리가 벗겨지지 시작한 사진속의  제이슨보다  외모로는  월등히 나아보였어요. 그래서 그런 불상사가 생겼나봅니다.

제이슨이 시민권자라 부인되는 여자는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는 날부터 제이슨이 부인을 위해 많은 애를 썼다고 해요. 영어도,운전도, 미국물정도 모르니 제이슨의 도움없이는 꼼짝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제이슨은 하나부터 열까지 성심을 다했을 테고 어리고 예쁜 부인은  하루가 다르게 미국생활에 적응해갔겠지요. 

문제는  베트남에서 상상한 것과는 달리 남편이 아주 별볼일 없는 남자라는 걸 여자가 인지하고부터였을 겁니다. 베트남에서는 제이슨이 '재미교포'라는  환상적인 신분의 남자였는데 막상 미국 와서  살면서 미국실정에  눈을 뜨고보니  최악의 상황을 가진 최악의 남자라는 걸 알게 되었겠지요. 돈도  많이 못 벌고  열심히 살지도 않고  자신을 돌보지않아  외모는 점점 망가지고 게다가 시집식구들이랑 한 집에서 드글거리며 살아야 하는 상황. 그래서  여자가 떠나버린 것일 겁니다. 제이슨은 부인이 떠나버린 이유를  일체 언급하지 않지만 그동안 내가 지켜본 제이슨의 모습으로 미루어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 보살펴주었던 부인이 떠나버린 충격에 의해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던 제이슨.  가엾은 남자입니다만 사실 나라도 떠났을 겁니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여자라면 제이슨을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위에 쓴대로  제이슨은  정말 최악의 남편이었습니다. 일단 엄청 게으릅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뭘 해보겠다는 의욕이 없어요. 부모의 영향으로 제이슨은 베트남어랑 중국어, 두 나라 말을 완벽하게 합니다. 여기서 태어난 남자답게  완벽한 영어까지.  세 나라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니 마음만 먹으면 월등하게 보수 높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죽으나사나 우리 회사에만 처박혀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기본적인 영어만 구사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급료가 아주 형편없어요. 조금만 밖으로 눈을 돌리면 될 텐데 그는 현실에 그냥 안주합니다.

그러면 회사일이나 제대로 하냐, 그것도 아닙니다. 틈만 나면  책상에 코를 박고 꾸벅꾸벅 졸아요. 또한 코까지 드렁드렁 골며 자다가 상사한테 들킨 게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늘 출근시간에 늦는데다 걸핏하면 회사를 빠집니다. 석달이란 기간동안  두 번 이상의 결근이나 세번 이상의 지각이 있으면 보너스를 못 받는 규정이 있는데 제이슨은 단 한번도 보너스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굉장히 더럽고 지저분합니다. 일 주일에 목욕을 한 두번이나 할까요. 게다가 담배까지 피웁니다. 옆에 가면  냄새가 장난이 아닙니다. 내가 ‘니 네집은 물값이 되게 적게 나오겠다’ 고 언질을 주어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 남자이니 여자가  옆에 붙어있는 게 이상할 정도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부라더’라고 부르며  가까이한 것은 심성은 참 착한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짖궂은 농담을 해도 생전 화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늘 하하하, 웃습니다. 무엇보다  친절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뛰어납니다. 동료의 생일을 맞아  한 가지씩 음식을 가져오는 파드럭을 했을 때마다  이 남자의 친절한 마음씨가 드러납니다.  배가 고프니까 너도나도 앞다투어 음식을 푸는데 제이슨은 단 한 번도 먼저 나서서 음식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휴게실에서 얼음을 가져오고  플라스틱 포크, 나이프, 페이퍼 타올등을 갖다가 다 비치해놓아요. 먹는데 불편함이 전혀 없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물을 따라준다든지 접시를 건넨다든지해서 동료들 모두가 만족하게 다 먹은 다음에야  자기 음식을 덥니다.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매번.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한데다  부인을 떠나 보낸 그에 대한 인간적인 측은함까지 느꼈던 나는 해마다 제이슨 생일에 맞추어 티셔츠를 한 벌씩 선물했어요. 회사 점심시간 맞춰 매일 오는 음식트럭에서 음식 사먹을 돈은 있어도 깨끗한 티셔츠 한 벌이 없는 제이슨이었거든요. 티셔츠를 선물했을 뿐만아니라 남편 위해 특별식을 하는 날이면 조금 덜어 갖다주었고 한국식 감자볶음을 좋아하는 제이슨을 위해 가끔 감자를 깎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이슨이 베트남에를 다시 갔습니다. 나이가 마흔을 넘기는데 혼자서는 절대 살 수가 없을 거라고 옆에서 결혼을 다시 부추겼다고 합니다. 좋은 색시가 있으니 선을 보라고 했다나요. 그래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제이슨은 한 달 휴가를 내어 베트남으로 떠났습니다. 부디 수더분하고 착한 여자를 만나게 되길 빌었습니다.

한 달 후 돌아온 제이슨.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어요. 여자가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대요. 그래서 간 김에  아예 결혼까지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내 바람과는 달리 이번에도 아홉살이나 어리고 예쁜여자랍니다. 한 달동안 신혼의 단꿈에 빠졌다가 돌아와서인지  제이슨은 혈색도 좋아지고  밝아졌으며  말 수가 많아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제이슨에게 말했어요. 요즘 여자들은 그 누구도 시부모랑  한 집에 사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니까 와이프가 돌아오면 분가할 수 있도록 돈을 좀 모아라. 트럭에서 매일  음식 사먹는 것만 줄여도 꽤 큰 돈이 될 것이니  앞으로는 도시락을 좀 싸가지고 다니면 어떻겠냐. 제이슨은 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연로한 모친에게 저녁밥을 얻어먹는 것만도 황송한데 도시락까지 싸게 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제이슨은  베트남의 부인에게 생활비를 부쳐준다고 했습니다. 한 달에 3백불정도. 몇달 후 그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요구하는 액수가 높아진다고. 월급받아 점심 사먹고  부인한테 생활비를 부치고나면 어느 때는 개스비도 없는 것 같은 제이슨이 었습니다. 개스넣어야한다고 20불, 40불을 나로부터 빌려간 적이 많은 걸로  알 수 있었어요. 참 한심한 남자입니다.

몇 달후,  제이슨이 환한 얼굴로 내게 오더니 말했습니다. 베트남에 있는 부인이 임신을 했다고. 내가 대답했지요.

"잘 되었네. 드디어 너도 아빠가 되는구나..."

그러면서 나는 또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기까지 태어나면 돈이 더 들 터이니  앞으로  긴축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직장을 하나 더 잡는 게 어떠냐고요. 물론 귓등으로도 안 듣는 제이슨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베트남에서 부인이 미국까지 오는데 1년 넘는 기간이 걸렸어요. 육개월만에 미국땅을 밟았던 첫 부인에 비해서 배가 넘는 기간이었지요. 그래서  제이슨은 부인의 해산을 보러 베트남에를  또 갔습니다.  크레딧 카드를 긁어 비행기 표를 사서. 

한 달후 부인과 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들고 미국에 돌아온 제이슨.  상기된 얼굴로 제이슨이 말했습니다. 딸이 똑똑하고 영리한 엄마를  그대로 닮아서 태어난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벌써  자기랑 눈을 맞출 줄 알더라고.

행복해하는 제이슨의 모습을 보면서 제발 이번만은 아무일 없기를 빌었습니다.  ‘똑똑하고 영리한 엄마를 닮아서’ 라는 말에 불안감을  느꼈거든요. 똑똑하고 영리한 여자라면 절대로 제이슨의 꼴을 끝까지 보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트럭에서  매일 사먹는  햄버거랑 핫도그랑 감자튀김이랑 에그롤등 기름진 음식으로 인해, 그리고 하루 여덟시간을  책상에  앉아있는 생활로 인해(점심시간 1시간마저  앉아 있어요. 휴게실에서 전화를 들여다보거나 아니면 차에서 자거나)제이슨의 몸집은 풍선처럼 점점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1미터 60이 겨우 넘을까말까한  작은 키의 남자가 옆으로만 옆으로만 퍼지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자꾸 빠져요. 위의 머리가 거의 휑합니다. 여전히 담배는 피워대고  목욕을 자주 안 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다닙니다.

제이슨은 그렇다치고 무엇보다  걸리는 건 시집식구들입니다. 제이슨의 형이 하나 있는데 그도 뭐가 변변치 못한지 같이 살고 있답니다. 시부모, 시아주버니까지 있는 집에서  아이까지 데리고 같이 산다는 것, 생각만해도 숨이 막히지 않아요. 똑똑하고 영리한 여자라면 다른 생각을 하고도 남지않겠어요. 그 여자라고  생각이 없으며 눈이 없겠습니까. 극빈자나 다름없는 구차하고 초라한, 미래조차 암담한 생활에서 탈피하고자  첫 번째 부인처럼  제이슨 곁을 떠나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딸이 있다고하나  그게  새로운 시작을 하는데 방해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서른 몇살의 여자랍니다. 신세대 아닙니까. 예전 구세대처럼 내 운명이려니 내 팔자라니 참고 살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철딱서니 없이 딸 자랑을 늘어놓는 제이슨의 뒤에 장마철의 먹구름같은 시커먼 불행이 어른거리는 예감이 자꾸 드는 겁니다.

시간이 흘러 딸과 부인이 미국으로 왔다고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게 된 제이슨의 얼굴에  매일매일 밝은 기색이 넘쳤습니다.  언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올지 몰라 나는 아슬아슬한 마음이었지만  어쨌든 제이슨이 행복해하니까 나도 기뻤습니다.

부인이 오고  달라진 게 있었습니다. 제이슨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부인이 시부모집에서 두어달 살아보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나봅니다. 빨리 돈 모아 집 사가지고 나가자고했다는 것입니다. 그 첫 일환으로 쓸데없이 나가는 돈을 막아 생활비를 줄인다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라 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세 식구가 모두 제이슨의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달려있는데 분가계획이 아니더라도 응당 절약을 해야겠지요.

똑똑하고 영리한 여자라더니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습니다. 부인은 생활비만 절약모드에 들어간 게 아니라 직접 돈벌이에 나섰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키울 동안은 집안에만 있을 테니 운전은 천천히해도 된다는 제이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운전을 배워 면허를 땄고 곧 같은 동네 베트남인이 하는  식당에  웨이트리스로 취직을 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인의 취직을 반대하던 제이슨이었는데  얼마 안 돼 화색이 만면해졌습니다. 부인이 손이 빠르고 눈치도 빠른지 적지않은 돈을 팁으로 받아온 때문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한지 넉 달만에 차까지 샀다고했습니다.  마일리지가 좀 높은 차이긴 하지만. 어쨌든 장족의 발전입니다.

부인은  날이 갈수록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어요.그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나는  점점 더 제이슨이 걱정되었습니다. 물론 위에 쓴대로 제이슨의 부인이 혹시 변심을 하지는 않을까하는 염려때문이었습니다. 바깥 세상을 구경한 부인입니다. 이제 돈까지 벌게 된 부인입니다.  무능하고 게으르고 지저분한 남편, 바깥에서 보게되는 남자들이랑 비교가 되지않겠습니까. 비교는 신세한탄을 낳을 거고 남편꼴이 보기 싫어지게  될 거고 급기야는 떠날 생각을 하게되겠지요.

그러던 중 부인이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식구가 넷으로 늘게 생겼습니다. 도시락 싸오던 게 중단되었습니다. 임신으로 몸이 힘든 부인이 그냥  밖에서 사먹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부인이 싸준 입에 맞지않은 점심을 억지로 꾸역꾸역 먹던 제이슨은 신바람이 났습니다. 예전처럼 트럭에서 기름에 절은 음식을 사먹습니다.

식구가 넷으로 늘어날 판인데도, 그래서 악착같이해서 적은 액수나마 보너스를 받아 생활에 보탤 생각조차도 않는지 제이슨의  태만한 근무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않고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았어요. 밤에 아이가 우는 관계로, 그리고 둘째 임신으로 신경이 날카로울대로 날카로와진 부인의 시중을 드느라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예전보다 저 직장에서 조는 일이 잦아졌고 상사의 주의를 받는 빈도도 더  많아졌습니다.

어느 상사가 그런 직원을 길게 봐주겠습니까.  우려해마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이슨이 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세 나라 말을 하는지라  우리부서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이슨은. 그런데도 해고를 당했다는 것은 그의 평소 근무태도가 얼마나 나빴었는지 알 수 있지요. 나는 제이슨의 빈 책상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 금할길 없었지요. 해고를 계기로 제발 정신을 차리기를 빌었습니다.

사람은 안 바뀐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네요.  해고 당해서  상심이 크고 부끄럽고 배신감들고 화가 났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개과천선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도 제이슨은 여전한 것 같았습니다. 글 도입부에 쓴 낭으로부터 제이슨의 동정을 가끔 전해들을 수 있었거든요. 낭은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베트남 남자입니다. 제이슨이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서 계속 같은 동네에 사는지라 자주  만나 얼굴을 본답니다.

"아침에 출근 안 해도 되니 늦잠을 잘 수 있어 오히려 좋다고 하더라..."

제이슨을 대신해 부인이 부른 배를 내밀고 계속 식당에를 다니고 있다고했습니다.  그 부인은 무슨 죄로 제이슨같은  남자를 만났을까요.아니나 다를까, 부인은 아이를 낳고 얼마후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식당일을 그만두고  네일샵으로 직장을 옮겨 수입이 나아진 부인이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겠다며 이혼을 신청한 것입니다.

다시 혼자가 된 제이슨. 집에서 하릴없이 빈둥대던 제이슨은  몇 달 후에  부모님한테마저 내쫓김을 당해버렸답니다. 똑, 소리나게  영악하고 알뜰하고  부지런하던  며느리가 아이를 둘이나 낳고 이혼을 요청한 것은 자기 아들인 제이슨의 잘못이 전적으로 크다면서 더 이상  꼴을 봐줄 수 없다고했다는 것입니다.

오갈 데가 없어진 제이슨은 누구집 방 한 칸을 빌어서  겨우 비를 피하게됐다고합니다.  이제 빈둥거리며 놀면 입에 밥이 안 들어갈 터,  할 수 없이 직장을 잡았는데  어느 물류창고의  무거운 짐들을 옮기는 일이랍니다.  세 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 좋은 실력으로 왜 좀 더 좋은 직장을 찾지 못할까요.

그 소식을 끝으로  나는 제이슨한테로 향한 관심을 끊어버렸습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못하고 점점 나빠지는 제이슨의 소식을 전해듣고 스트레스 받는 게 싫어서였습니다. 가끔 휴게실에서 만나게 되면 제이슨의 소식을 전해주던 낭도 내가 달가와하지 않자 입을 다물었어요. 물론 12년 동안 한 해도 빼지않던 티셔츠 선물도 작년 생일엔 안 하고 넘어갔지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달이었습니다. 낭을 회사복도에서 만났습니다. 낭이 말했어요.

"이달 27일이 제이슨 생일인 것 아니?"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어요.

"그래서 어쩌라고?!"

낭이 말을 할까말까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제이슨이  딸 아이들의 유전자검사를 했는데...."

나는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무슨 뜬금없는 유전자검사? 그러다가 낭의 이어진 말을 듣고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두 딸이  제이슨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엄청난 사실을 최근에 확인했답니다. 커갈수록  제이슨의 모습을 조금도, 그야말로  손톱만큼도 닮지않은 두 딸을 보고 제이슨의 부모님은 물론 친구들도 주위에서도 모두 이상하다는 말을 했답니다. 처음에는 제이슨도 그런 말들을 귓등으로 들었다고해요. 그러다가 이혼하고 두 딸의 양육비를  지난 1년 동안 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한 달에  6백달러 정도를 줘야했다고하는데 그게  갈수록 엄청 부담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제이슨은 부인 몰래 유전자검사를  실행했고 두 딸이 본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결과를 받게된 것입니다.

유전자검사를 신청해 놓고 제이슨은 아주 초조하고불안한 모습을 보였다고합니다. 괜히 했다고  많이 후회했다고합니다. 힘들더라도 그냥 양육비를 줄 걸 괜히 쓸데없는 짓 했다면서. 

막상 결과가 나오자 거의 한 달을 두문불출했답니다.  그 누구의 전화도 안 받고 나오지도 않고 (몇몇 친구들이 모여서 토요일 아침마다 모여 커피를 마시는데 거기도 물론 안 오고)요.

제이슨의 신변이 걱정된 친구들이 제이슨의 집으로 쳐들어갔다고합니다. 다행히 제이슨은  살아있었다고 하네요. 폐인같은 모습으로 친구들을 맞았대요. 얼이 빠지고 촛점을 잃은 눈동자로. 그리고 살이 50파운드나 빠졌더랍니다. 한 달 사이에 50파운드나! 세상에,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얼마나 비탄스러웠으면. 무거운 짐을 밤새도록  날르는 일을  일 년 넘어하면서도  빠지지  않던 살이 한 달만에...

낭이 말했습니다. 

"위로도 할겸  친구들이  제이슨의 생일잔치를  해주기로 했어. 한 중국식당서 할 건데  올래? 네가 그 자리에 오면 제이슨이 많이 기뻐할 거야..." 

장소를 보니 다운타운쪽입니다. 운전을 잘 못해 다운타운 쪽으로는 혼자 못 갑니다. 남편한테 부탁하면 데려다 주기는 하겠지만 나는  별로 참석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언제 한 번 썼지만 나는 말로하는 위로를 잘 못하는 편입니다. 잘 한다고 칩시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하겠습니까. 위로를 한들 그게 제이슨한테 하등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는 낭에게 말했습니다. 참석을 안 하는 대신  선물은 하겠다고.

그날 저녁 나는 바로 쇼핑을 하러갔고 다음날  선물상자를 낭에게 주었습니다. 제이슨에게 전해달라고. 이왕이면 친구들이 열어준다는 생일잔치에 입고가라고. 그게 바로 위에 쓴 티셔츠입니다. 예전엔  엑스트라에서도 번호가 몇개 더 붙은 것을 샀어야했는데 낭이 라지정도면 맞을 거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살이 50파운드나 빠졌기로서니 라지가 맞을까 했는데 딱 맞는 겁니다. 

낭이 제이슨 사진을  내게 보냈습니다. 나는 한참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첫 번째에 이어 두번 째 부인까지 떠나보낸 남자가, 이제  곧 딸들마저 보내야하는 남자가  우울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인들이야 그렇다치고 그동안 귀여워마지않았던 두 딸들이 자신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 제이슨은 얼마나 망연자실했을까요.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요. 아마 죽고싶었을 겁니다. 

참 불행한 남자입니다. 그러나 그 불행을 제이슨이 자초한 것은 아닐까요. 정녕 제이슨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