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한참 안 보이길래 찾아보았더니 클로젯에서 산더미같은 옷에 묻혀 있네요. 안 입는 옷을 추려내고있는 중이래요. 남편은 코로나가 시작되기 몇 년 전부터 재택근무를 했었는데 혹시라도 사무실로 돌아갈 것을 대비해 옷정리를 하지 않았더랬습니다. 이제 은퇴도 했겠다, 와이셔츠니 슬랙스니하는 정장종류의 옷들은 더 이상 입을 일이 없다며 다 도네이션하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 갑자기 몸무게가 부쩍 불어난 남편입니다. 치수가 두어자리나 늘어나서 예전 옷들은 하나도 못 입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버리고 없애는 데는 누구보다 일등인 나입니다. 얼른 달려들어서 거들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바닥에 쌓여있던 옷 몇 벌을 주섬주섬 집어들더니 옷걸이에다 다시 겁니다. 멀쩡하고 비싼 옷들, 아무래도 없애기엔 너무 아까우니 몇 벌은 잘 두었다가 나중에 살을 빼면 입겠답니다. 내가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리고 비아냥거렸습니다. 흥! 잘도 살을 빼겠다. 앞으로 더 찌지는 마셔...

젊었을 땐 원 갤런짜리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우고 잠자리에 들어도 변하지 않던 남편의 몸무게. 위에도 말했지만 근래에 갑자기 불어난 것입니다. 날카롭고 예리하던 턱선이 두툼하게, 그리고 32인치 허리사이즈가 34로 늘어났어요. 곧, 36인치로 늘어날 지경인 겁니다. 그런데도 예전 그대로의 식습관을 고칠 생각없이 유지하는 남편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죽거렸던 것입니다. 내 말에 남편이 일손을 멈춥니다. 그리고 나를 잠깐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일갈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격려해 주고 용기 북돋는 말을 해 주고 편들어 주는 게 부부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가슴이 쿠웅, 내려앉았습니다. 무안하고 미안했습니다. 맞았습니다. 부부는 살인이나 사기 등 법에 저촉되는 일을 저질렀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같은 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엄마와 아버지,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싸웠습니다. 이유는 따로 없어요. 그냥 의견 불일치. 단 한번도, 정말이지 단 한번도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인 적 없습니다. 아무리 한쪽이 타당한 의견을 내놓아도 일단 무조건 반대부터하고 타박부터 하니까 싸움이 안 날 수가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남편과 처음 한국을 같이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 잠자리에 들었는데 안방에서 마구 고함 지르고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놀라서 안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둘다 속옷바람으로 앉아서 삿대질을 해가면서 싸우는 이유, 참 기가 찹니다. 일본과 무역을 하는 삼촌이 있습니다. 한국물건을 일본에, 일본 물건을 한국에다 가져다 판매하는. 내게는 하나 뿐인 삼촌이지요. 그 삼촌이 우리가 한국에 도착하는 날, 일본으로  무역을 하러 갔답니다. 사흘 후에 돌아 온답니다. 아버지는 그게 섭섭한 거예요. 조카가 새신랑을 대동하고  먼 미국에서부터 날아왔는데 첫날 다같이 인사를 받아야지하지 않겠느냐. 어른이라고는 아버지랑 삼촌뿐인데 일본은 며칠 후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지 않느냐는 게 아버지의 의견. 맞기도하고 틀리기도한 아버지의 의견이긴 합니다만 그럴 때는 그냥 그러게 말이요, 하고 장단을 맞추는 게 수 아닐까요. 그런데 엄마는 평생 해왔던 것처럼 아버지 말에 반박을 한 겁니다. 첫날 만나나, 며칠 후 만나나 뭐가 그리 중요하냐. 미국 돌아갈 때까지 시간도 많겠다, 아무 때나 보면 되지,하고. 그렇다고해서 미국에서 날아온 새신랑과 딸이 옆방에 있는데 그렇게 소리 높여 싸워야했을까요.

내 주위에도 유독 싸움이 잦은 부부가 있는데요. 머리에 허옇게 서리가 앉았는데, 결혼한지 4,5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사니 못 사니 사이 안 좋은 부부가 있는데 가만히 보면요,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우리 아버지와 엄마같은 경우입니다. 죽어도 상대방 의견에 동조를 안 한다는 겁니다. 맞거나 틀렸거나 일단은 반대부터하고 본다는 것입니다.

비단 부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한테도 그런 지인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의 최고대학을 나온 아주 유식하고 박식한 사람입니다. 처음에 나는 이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줄 알았어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그게 아니고'를 찾으면서 내 의견을 묵살해서요. 가만히 관찰하니 나한테 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한테 다 그래요. 자기 남편한테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이 지인과 대화하는 일이 정말로 고역입니다. 신문에서 본 정확하고 명확한 얘기라고해도 그 지인은 무조건 ‘그게 아니고’ 부정부터 합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말 아니면 안 하게 되었어요. 말만 하면 싸움이 벌어지니까. 왜 비싼 밥 먹고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런데 어느날입니다. 독자 한 분이 내 생일을 기념해 '여왕벌' 그림이 그려준 컵을 하나 보내주었어요. 내 별명이 여왕벌이라고(지금은 아니지만)글에 몇번 썼었던 걸 기억하고는. 그 컵을 지인이 보고는 웬 거냐고 묻습니다. 그녀와 대화하기만하면 짜증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나는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로부터 받은 거라고. 참 좋겠다. 그런 팬도 있고,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랬다면 여기서 그녀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늘 하던대로 삐딱한 반응을 보입니다.
“참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이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참 많아.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가족도 아닌 사람한테 생일선물을 다 보내?”

그녀는 남의 말에 동조만 안 할 뿐만 아니라, 시니컬할 뿐만 아니라, 칭찬에도 엄청 인색합니다. 단 한번도 남을 칭찬하는 꼴을 본 적 없습니다. 자랑같지만 예전 내 중앙일보 칼럼이 굉장히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계숙칼럼때문에 중앙일보를 본다는 독자가 있을 정도로. 그러나 단 한 사람, 위에 말한 지인은 제외입니다. 늘 혹평을 합니다. 혹평하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취향은 다를 수 있으니까. 이 여자는 내 글을 마구 혹평한 후 꼭 다른 칼럼니스트를 갖다 부칩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나온 아무개의 글은 너무 좋더라. 너는 그 아무개 필력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미국 온지 40년이 넘도록 친구하나 없는 그녀. 어떤 땐 정말이지 나도 인연을 끊고 싶지만 나마저 멀리하면 혼자 외돌톨이가 될까 봐 마지못해 붙혀주고 있습니다.

지난 번 글에도 썼지만 남편은 내가 남의 겉모습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흉보는 경우만 제외하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나무라거나 힐난해 본 적 없습니다. 항상 내편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이 점을 재확인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캘리포니아 주정부 산하와 관계된 일이라 열 두가지 언어로 서류가 나갑니다.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서류는 한국인인 내가 첨삭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담당자가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번역서류를 봐달라는 요청을 해 올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하라는 건지 모호하게. 그저께도 그랬어요, 가로 안에 있는 단어를 지우고 뭐 어쩌고 하는데 죽어도 모르겠어요. 이메일로 문의해도 명확한 대답이 안 와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는데 설명이 장황합니다.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할 수 없이 담당자를 홀드시켜놓고 거실에 있는 남편을 불렀습니다. 남편이 담당자와 통화한 후 내게 다시 설명을 해주는데, 이런! 정말로정말로 쉬운, 자다가 일어나서 해도 할 수 있는 쉬운 겁니다. 내 영어실력이 짧으니 못 알아 들은 겁니다. 그러나 남편은 내게 말합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나 역시 무슨 말인지 헷갈렸으니까. 만약 반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히 나는 남편에게 면박과 핀잔을 잔뜩 주었을 것입니다. 이 쉬운 것도 모르냐고 말입니다.

대립되는 의견을 빌미로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싸워댔던 우리 부모를 보면서 나는 절대로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이 악물고 결심을 했건만 나도 모르게 취득한 학습효과인지 가끔은 못된 버릇이 나옵니다. 오늘,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가능하면 남편 말에, 남의 말에 동조하기로. 정 아니다 싶으면 그냥 입을 다물기로. 논쟁해서 세상을 다 얻을 일이 아니라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을 때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