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돈이 많은 한국할매가 한 분 있었습니다. 세상 떠난 남편으로부터 받은 유산이랑 연금이랑 젊었을 때 억척같이 일해 벌은 돈을 잘 굴려서 부자가 된 할매입니다. 돈은 많지만 할매가 지독합니다. 엄청 인색합니다. 자기 얼굴에는 몇백 불짜리 영양크림을 아깝지않게 척척 사 바르고 몇천 불짜리 코트도 망설이지않고 사는 사람이지만 남을 위해서는 단돈 1불을 쓰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걸핏하면 한인업소를 상대로 고소를 했답니다. 음식먹고 배탈났다고. 침 맞고나서 상태가 더 심해졌다고.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이 할매를 기피합니다. 괜히 엮였다가 경이라도 치르게 될까봐 무서워합니다. 할매의 성정이 그러하니 옆에 친구도 없습니다. 삼십대초반에 이 동네에 와서 거의 50년 가까이 살았다는데 친한 사람이 없어요. 가까이 사는 나밖에는.
20여년 전, 이 동네로 이사와서 강아지랑 산책을 나갔다가 차고청소를 하고 있던 할매를 만났어요. 언제 이 동네로 이사왔냐면서 이웃되어 반갑다고 할매가 반색을 하는데 아이고, 큰일났다 싶었습니다. 이 할매 평판이 안 좋다는 걸 진즉 알고 있었거든요. 인연을 맺고 싶지않았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모르는지 할매는 우리집에 자주 놀러왔습니다. 나 좋다고 오는 사람을 박절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마주보고 앉아서 커피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됐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끼니 때가 되면 있는 반찬에 같이 밥도 먹었고.
시간이 지나면서보니 예외로 할매가 괜찮아요. 소문에 듣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스크루지영감 저리가라할 만큼 지독한 짠순이라 들었는데 우리집에 올 때마다 뒷뜰에서 수확했다며 호박이며 고추며 파 등을 한아름 가지고 옵니다. 직접 담근 김치를 가져오기도 하고 부침개도 부쳐서 옵니다.
또한 할매가 아주 솔직합니다. 자기한테 치부가 될 법한 이야기도 숨기는 법이 없어요. 무엇보다 이야기를 아주 재밌게 합니다. 실패한 첫 결혼이며 미군병사를 만나서 미국에 들어오기까지의 이야기는 영화처럼 흥미진진하게 들었습니다.
이 할매가 시간이 많으니까 여기저기 기웃대며 잘 돌아다니는데 이 동네 소식을 다 물어다줍니다. 어느 집이 이사간다더라. 어느 집이 이혼했다더라. 어느 집 남편이 암에 걸렸다더라. 할매가 아니면 짐작도 못할 소식을 다 듣게 됩니다.
나는 할매한테 푹 빠졌습니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않으면 왜 놀러오지 않냐고 전화를 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나를 두고 주위에서는 걱정을 했어요. 질이 아주 좋지않은 할매다. 언젠가는 큰 코 다칠수 있을 터이니 멀리하는 게 좋을 거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같이 맞는다... 나는 할매를 두둔했습니다. 인정많고 솔직하고 재밌는 할매라고. 젊을 때 어쩌다 몇 번 행한 일로 '주홍글씨'가 새겨진 것 같다고. 당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대며 내 말을 안 믿었습니다.
지난 가을, 할매가 이 지역을 떠나게 됐습니다. 할매한테는 외아들이 하나있었어요. 공부를 꽤 잘해서 좋은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아들이라고했습니다. 며느리도 착하고 손주들도 할머니라면 껌뻑죽을 정도라 할매한테는 아들가족이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실제로도 그런것 같았습니다. 할매생일이며 추수감사절같은 명절때 아들가족과 늘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문제는 아들이 사는 지역이 할매랑 차로 6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는 데 있었습니다. 서로 얼굴 한번 보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할애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가족이 자기들 사는 그쪽으로 이사를 오라고 늘 종용을 한다고했습니다. 할매는 당연히 거절을 했겠지요. 50년 가까이 산 이 동네,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있는 동네를 떠나 어찌 낯설고 물선 데로 떠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할매의 연세가 여든을 바라보게되고 여기저기 아파서 병원신세를 지는 일이 자꾸 생기게되자 더 이상은 고집을 부리지못하고 여기 있던 집을 팔고 아들네동네로 이사를 가게되었습니다. 아들집 바로 옆에다 작은집을 마련해 살기로했다는 것입니다.
할매가 고심끝에 내린 결정이라 아무말은 못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나는 들었습니다. 아들부부가 자주 들여다본다고 했다지만 그들도 풀타임직장인들이며 자녀가 넷이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이야 멀리 떨어져서 일 년에 한 두번 보니 애틋하고 안타깝고 아쉽지만 자주 부딪치게 되면 아무래도 이런저런 문제가 야기 되기마련입니다. 분명히 아들가족과 갈등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일절 내색하지 않고 할매가 떠나기전,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하든 나한테만은 친절하고 정답던 할매였습니다.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 금할길 없었습니다. 할매도 '딸처럼 여기고 의지했는데'라며 연신 눈물을 훔쳤습니다.
할매는 이사간 후에도 가끔 전화가 왔습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무료하고 심심해서 미칠지경이라고했습니다. 문 밖만 나가면 가게고 식당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여기와는 달리 그곳은 새롭게 조성되는 동네라 주택 외에는 다 허허벌판이랍니다. 바깥에다 의자를 내놓고 하루종일 앉아있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볼 수 없답니다. 아들며느리도 처음에는 매일 와보는 것같더니 나중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코빼기도 안 비춘답니다. 머리 자를 때가 되어 미장원에 가야하는데 며느리가 몇 번이나 약속을 어겼답니다. 천지사방을 분간못하니 미장원 한 번 가는 것도 천상 며느리신세를 져야하는 할매였습니다.
나는 짐작했습니다. 할매가 그곳 생활을 견디지못하고 도로 이쪽으로 올라올 곳 같다는 짐작.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혼자 씽씽 운전해서 소 갈 데 말 갈 데 거침없이 다니며 온 동네참견을 다 하던 사람이 말 한 마디 섞을 데 없는 그곳에서오래 버텨내겠습니까.
아니다 다를까 몇 달후, 할매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에서는 더 이상 못 살 것 같아서 다시 이쪽으로 이사를 온다고. 이쪽에다 집 하나를 세를 준 게 있는데 세든 사람들을 내보내고 자기가 들어가서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이사오면 상봉기념으로 큰 잔치를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한달 후 할매가 다시 연락이 와서 세들은 사람을 쫒아내는데 아주 애를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법에서 정한대로 두 달 말미를 주면서 집을 비우라고했더니 그쪽에서 크게 난색을 표하더랍니다. 집에다 돈을 많이 들여놨는데 어떡하냐고. 보니까 집안팎 페인트를 새로하고 식기세척기도 설치하고 뒷뜰에 지붕있는 덱도 설치해서 완전히 새로운집을 만들어놨더랍니다. 할매가 여기 살림을 다 정리하고 아들며느리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으니 다시는 이쪽으로 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그래서 오래오래 그집에서 살 줄 알고는 자기 돈 들여 단장했대요. 단장해 놓은 집을 좀 즐겨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두고나가게 생긴 세입자입니다. 참 억울하게 됐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세입자가 조금 보상을 해달라고하더랍니다. 그 요구를 들어주었냐고 했더니 할매가 전화기 속에서 펄쩍 뜁니다. 허락도 없이 자기들 멋대로 돈 들인 걸 왜 보상해 주냐면서. 그럼 집세라도 좀 깎아주지그랬냐니까 그것도 안 해주었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그냥 맨손으로 나가든지 처음처럼 도로 해놓으라고 했지"
와아,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습니다. 처음처럼 해놓으라니, 그걸 어떻게 해놓나요. 식기세척기야 떼서 가져간다지만 떼낸 자리는 어떻게 메꿀 것이며 수천조각으로 이루어진 덱은 어떻게. 그리고 벽에 바른 페인트는?
내가 기막혀하는 것도 아랑곳없이 할매는 분개합니다. 렌탈회사에도 자기편을 들지않고 세입자편을 든다고. 그래서 괘씸해죽겠다고. 내가 다시 말했지요. 오죽하면 그러겠냐. 나같으면 집안을 새로 단장해 준 값을 조금이라도 내주겠다. 그게 싫으면 집세 두 달이라도 받지않든지. 돈이 넘치게 많은 양반인데 그 정도의 인정은 베풀 수 있지않냐. 할매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절대 그러기는 싫으니 빈손으로 나가든지 처음있던대로 해놓고 나가야 한다고요.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할매를 싫어하고 기피할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맞았어요. 돈도 많은데, 연세도 많은데, 죽을 때 몽땅 지고 갈 것도 아닌데 조금만 너그럽고 후하게 마음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요.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할매한테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경찰서에 가 있답니다. 무슨 일이냐고 놀라서 물었더니 할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여기 있는 집 뒷뜰을 한밤중에 누가 차로 밀고 들어가서 쑥대밭을 만들어놓았다고. 덱이고 나무고 화초고 완전히 다 뭉개지고 으깨져버렸다고. 그걸 리포트하러 경찰서에 갔답니다.
“그 새끼들이(할매의 표현)집을 비웠어.두 달 말미를 주었으니 예정대로라면 다음달 말인데 그냥 나가겠다고하길래 얼른 내보냈지. 경찰이 혹시 누구한테 원한 산 일이 있냐고 물어보는데 보나마나 그 새끼들이 한 짓이야. 집단장에 5천불 가까이 들었다는데 내가 한 푼도 안 내주니까 화날만도 하지. 흥, 그렇지만 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인적사항을 경찰에게 다 넘겼으니 잡히는 건 시간문제야"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할매가 또 전화했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양원이랍니다. 망가진 뒷뜰때문에 보험회사랑 경찰이랑 접촉할 일이 많아서 이쪽 집으로 이사를 들어갔는데 (저쪽 집 파는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들어간 날 저녁 큰 사고를 당했답니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져서 갈비뼈가 세 대나 나갔다는 겁니다. 응급실에서 일 주일을 보내고 요양원으로 옮겨졌는데 앞으로 석 달을 거기서 지내야만 한답니다.
할매의 전화를 끊는데 등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세입자가 집을 비우면서 할매한테 얼마나 악을 품고 저주를 퍼부었을까,란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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