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가끔 되뇌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말. 지금 알고 있는 삶의 지혜, 정보, 지식, 그리고 교훈을 당하기 전에, 체험하기 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그래서 미리 방지하고 최소화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내 인생이 좀 더 풍요롭고 윤택했을 텐데. 그 중 한가지가 바로 피부입니다. 피부가 외모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미리 알고 관리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릴 때 여드름이 좀 나긴했었지만 성년이 되면서는 피부좋다는 소리를 아주 많이 들었던 나였습니다. 생김새는 옥상에서 내던져진 메주같지만 피부 하나는 끝내준다고. 그랬습니다. 끝내주었지요. 아이 크림 한 번 안 발라도, 그 흔한 팩이나 맛사지 한 번 안해도 공기 잔뜩 든 공처럼 탱탱하고 처지지않는 백만불짜리 피부였습니다. 여드름 피부가 그렇듯 쉰이 넘도록 잔주름도 없었더랬습니다. 백옥같이 하얗고 윤나는 피부는 아니었지만 슈퍼마켓 선반에서 집어온 몇 불짜리 로션 한 가지만 발라도 전혀 트러블이 없는 건강한 피부였습니다.
나는 이 피부가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정성을 쏟지않았더랬습니다. 직장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늘 나가 걸으면서도, 그러니까 백도가 넘는 땡빛에 나가 걸으면서도 자외선차단제를 바르는 둥 마는 둥했습니다. 집안에서도, 비오는 날에도 자외선 차단제로 꼼꼼하게 중무장을 하는 지인을 유난떤다고 비웃었지요. 햇볕에 그렇게 많이 노출되었었지만 내 얼굴은 잡티만 몇 개 눈에 뜨일 뿐 기미는 남의 일이었으니까 자외선 차단제의 중요성을 몰랐어요. 적어도 그랬습니다. 3년 전 한국에서의 일만 없었다면.
10월이었습니다. 한국가을의 땡빛이 따가왔습니다만 아무런 차비도 없이 동생가족이랑 예전 고향집을 둘러보러 나갔습니다. 그냥 잠깐만 둘러 볼 예정이었는데 이왕 야외에 나왔으니 산책이라도 좀 하자는 동생의 말을 쫒아 두 시간 정도 시골길을 걸었어요. 올케는 미리 준비해 온 양산을 썼습니다만 나는 맨얼굴을 무방비로 햇빛에 노출시켰습니다.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가면서 친구 미영이가 사는 천안을 방문했습니다. 친구 미영이는 천안 시에서 한 시간 거리의 대형 행사장의 음식을 총괄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결혼식, 진갑잔치, 돌잔치를 한 달에도 수십차례 치르는 행사장답게 야외도 무척 근사합니다. 무릉도원입니다. 수천만원을 호가한다는 수석에 폭포에 각종 진귀한 식물들에. 그래서 구경한답시고 한 시간 정도를 또 땡빛아래 있었습니다. 평생 후회할 짓을 한 거지요.
미국에 돌아온 다음날, 거울을 보는데 얼굴 색깔이 예전같지가 않습니다. 거무스럼한 것이 눈 두덩이를 시작으로 양쪽 뺨을 덮고 있는 겁니다. 얼굴의 반 이상을. 아뿔싸, 이게 바로 그 기미라는 거구나…
이상하게도 걱정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속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신기했습니다. 내 주위 아줌마들 중 기미때문에 속 끓이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드디어 나도 그들의 대열에 동참하게 생겼네, 하는 생각뿐. 별로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더랬어요. 좀만 신경써주면 금방 해결될 줄 알았거든요. 그게 얼마나 큰 오산인 줄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이게 죽어도죽어도 안 벗겨지는 겁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기미없애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써봤습니다. 갈은 생감자. 소주에 갈아넣은 양파. 꿀에 잰 소다가루. 밀가루에 갠 레몬 쥬스. 코코넛오일에 잰 비타민 C 가루… 물론 효험이 뛰어나다는 온갖 종류의 크림과 세럼도 몇 통이나 발랐지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안 해서 그렇다고요? 내가요, 독일의 철학자 칸트랑 비슷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내가 계란 먹고 사과 먹는 모습을 보고 직장동료들이 시간을 가늠할 정도로(매일 오전 11시엔 삶은 계란 두개, 그리고 오후 두시엔 사과 하나를 먹어요. 십년 넘게 하루도 안 빼고)한 번 시작한 건 끝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 효과가 없다 싶어도 고래 심줄같이 질긴 인내심으로 적어도 석달 이상은 해봅니다. 정성스럽게 매일매일. 그랬는데도 안 됩디다.
한국에서 사온 기미특효라는 크림을 튜브 끝까지 짜내어 바르던 날, 나는 거울 앞에서 망연자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걸어 본 간절한 바람이 무참하게 무너진 걸 확인했거든요. 하루도 안 빼고 1 년이 다 되도록, 치약만한 크기의 대형튜브를 다 쓰도록까지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걸 매일 확인하면서도 나는 간절히, 정말로 간절히 염원했더랬습니다. 지금은 아니어도 이 한 통을 다 쓸 때쯤이면 뭐가 달라져도 달라져 있겠지하고. 그동안 쓴 건 미국에서 만든 거고 한국에서 만든 크림이었으니까. 근데 아니었습니다.
참담한 마음으로 의사를 보러갔습니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다르게 해볼 방법이 없었거든요. 의사의 도움으로 레이저로 벗겨내는 방법 외에는. 나의 초조하고 참담한 마음과는 다르게 의사가 내 얼굴을 보더니 픽 웃으며 말했습니다. 엄청 큰일이나 난 줄 알았더니 뭐 별거 아니네. 예약을 하면서 얼굴때문에 대인기피증 걸리겠다고 징징 댄 걸 의사가 들었나 봅니다. 그가 말합니다. 첫째, 레이저같은 시술은 목숨과 연관된 심각한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내 보험에서 일절 카버가 안 된다. 둘째, 카버가 된다해도 들이는 시간과 돈에 비해 효과가 아주 미미하다. 그리고 셋째, 레이저로도 완전하게 지울 수는 없고 희미하게 할 수는 있는데 그마저도 오래 지속이 안 된다. 햇빛을 보는 순간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의사는 스트레스받지 말고 기미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할 거라면서도 내 얼굴에 나타나는 절망을 보았는지 크림 이름 하나를 적어줍니다. 온갖 종류의 크림과 세럼에 별 효과를 보지 못했던 나는 별 기대가 가지 않더군요. 그래도 의사가 직접 추천해준 거니까 다른 것보다야 낫겠다는 마음으로 석달을 열심히 발랐습니다. 그랬지만 효과는 개뿔.
의학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아직 극복 못한 세 가지가 있답니다. 암, 탈모, 그리고 기미. 누구는 말합니다. 기미는 신의 영역이라고.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그런 것 같아요. 포기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같습니다.
기미가 생긴지 3년, 나도 체념했습니다. 이제와서 뭐 새로 시집갈 것도 아니고 이대로 그냥 살아야지. 그래도 속상한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짜리몽땅 작은 키에 둥글넙적 못생긴 얼굴이었지만 유일하게 남의 부러움을 받던 피부를 이렇게 망쳐놨으니. 이런 곤궁해보이고 지쳐보이는, 거무스럼한 피부색을 지닌채 평생 살아야 한다니. 후회가 가슴을 칩니다. 피부가 외모에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 큰 줄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사진은 기미가 생긴 이듬해 한국방문 때. 뺨 전체가 기미로 시커멓게 뒤덮여 있습니다. 기미가 생긴 이후에는 사진찍는 걸 기피했던지라 친구가 몰래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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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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